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27년 5월 28일, 일본 제국이 국민당의 1차 북벌에 간섭하기 위해 관동군의 일부를 산둥성의 일본 조계지로 파견한 사건을 말한다.2. 배경
1926년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고 우페이푸, 쑨촨팡의 직예군벌과 장쭤린의 봉천군벌에 대항하는 통일전쟁을 일으켰다. 1927년 초에 이르러 국민당은 하남, 산동 성경에 이르렀는데 국민정부의 조계지 회수를 비롯한 혁명외교와 1927년 3월의 난징사건은 열강으로 하여금 국민정부를 믿을 수 없는 적색세력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와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은 불간섭주의를 표방하여 국민당 내부의 우파 세력을 지원하여 국민당의 적화를 막는 방법으로 중국 문제에 접근하려 했는데 이는 육해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굴욕외교라는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국민당 내부에서는 국공 갈등이 심각하여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여 장제스를 중심으로 국민당 우파들이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였으나 4월 21일 수립된 일본 제국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시데하라 기주로 전 외무대신이 주장하던 불간섭외교를 버리고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표방하고 있었다. 난징 국민정부가 독자적인 북벌에 나서 다시 산동성에 접근하자, 봉천군벌은 산동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산동성의 일본 권익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3. 전개
3.1. 일본군의 출병
다나카 기이치는 취임 직후 4월 22일 시정방침 연설을 통해 중국에 대해 간섭할 것임을 명백하게 드러냈다."우리나라 및 극동에 가장 중대한 외교문제는 중국이다. 중국 국민의 정당한 요망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것을 달성하는 길도 마땅히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중국 국민도 역시 신중하게 반성, 숙고할 것을 희망한다. 특히 공산당의 활동으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본의 입장으로서, 또 동아의 평화 유지에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일본으로서 이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국민혁명군이 5월 21일 진포철로의 요충지 방부를 점령하고 쉬저우를 향해 전진하여 산동성의 장쭝창의 본거지를 공략하려 하자 5월 28일[1]의 각의에서 관동군의 산동반도 파견을 결정하였다. 다나카는 다롄에 주둔한 관동군 제10사단 33여단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5월 30일 다롄을 출발한 2천명의 관동군은 쉬저우 함락 직전인 6월 1일[2] 칭다오시에 상륙하여 교제로를 제남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난징, 한커우 등의 사건으로도 분명하듯이 일본 측의 거류민 보호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생명, 재산에 위해가 가해지고, 일본의 명예도 손상되는 폭거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동란은 화북에도 똑같은 불상사가 재발할 우려가 있다. 때문에 일본은 거류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 육군을 출병시킨다. |
이 사실은 열강과 더불어 난징, 우한, 베이징에 모두 통보되었다. 열강은 이에 호응하여 미국과 영국이 각각 2천명의 병력을 텐진과 베이징에 증강시켰다. 관동군의 목표는 북벌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으로 장쭝창과 쑨촨팡을 원조하는 한편 산동성에서의 전황을 관망하였다.
3.2. 중국의 반응과 일본군의 증강
장쭤린의 북양정부,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 모두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1차 산동파병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이중에서 제일 항의가 강경했던 쪽은 혁명외교를 고수하던 우한 국민정부였는데 우한 측은 일본군의 산동 파병은 조계지의 병력을 증파한 영국의 파병보다 악랄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21개조 요구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상하이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일단체가 조직되어 일본 상품 불매운동, 일본 상점과 은행에 대한 거래 중지, 일본 기선 승선 금지 운동이 벌어졌다. 일본 내부에서도 시기상조,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사태가 절박하지 않은 이상 군대를 칭다오에 머물게 하겠다고 발표했다.하지만 국민당의 적화를 우려하고 있던 열강은 일본의 1차 산동파병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중국의 어느 정부도 일본의 산동파병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북벌을 막는데 급급한 북양정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난징 정부도 우한과 봉천군벌을 동시에 적대할 수 없었으며 우한 정부는 산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극심한 경제위기와 더불어 마일사변을 비롯한 내부의 국공갈등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대응은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장쭝창과 쑨촨팡의 일본의 원조로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다나카 기이치는 봉천총영사 요시다 시게루에게 훈령하여 장쭤린 측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했는데 요시다는 장쭤린의 총참의 양위팅가 회담한 이후 장쭤린이 국민당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보고했고 장쭤린이 패하면 동북의 안정도 상실될 것이니 일본이 열강과 함께 진포철로, 경한철로, 교제철로를 점령하고 간섭하여 북벌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올렸다. 이에 다나카는 영국에 주요철로를 공동 점령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6월 23일, 국민혁명군이 산동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하여 태아장, 임성, 임기를 잇달아 점령하고 7월에는 교주에 주둔한 쑨촨팡의 부하 진이영이 국민당에 투항하여 교제철로를 장악했다. 이를 본 관동군은 2200명의 병력을 만주에서 칭다오로 증파하는 한편 3천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제남을 점령했다.
3.3. 일본군의 철군
그러던 중 1927년 7월 13일, 중국공산당이 국민정부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고 7월 15일 왕징웨이가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탕성즈를 비롯한 우한 국민정부의 반장 장령들은 장제스에 대한 공세에 돌입하였고 때맞춰 북양군벌의 역습이 시작되어 장제스는 쉬저우를 잃고 남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리쭝런, 바이충시를 비롯한 계계군벌들은 우한과의 통합을 위해 장제스에게 하야할 것을 촉구했고 궁지에 몰린 장제스는 8월에 공직에서 하야하겠다고 선언했다.이후 우한과 난징의 통합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면서 북벌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전선이 고착화된 것을 확인한 일본군은 1927년 8월 말에 철병을 선언하고 산동반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철병선언에서 추후 사태가 재발하여 일본인에게 피해가 있게 된다면 적절한 자위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재출병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9월에 이르러 증강되었던 일본군은 완전히 철수했다.
4. 결과
하지만 1928년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고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8년 5월, 6사단을 중심으로 하는 2차 산동파병을 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제남 사건이다.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일본근현대사시리즈 5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요코, 어문학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근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北伐時期 蔣介石과 反帝問題 : 濟南事件(1928.5)의 解決交涉 過程과 反日運動에의 對應을 중심으로, 배경한, 역사와경계 25권, 경남사학회.
6. 관련문서
6.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