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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6 07:31:23

정대수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충정공(忠貞公)
정대수
丁大水
파일:daesoo.jpg
출생 1565년
사망 1599년 1월 18일 / (향년 34세)
전라도 여천 자택
(現 전라남도 여수시)
부모 부친 - 정호인(丁灝仁)[1], 1544~1580)
모친 - 광주 이씨
시호 충정(忠貞)
본관 창원 정씨
여숙(余淑)
용서(龍西)
자녀 정립[2], 정명, 정사[3]
경력 선전관
순초장(巡哨將)
당진현감(唐津縣監)
수군좌익장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추증
병조판서추증
붕당 서인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정대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에서 수군좌익장을 역임한 무신이며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2. 생애

10세 때 경전(經典)과 『사기』를 읽고 해석하므로 신동이라 일컬어졌다.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문과진출의 뜻을 포기하고,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이순신(李舜臣) 밑에서 순초장(巡哨將)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의 요청으로 당진현감(唐津縣監)을 특제하였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부임치 못하고 여수 자택으로 돌아와 치료 후, 1597년(선조 30) 수군좌익장으로 참전하였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그 이듬해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뜻을 따라, 순천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수륙(水陸)이 호응하여 왜교(倭橋)의 고니시(小西行長)를 협공하기로 약속하는 심부름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이순신의 어머니인 오계 변씨와 그의 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동거하며 보살펴 드렸다. 그 집이 여수시 자당 기거지(전라남도 지정문화재)이다.

이듬해 마지막 노량해전 때에는 이순신과 함께 출전하였다가 뒤늦게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알고 같이 죽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뒤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3. 기타

임진왜란 자체에서의 비중도 높고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이순신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이순신 3부작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는 언급조차도 잘 없다.

[1] 예산현감 역임, 사후 호조참판 증직[2] 임진왜란 참전, 사후 병조참판 증직[3] 가선대부 병조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