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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청나라 | 고려 |
1. 개요
조선과 류큐의 관계.2. 역사
유구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해상무역을 생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 및 중국, 동쪽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교류하고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도 나하에 모여든다. 유구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가게 등을 차려 장사를 한다.
신숙주,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고려 멸망 직전인 창왕 시기인 1389년 8월 중산왕(中山王)[1] 삿토(察度)가 표문과 남방의 물산을 진헌하고, 왜구에게 사로잡혀간 류큐의 피로인을 송환하였다. 류큐가 고려에 접근한 것은 1371년 아유타야와 통교, 1372년 명에 입공한 것의 연장선으로 무역상의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가 답례로 영접사로 파견함으로써, 양국관계가 시작된다. 이후 조선 전기 류큐 사절은 총 48회 조선을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였으나, 조선은 단 두 차례의 사절을 보내는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2]신숙주,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또한 이 시기 산남왕의 아들 승찰도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또한 실록에는 산남왕 온사도라고 나오는데 학계에서는 이 둘을 동일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관련 기사 태조 이성계는 온사도를 불쌍히 여겨 츄잔왕 삿토의 송환요구를 거부하고 구휼을 해주었으며 조정의 조회에도 참여시키는 등 후대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큐에게 있어 조선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물산이 풍부한 나라로 무역의 좋은 후보지 중 하나였고, 유교ㆍ불교를 비롯한 문화의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고 있던 시기였다. 여튼 류큐는 명과의 책봉관계 속에서도 조선을 우위에 있는 국가로 인식하며, 조선 초기에는 칭신과 조공의 예를 갖추었다.[3] 한편 조선은 초기까지 류큐를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대우하였으나, 1431년 이후 류큐가 형제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삼잔 통일 후 명의 책봉국임을 강조하자, 명의 책봉국임을 확인한 후, 적례교린의 테두리 속에서 국왕외교의 상대국으로서 편입시켰다.[4]
15세기 일본 세력의 해상권 장악과 후기 왜구의 발호 과정에서 양국의 교류는 저지당하고 쇠퇴하기에 이른다. 쓰시마인들의 방해로 류큐 사절은 쓰시마의 상선에 편승하였으며, 단종대에 이르면 일본인 대리 사절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461년부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정치적 정통성 결여를 국제적 위상을 통해 보상하고자 외국 사절들을 후대하고 방만하게 운용하면서 세종대 마련한 대일, 대유 통교 체제가 문란해지자, 세조 중기부터 일본인들이 류큐국왕사를 가장하기까지 하였으며, 성종 초기 신숙주가 대일 통교 체제를 정비하고, 회사품을 줄이자, 성종대에는 무려 15차례나 일본인들이 류큐 사절로 위장하였다.[5]
조선도 이를 알고 의심하며 왜구의 문제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대응하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이와 같은 위사가 계속되자, 조선은 위사의 방지책을 강화할 것을 개진하며 류큐 사절에 대한 통제를 엄격히 하였다.[6] 그리고, 일본인들의 통교 방해로 충분히 지쳐있던 류큐의 대조선 통교 의욕도 감퇴했다.[7] 결국 1524년 류큐국사 등민의(等悶意)의 내왕을 마지막으로 단절되고, 이후에는 명 북경 회동관에서의 간접 동교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해상 교역이 아닌, 일본에 대한 정보 교환 및 표류민 송환 등이 외교의 전면으로 부상했다.[8]
1609년 류큐가 사실상 일본에 복속되어, 쇼네이 왕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는 정보는 조선에게도 발빠르게 전해졌다. 조선은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인 것을 알았지만, 명이 류큐와 단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선 측도 양자의 관계를 모르는 척 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명에서의 자문교환이 1634년까지 지속됐으나, 1636년 이후 조선이 일본과 통신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일본에 복속된 류큐와의 통신관계는 사실상 단절될 수 밖에 없었다.[9]
다만 표류민을 서로 돌려보내주었다는 기록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청나라에 간 사신들이 류큐의 사신이나 유학생을 만나 잠깐씩 교류를 하는 식으로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다.[10]
이후 고종 시절에 일본이 완전히 류큐국을 병합한 사실이 전해졌으며, 영중추부사 이유원과 이홍장의 편지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 #
3. 이기빈의 류큐국 왕자 살해설
조선왕조실록의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기빈의 졸기 부분에서 이기빈이 류큐국 왕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 그러나 실제로 이기빈이 류큐국 왕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기빈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표류한 외국 배의 선원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류큐국 왕자를 죽였다는 내용은 오직 조선왕조실록의 이기빈 졸기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다.1611년(광해군 3) 8월에 제주도에 외국 배가 표류한 사건은 이기빈에 의해 적선이 출몰하여 왜구를 공격했다는 장계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후 이 배가 왜적선이 아니라 일반 상선이었다는 말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조사하여 이기빈의 보고가 거짓임을 밝히고 귀양을 보낸다. 그러나 제주도에 표류한 배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사건은 정리된다. 그리고 1년 뒤 제주도에 다시 배 한 척이 표류한다. 1612(광해군 4) 9월 9일에 류큐인 8명이 표류해왔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9월 12일에는 이들에게 노자를 마련하고 류큐국 왕에게 이들을 송환시킨다는 내용으로 자문을 지어 함께 보낼 것을 청한 데 대해 왕이 윤허한 기록이 있다.
류큐 측에서도 이들을 무사히 송환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1620년에 중산세자 상풍의 명의로 조선에 보낸 이이문(移彛文)에는 1612년 제주에 표류한 인물 8인을 환국시킨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기빈이 실제로 류큐국 왕자를 살해했다면 류큐와 조선의 우호 관계가 적대 관계로 전환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1659년(효종 10)에 고기잡이를 하다 류큐에 표류한 이들을 쌀을 주며 우대했던 기록이 존재하며 1661년(효종 2)에도 28명이 류큐를 거쳐 대마도에 표류한 기록이 있는데 류큐에서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았다. 이런 기록은 1669년, 1716년, 1741년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표류했다가 돌아온 조선인들의 증언에는 류큐 세자가 살해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언급된 바 없다.
또한 조선 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주영편》에는 류큐국 세자를 살해한 일로 류큐국에서 조선을 원수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어, 북경에 간 조선 사신이 류큐국 사신을 만나 류큐국에서 조선을 원수로 여기냐고 묻자 류큐국 사신이 크게 놀라며 그런 일은 없다고 답했다는 내용도 존재한다.
오히려 피해자가 베트남인일 가능성도 있는데, 1770년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 돌아온 제주도 선비 장한철의 기록인 <표해록>을 보면 무인도에 표류했던 장한철 일행이 지나가던 중국 상선에게 구조되었는데 그들이 탐라 사람임을 안 중국 상선의 베트남인 선원들이 칼을 빼들고 "우리 왕자를 탐라 왕이 죽였었으니 너희를 죽여서 복수하겠다"고 하여 중국인 선주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조선인들을 조각배에 태워 내쫒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위에 언급된 《주영편》에 실린 기록을 보면 제주도 어민들이 폭풍으로 표류하여 안남국(베트남)까지 표류했을 때 베트남의 고위 관리가 '예전에 베트남의 왕자가 조선인들의 손에 죽었으니 나도 너희를 죽여서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말을 통역을 통해(한문을 이용한 필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했다가, 그 말을 전해듣고 통곡하는 조선 어민들의 모습을 본 관리의 부인이 농담이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달래고 실제로도 아무런 위해는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이기빈이 제주에 표류한 동남아 상선을 약탈하고 그 선원을 죽였던 것은 진실이나 류큐국의 왕자를 죽였다는 설화는 광해군말기 인조초기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만들어진 허구라고 할 수 있다.[11]
4. 여담
-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우호국가로서 시작은 류큐에서 먼저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 이전까지 양국은 교린을 하던 관계였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고 나온다.[12] 꾸준히 사신과 예물을 보내면서 교린하였지만[13] 류큐국이 사쓰마 번에 정복된 뒤에는 교류가 줄어들어서 거의 없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과 류큐 쪽 자료를 근거로 조선과 류큐의 상호교류와 상호 인식을 시대순으로 분석한 책도 있다.
- 조선 시대에 제주도 사람들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반대로 류큐 사람들이 제주도로 표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과 류큐 양국 간에 이런 사람들을 상대국에 돌려 보내는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에서는 1416년에 이예(李藝)를 사신으로 류큐에 파견하였고, 왜구에게 잡혀 끌려갔던 조선인 44명을 구해서 돌아왔다. 숙종때도 전남 진도 어민들이 류큐국에 표류해서 복건성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사례가 있다. 실록 정조 시절에도 류큐국의 배가 조선에 표류해서 잘 대우해주다가 돌려보낸 사례도 있다. #,#,#,# 요나구니섬 같은 경우에는 아예 조선인의 표류 기록이 섬 최초의 기록일 정도이다.
1802년, 조선의 평민 집단이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류큐 현지인들은 이들을 약 8개월간 후하게 대접하고 귀국할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때 표류민이었던 문순득은 훗날 여기서 직접 체험한 것들을 모아 정약전이 '표해시말'을 집필하는데 도움을 줬다.
고종시절에도 표류민을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 #
-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는 당시 일본과 류큐국에 대한 자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류큐 일대가 현재는 일본에 소속돼 있지만 과거에는 별도의 나라를 이루었던 점 때문에 한국의 제주특별자치도(옛 탐라)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류큐의 역사가 한국에 많이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무리한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한국의 선우영준이라는 교수는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의 주민들이 류큐 일대로 이주해 와서 지배했다는 주장을 했다. 2007년엔 고려의 삼별초가 류큐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건설했다는 가설이 나오기도 했다. # 하지만 우라소에성에서 13세기의 고려기와가 출토된 것은 사실이나, 류큐의 역사서에서는 삼별초 관련 기록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또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세웠다는 율도국이 류큐라는 설도 있으나, 홍길동으로 추정되었던 오야케아카하치의 행적이 조선에서의 기록과 모순되기 때문에 신빙성은 매우 떨어진다. 다만 오키나와의 아구니지마(粟国島, 속국도)라는 지명이 율도국(栗島國)이라는 이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정도는 있다.
5. 관련 문서
[1] 오키나와 섬은 남산, 중산, 북산의 세 나라로 나뉘어 있었는데 13세기를 전후하여 중산국이 오키나와 섬을 통일하였다.[2] 하우봉(2018), "조선 전기 유구,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p.203~206.[3] 金康植(2021), "15∼16세기 朝鮮과 琉球의 해역 이동",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4, p. 17~18.[4] 하우봉(2018), "조선 전기 유구,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p.207, 213.[5] 하우봉(2018), "조선 전기 유구,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p.208;金康植(2021), "15∼16세기 朝鮮과 琉球의 해역 이동",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4, p.6.[6] 《조선과 유구》 덧붙여 후술하는 하우봉 교수도 참전한 책이지만 여러 교수가 함께 한 것 때문인지 다른 개인 논문과 전집과는 내용이 다소 다르다.[7] 하우봉(2018), "조선 전기 유구,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p.208~209.[8] 김강식(2021), "15∼16세기 朝鮮과 琉球의 해역 이동",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4.[9] 夫馬進(2008), "1609년 일본의 류큐 합병 이후 중국, 조선의 對류큐 외교 ― 동아시아4국의 책봉, 통신 그리고 두절 ―", 《이화사학연구》 37, p. 24~25, 32.[10] 예를 들어서 1760년에 사행길에 오른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은 북경에 공생(貢生)으로 있던 채세창(蔡世昌) 등의 류큐인들을 만나 한시를 주고받는 등 서로 교류를 나누었으며, 이 일을 자신의 저서인 <북원록(北轅錄)>에 남겼다.[11] 박수밀. (2015). 고전문학 한문학 : 류큐 세자 이야기의 진실과 변이(變移) 양상 -역사적 사건의 굴절 양상과 그 의미-. 우리어문연구, 51(0), 175-203. 참조[12] 당시 공식 표기가 이거였다. 현대에 류큐니, 류큐 왕국이니 하는 명칭은 일본어에서 이 나라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동아시아에서 제국, 왕국, 공국, 민국/공화국 같은 표현들을 국호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관례가 동아시아에 유입·정착되면서 이뤄진 것이다.[13]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류큐왕 찰도가 조선에 臣을 칭한 적도 있고 조공을 먼저 바치거나 광해군에게 명나라에 왕작을 받은 것을 알리며 조선은 형, 류큐는 동생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