즈레냐닌 세르비아어: Зрењанин 헝가리어: Nagybecskere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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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밀도 | 93명/km²(지자체, 2011년) 400명/km²(도심, 2011년) | ||||||||
면적 | 1,325.88km²(지자체) 193.03km²(도심) | }}}}}}}}} | |||||||
<colbgcolor=#104172> 우편번호 | 23000 |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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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도시. 지리적으로는 루마니아와 공유하는 바나트(Banat) 지역에 속한다.2. 언어 표기
세르비아어 | Зрењанин[1] |
헝가리어 | Nagybecskerek (너지베치케레크) |
독일어 | Großbetschkerek (그로스베치케레크) |
크로아티아어 | Bečkerek (베치케레크) |
슬로바키아어 | Bečkereckej (베치케레츠케이) |
루마니아어 | Becicherecul Mare (베치케레쿨 마레) |
튀르키예어 | Beşkelek (베슈켈레크) |
3. 역사
14세기 경 헝가리 왕국의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테메슈바르에 거주했을 때 근처에 있는 바나트를 방문하면서 헝가리인 귀족 베체이 임레(Becsei Imre)가 따라왔고 현재의 즈레냐닌 일대에 정착한 베체이 임레의 성씨를 따 베체레키(Bechereki)로 불리기 시작했다.[2] 1330년대만 하더라도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고 주민 대부분도 헝가리인 농민이었으나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들 러요시 1세 대에 세르비아인 농민들이 다수 이주해왔으며 이 가운데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성직자들도 포함되었다.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에게 개발살이 난 룩셈부르크 왕조의 헝가리 국왕 지그몬드는 헝가리 왕국의 국경 방어를 위해 남부 국경에 정착한 세르비아인을 써먹을 것을 고려했고 1398년 9월 30일 본인이 직접 방문해서 현지 조사를 시행했으며 1403년 세르비아인 귀족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에게 이곳을 봉토로 수여했다. 이후 헝가리 왕국 내에서도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모하치 전투로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헝가리 왕국이 붕괴된 후 헝가리를 상속받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페르디난트 1세는 이곳을 대 오스만 방어 거점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으나 1552년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함락되어 오스만 헝가리의 트므슈바르 에야레트(Eyālet-i Tımışvār)에 속하게 되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탈환하여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을 헝가리 왕국 직할이 아닌 군정국경지대(Militärgrenze)라는 특수 지역으로 만들어 헝가리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외에도 세르비아인이 다시 정착했고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이 많이 들어왔으며, 심지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여파로 카탈루냐인까지 흘러들어와 민족의 용광로가 되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헝가리인이 독립운동을 펼쳤을때 이곳의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은 빈의 합스부르크 정부를 지지하여 반 헝가리 운동을 펼쳤고 이후 보이보디나 공국에 속해 오스트리아 제국 내 세르비아인 자치주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근대화가 되어 발전을 거듭했으나 1868년 대타협으로 헝가리인이 주권을 되찾으며 보이보디나 공국은 폐지되었고 헝가리 왕국 산하 토론탈 주(Torontál vármegye)에 속하게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많은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잡혀가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18년 세르비아 군대가 진군해 점령했고 이후 세르비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면서 남슬라브인을 위한 새로운 국가의 영토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승인받았다. 1935년에는 세르비아 국왕 페타르 1세의 이름을 따 페트로브그라드(Петровград)로 개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비사드, 수보티차와 달리 헝가리로 반환되지는 않았으나 독일 국방군이 진주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당시 많은 파르티잔이 나치 독일에 맞섰는데 종전 후 이 당시 활약한 보이보디나의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자르코 즈레냐닌(Žarko Zrenjanin 1902~1946)[3]의 이름을 따 즈레냐닌으로 개명되었다. 티토 집권 시기에 재건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다시 피해를 입었고 1999년에는 나토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내전이 끝나고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다소나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4. 인구와 종교
2011년 기준 인구는 123,632명으로 74%는 세르비아인이며 10%는 헝가리인이다. 그 외에 소수의 집시,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세르비아인은 당연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으며 헝가리인은 대부분 가톨릭을 믿는다.5. 기타
지역 스포츠팀으로 FK 프롤레테르 즈레냐닌이 있다.6. 출신 인물
블라디미르 이비치 - 1977년생. 세르비아의 축구선수 및 감독.마야 오그네노비치 - 1984년생. 세르비아의 배구선수.
요바나 브라코체비치 - 1988년생. 세르비아의 배구선수.
보얀 마티치 - 1994년생. 세르비아의 축구선수.
[1] 옛 표기는 헝가리어에서 유래한 베치케레크(Бечкерек).[2] 한국어로 직역하면 베체이의 숲 정도.[3] 나중에 나치 독일에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지만 다시 체포되지 않기 위해 도망가던 중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