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 ||||
헌정실시 | → | 1948년 4월 19일 ~ 1948년 4월 29일 | → | 1954년 3월 21일 |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 → |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
1948년 5월 20일, 총통과 부총통에 취임하는 장제스와 리쭝런[1] |
1. 개요
1948년 4월 19일에서 4월 29일까지 치러진 중화민국 헌정 역사상 첫 총통과 부총통 선거.2. 배경
1936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헌법초안인 <5.5 헌초>를 제정하여 헌정 준비에 들어갔다. 1937년 2월, 중국국민당 5기 3중전회가 소집되어 11월 12일 제헌국민대회를 소집하여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시행하지 못하였다. 항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른 1945년 5월, 중국국민당 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헌정 실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6전대회는 11월 12일 제헌국민대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허나 종전 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협상이 결렬되자 중국국민당은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굳히고 1946년 3월 중국공산당 통치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된다.[2][3] 이에 따라서 제헌국민대회는 계속 미루어지다가 1946년 11월 15일에야 개최된다. 제헌국민대회는 1947년 1월 1일을 기하여 헌법을 공포하고 12월 25일부터 헌법을 시행하기로 하였다.[4]1947년 3월 31일, 국민정부는 <국민대회 조직법>, <정부총통 선거파면법>, <입법위원 선거파면법>, <감찰위원 선거파면법>, <오원 조직법>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7년 11월 21일에 선거를 실시, 12월 25일 1차 국민대회를 소집하고자 했으나 국공내전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선거진행이 힘들었고 해를 넘겨서 1948년 3월 29일이 되어서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국민대회가 소집되었다. 1차 국민대회는 5월 1일에 끝났으며 악명높은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이 모더후이 등 1202명의 연명으로 4월 18일의 12차 회의에서 3독회를 끝내고 5월 10일부터 반포시행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총통 선거파면법>에 의거, 국민대회는 4월 16일에 총통 후보자를 공고, 4월 19일에 총통을 선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 전개
3.1. 총통 선거
총통 후보자 공고가 시작되자 당시 중국국민당의 당수이자 중화민국의 주석인 장제스를 총통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국민대회 대표 우징헝, 위유런, 후스, 왕윈우 등이 발기하여 장제스를 총통 후보자로 제안하자 4월 16일까지 2489명의 추천으로 장제스가 총통 후보로 출마했다. 그외에 109명의 대표가 사법원장 쥐정을 총통 후보로 추천하여 4월 16일까지 장제스와 쥐정 총 2명이 총통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대표 대회는 총 3045명이었으며 그중에서 2841명이 등록하였다.1948년 4월 19일, 2765명의 국민대회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통 선거대회에서 장제스는 총 2430표를, 쥐정은 269표를 획득하였고 국민대표 정원인 3045명 중 1523명의 찬성표를 얻으면 총통이 될 수 있었던 상한을 거뜬히 넘긴 관계로 장제스가 초대 중화민국 총통에 당선되었다. 총통 선거를 실시한 국민대회는 즉각 부총통 입후보자 공고를 시작하였다.
3.2. 부총통 선거
장제스의 단독무대에 가까웠던 총통 선거와 달리 부총통 선거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치러졌다. 4월 19일, 국민대회는 추천인 연대서명의 다수의 순에 다라 쑨커, 위유런, 리쭝런, 청첸, 모더후이[5], 서부림[6] 등 6명의 부총통 후보자를 발표하였다. 이후 여섯 후보는 공개경선에 들어갔다. 호남군벌 출신 청첸은 자오헝티, 허젠 등의 지지를 얻어 <재남경호남성동향회> 회의를 열어 공개적 지지를 구했고 황걸, 하요조를 비롯한 호남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위유런의 경우, 자신의 장점만을 얘기하면서 다른 후보를 공격하지 않는 등 신사적인 경선을 하였다. 하지만 제일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쑨커와 리쭝런의 경쟁은 매우 험악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이때 쑨커는 장제스와 광동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리쭝런은 미국 대사 레이튼 스튜어트를 비롯한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4월 23일 오전, 첫 부총통 투표가 실시되어 리쭝런 754표, 쑨커 559표, 청첸 552표, 위유런 493표, 모더후이 218표, 서부림 214표의 결과가 나왔다. 이때 난징 구국일보가 청첸을 옹호하고 쑨커를 비판하자 쑨커를 지지하던 광동인들이 분노하여 구국일보사를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쑨커의 득표수는 예상보다 오히려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하였다. 어쨌거나 과반수의 표를 획득해야 당선이 가능했던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4월 24일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4월 24일, 리쭝런, 쑨커, 청첸 3인의 결선투표가 실시되었는데 리쭝런이 1100여표, 쑨커가 900여표, 청첸이 600여표를 얻었다. 이에 4월 28일에 2차 결선투표가 행해져 리쭝런이 1156표, 쑨커가 1040표, 청첸이 515표를 얻었는데 제일 표를 적게 얻은 청첸이 후보에서 탈락되고 4월 29일에 2766명이 출석한 가운에 최종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리쭝런이 1438표, 쑨커가 1295표를 얻어 리쭝런이 중화민국 초대 부총통에 당선되었다.
4. 결과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파면법에 따르면 총통과 부총통 당선자는 당선 20일 내로 취임해야 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와 리쭝런은 1948년 5월 20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장제스는 헌법 준수와 삼민주의 관철을 시정방침으로 정한다고 선포하고 5월 24일, 웡원하오를 초대 행정원장으로 지명함에 따라 중화민국은 십수년에 걸친 훈정을 종식하고 헌정의 단계에 들어간다.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의 취임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장제스는 난징의 제국 종합 건물에서 거행된 의식에서 총통으로 취임했다. 쑨원이 1912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 취임을 선서했던 곳이었다. 이후 그와 리쭝런은 각자 아내를 동반하고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도열한 고관들을 접견했다. 훈장 하나가 달린 간소한 창파오를 입은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함께 형식적인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런 뒤 부부는 밖으로 나가 국민대회대표단과 합동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제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의 아내는 전방을 결연하게 주시했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589페이지. |
미합중국 국무장관 조지 C. 마셜은 장제스와 리쭝런의 취임식에 맞추어 선거결과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여 장제스와 리쭝런이 서로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5. 매체에서
영화 건국대업에서 묘사된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쑨커가 부총통이 될 것이라면서 부총통 출마를 만류하지만 리쭝런은 부총통 출마를 강행한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장제스의 예상과 달리 쑨커가 아니라 리쭝런이 부총통에 당선되자 장제스는 리쭝런이 청하는 악수를 무시하고 박수만 잠시 쳐준 다음에 대회장에서 퇴장해버린다.6. 참고문헌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1)
- 장성구,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
-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서울: 민음사, 2014)
[1] 리쭝런은 군복 차림인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자신도 군복을 입고 올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드레스 코드로 바람을 맞혀 망신을 주고자 했다는 말.[2] 다만 협상 기간중에도 일본군 철수지역에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무력충돌이 계속 되고 있었다.[3] 국공내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 양쪽 모두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처음부터 겉돌기만 했다.[4] 현재의 대만에서도 12월 25일을 제헌절로 기념한다.[5] 무소속.[6] 민사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