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주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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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9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에드먼드 제럴드 브라운 주니어 Edmund Gerald Brown Jr. | |
출생 | 1938년 4월 7일 ([age(1938-04-07)]세) |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제34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
1975년 1월 3일 ~ 1983년 1월 7일 | |
제39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 |
2011년 1월 3일 ~ 2019년 1월 7일 | |
가족 | 아버지 팻 브라운[1] 어머니 버니스 레인 브라운 배우자 앤 거스트 |
학력 | 성 이냐시오 고등학교 (졸업) 산타클라라 대학교 (편입) (1955-1956년) Sacred Heart Novitiate[2]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사회학 / B.A.)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J.D.) |
소속 정당 | |
경력 | 제 23대 캘리포니아 주 국무장관 캘리포니아 민주당 대표 제 47대 오클랜드 시장 제 31대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 제 34대, 39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1975 – 1983, 2011 – 2019)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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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가, 샌프란시스코 태생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팻 브라운[3] (임기 : 1959 ~ 1967년) 슬하 4남매 중 하나로 자랐다. 조부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조모는 독일 혈통의 이민자라고 한다.19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타클라라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약 1년 재학 후 Los Gatos에 위치한 수도회에 입문해 3년 가량 사제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설득으로 포기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뒤,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해 법무박사를 취득했다. 그러면서 재판연구원, 로펌그룹 Tuttle & Taylor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70년대 32세 나이로 주 국무장관에 당선되고, 4년 뒤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36세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고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연달은 대선 경선 출마와 실패 그리고 실정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공화당에 의해 상원 선거에서 낙마하면서 한동안 야인으로서 생활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재기의 발판을 쌓다가, 약 30년 만인 2010년 주지사 직에 다시 당선되면서, 명예 회복에 성공한다.
2. 정치 경력
1969년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 이사회에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70년 말, 주 국무장관 직에 도전해 공화당 후보를 꺾고 선출됐다. 74년, 샌프란시스코 시장, 주 하원의장 등 민주당 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고, 레이건 주정부의 재정 정책에 대한 비판과 본인을 ”실용적 중도주의자“로 소개함으로서 공화당원 행정관을 상대로 약 3% 차이로 승리해 주지사로 당선됐다.브라운은 취임 연설에서 레이건 주지사의 재정 정책을 비판하면서, 세금 인상 없이 문제를 해결해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주지사 관련 예산을 7% 삭감하고, 2년 동안 배정된 저택이 아닌 월세 250$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며, 관용차도 저렴한 서민용 자동차를 이용했다. 그러던 76년, 브라운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돌연 출마하는데, 당시 선두주자이자 후일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의 후보 지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브라운은 카터가 너무 보수적이고, 외부인인 척하는 기득권 정치인이라고 공격하면서, 환경보호, 의원선수 제한 등의 정치 개혁, 균형재정 정책과 단일세율제도 도입을 내걸고 경선에 임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카터에게 기울었고, 반-카터 및 기타 지지층도 다른 후보들이 갈라먹었으며, 브라운은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름 선전해서 최종 2위로 마감하게 된다.
78년, 주지사직 재선에 나섰고 약 20%에 달하는 압도적 격차로 승리했으나, 부지사에 공화당원이 당선되는 흠이 있었다. 이 시기에 41세 여성 법조인을 주 대법원장에 임명하면서 논란이 일었었다.[4]
80년에 또다시 대선 경선에 출마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퇴했다. 82년에는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샌디에이고 시장 피트 윌슨에게 패배했다.[5] 동해 치러진 주지사 선거도 민주당 후보 톰 브래들리가 석패하면서[6], 브라운은 정계를 떠나 89년까지 야인 생활을 한다.
브라운의 첫 주지사로서의 8년은 복합적인 평가를 받았다. 환경 보호, 균형재정 추구, IT 및 재생에너지 사업 지원, 다양성 촉진 등 선구자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반대로 실효성 없는 정책을 남발하고, 지출을 과도하게 늘린 결과 빚만 남겼다면서 공상주의자(Moonbeam) 주지사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91년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의장으로 선출된 브라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92년 상원 출마를 위해 의장직을 사임하고 선거 운동에 나섰지만, 곧 그것도 그만두고 세 번째로 대선 출마를 위해 경선에 참가했는데, 공격적인 전략을 세워놓고 스스로 고꾸라지면서 결국 빌 클린턴에 패했다. 이후에는 지역 사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다가 98년 오클랜드 시장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이후 06년까지 시장직을 연임하면서 쌓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경력을 토대로 주 법무장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10년,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지사의 후임으로 당선되어 적자 재정을 물려받았으나, 14년 연임에 성공하고 19년 퇴임할 때에는 100억 달러가 넘는 흑자 재정과 56/30이라는 준수한 지지율을 기록하며 개빈 뉴섬 후임 민주당 주지사에게 바통을 넘기고 퇴임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0 | 미국 캘리포니아 국무장관 선거 | 캘리포니아 | | 3,234,788 (50.41%) | 당선 (1위) | 초선 |
1974 | 미국 주지사 선거 | 3,131,648 (50.11%) | ||||
1978 | 미국 주지사 선거 | 3,878,812 (56.05%) | 재선 | |||
198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494,968 (44.78%) | 낙선 (2위) | |||
1998 |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시장 선거 | 오클랜드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8,129 (58.93%) | 당선 (1위) | 초선 |
2002 |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시장 선거 | 42,892 (63.54%) | 재선 | |||
2006 | 미국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선거 | 캘리포니아 | | 4,756,184 (56.29%) | 초선 | |
2010 | 미국 주지사 선거 | 5,428,458 (53.77%) | 3선 | |||
2014 | 미국 주지사 선거 | 4,388,368 (59.97%) | 4선 |
4. 기타
- 브라운이 본인의 정치관을 설명할 때 “카누 이론”에 입각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한 방향으로만 노를 젓는다면 배가 전복되기에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본인의 말에 따르면 첫 주지사 재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1] 제32대 캘리포니아 주지사.[2]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수도회. 이곳에서 3년가량 수도생활을 하였다고 한다.[3] 1905.4.21~1996.2.16[4] 경험이 부족하다, 너무 좌익적이다, 소통력이 부족하다, 여성이다 등 여러 반대의견이 있었다. 결국 84년 같은 민주당원에게 밀려서 물러나게 됐다.[5] 패배 이유로는 브라운의 두 차례에 걸친 실패한 대선 출마 시도와 레이건 대통령의 인기, 애매했던 주정 지지율 (46/52) 등이 꼽힌다.[6] 여론 조사에서는 항상 선두를 달렸기에, 결과는 각계각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브래들리 효과라는 말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