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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2년 2월 14일 |
평안도 숙천도호부 (현 평안남도 숙천군) | |
사망 | 1962년 5월 28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
종교 | 개신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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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정재면은 1882년 2월 14일 평안도 숙천도호부(현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부친 정학전(鄭學篆)과 모친 김성약(金聖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병태(鄭秉泰)이고, 호는 벽거(碧居)·일광(一光)·우산(雨山)이다. 그의 부모는 한국 최초 개신교 그룹에 속한 개신교신자였으므로 정재면또한 부모의 뒤를 따라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1900년에 평남 순안측량학교에 입학하여[1] 2년을 수학한 후 1902년 상동교회에서 최병헌 목사와 전덕기 전도사를 만나 그들의 애국사상, 민족의식,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전덕기는 구원을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넘어 일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민족운동을 목회의 과제로 삼았던 개신교 민족주의자로 이런 영향은 정재면으로 이어진다.
1903년 상동교회 내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 남궁억, 현순, 전덕기 등에게 수학하며 개신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학문을 익혔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빼앗자, 상동교회의 전덕기, 정순만은 전국 각지 청년회 대표들과 함께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정재면은 김구[2], 이준[3], 조성환, 이동녕 등과 만나 교제했다.
2.2. 민족운동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된 전덕기가 1907년 4월 신민회 창건위원 7인에 참여하여 결성되자, 정재면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동청년학교를 졸업한 후 신민회의 파견으로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원으로 교육에 힘쓰다가 이동녕의 제안으로 제안으로 북간도 용정의 서전서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하여 용정에 도착했으나 이상설이 고종의 밀서를 받고 헤이그특사로 분교를 낸다는 이유로 떠나 오랜기간 돌아오지 않고, 헤이그특사의 실패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서전서숙은 이미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약연이 서전서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규암재서당을 명동서숙으로 바꾸고 정제면을 교무주임으로 초빙하였다. 정재면은 명동학교로 부임하면서 김약연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정재면이 제시한 조건을 명동촌 지도자들과 며칠을 두고 심사숙고한 끝에 받아들인 김약연은 1909년 5~6월경 명동촌에 명동교회를 세웠고 명동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정재면의 부임으로 명동학교의 교장은 김약연, 교감은 정재면, 재정은 문치정이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동학교는 '신(信)', '망(望)', '애(愛)'의 기독정신을 토대로 민족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었고, 1911년 3월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학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정신태, 이의순(이동휘의 차녀), 우봉순 등 여교원이 초빙되었고 여성을 위한 근대식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명동학교의 여학부는 한인의 중국 이주 역사에 첫 여성 교육터가 되었다. 또한 본래 개신교인이 아니었던 김약연은 정재면의 포교에 설복되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2년 김약연, 이동휘, 계봉우 등 북간도 교회대표 16명 명의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간도지역의 의료기관, 중등교육기관, 교회 설립과 전도사업 확장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2년에 제출하여 이에 따라 용정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그들의 활동에 감명받은 캐나다장로회는 명신여학교와 제창병원이 설립되도록 지원하였다. 특히 제창병원은 독립군의 피난처가 되었다.
정재면은 1913년 용정교회 장로로 장립된 후 주일학교와 학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15년 4월에 간도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에 소재한 모든 교회를 조직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1918년 11월 13일 김약연, 강봉우, 김영학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에 참여하여 12월 전 간도 한인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14년 간민회는 간도 왕청현 봉밀산지에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는데 사업을 추진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정재면은 서울로 압송되어 1년 옥종생활을 하다가 중국측의 항의와 노력으로 석방되어 다시 북간도로 돌아왔다.
1919년 2월 18일 국자가 하장리 박동원의 집에서 이성준 박경철 김영학 김순문 구춘선 이성호 백유정 최봉길 등과 함께 북간도 3.1 운동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25일 연해주에서 열린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 김약연, 이중집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파견되어 김약연과 함께 북간도의 한인들이 가진 민족독립의 강경한 의사를 발표하였으나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노령파의 분열된 싸움을 목격하고,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자신과 레닌을 추종하는 공산주의 진영의 독립운동가 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주장했으나 통일연합전선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정으로 돌아왔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북간도 전 교회를 조직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 만세 시위에 교회가 참여하도록 이끌었으며, 3월 15일~20일경 회장을 구춘선으로 하는 조선독립기성총회에 참여하였으며 [4]제1중부지방회 회장을 맡아 활동을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7월 정재면과 김약연은 상해에 가서 임정 조직에 참여하였고, 정재면, 계봉우는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북간도 대한간도국민회[5]의 이름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정재면은 국민회의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국민회군의 무장, 군자금 모집, 군관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았다.
1920년 1월 상해에서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모여 항일투쟁방법을 논의하는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가 개최되었는데, 정재면은 개신교계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5월 국민회는 명월구 동북지역 이정배(二井背)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정재면은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참변을 단행한 이후 항일운동이 어렵게 되자, 1925년 중국의 남경 금릉대학 신학부에서 2년간 신학을 공부한 후 평양신학교에서 1년간 더 공부한 뒤 192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3년 용정 캐나다선교부 소속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으며 남경금릉대학 신학부, 평양신학교, 은전중학교 교목으로 근무하며 교육활동, 전도활동, 한인사회 자치운동에 전념하며 민족운동을 이어갔으며 1930년부터는 함경북도 청진과 원산에서 종교 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2차 세계대전 말기 제국전쟁 수행에 종교계를 이용할 목적으로 1944년 12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朝鮮戰時宗敎報國會)'라는 어용 종교단체[6]를 결성하고 전쟁자금 조달 및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강요하자 민족주의 교회와 목사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일제는 민족주의 목사들을 유언비어 죄목으로 체포했는데, 정재면도 같이 체포되어 영흥경찰서에 구금, 이후 고흥경찰서로 옮겨 조사를 받고 미결수 신분으로서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면서 석방되었다.
2.3. 광복 후의 행적
광복 후, 정재면은 독립촉성개신교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나 협의회가 개인을 옹호하는 정파로 전락했다고 판단하고 탈퇴한 뒤 현실정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1947년 토마스목사기념전도사업회 편집부장으로 시무하다가 곧이어 해방 후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언론이었던 '개신교공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에 뛰어들었다. 한편 '북간도독립운동사'를 집필했으나 불행히 분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이후 송파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시무하다가 1962년 5월 2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재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