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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추존 제후 정간왕 | 靖簡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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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21년 8월 25일 | ||
고려 개경 연덕궁 (現 경기도 개성시) | |||
사망 | 1069년 11월 4일 (향년 48세) | ||
묘소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개성국공 | ||
1031년 3월 13일 ~ 1046년 이후 | |||
고려 평양공 | |||
1046년 이후 ~ 1069년 11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개성 왕씨 평양공파 | |
휘 | 기(基) | ||
부모 | 부왕 현종 모후 원혜왕후 | ||
형제자매 | 6남 8녀 중 5남 | ||
배우자 | 정간왕비(靖簡王妃)로 추정 | ||
자녀 | |||
종교 | 불교 | ||
봉호 | 개성국공(開城國公) → 평양공(平壤公) → 제왕(諸王) | ||
시호 | 정간왕(靖簡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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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 중기의 왕족. 조선국 양헌왕과 같이 사후 제후왕으로 추증되었다.휘는 기(基). 현종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에 버금가는 명군이었던 문종의 동복 동생이다. 또한 순종의 제1비 정의왕후(貞懿王后)의 아버지다.
2. 역임 관작
<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정간왕의 생전 역임 관작 | |
공신호 | 홍인숭효광덕공신(弘引崇孝光德功臣)[1031년] |
수직 | 수태위(守太尉)[1031년] 수태보(守太保) 수태사(守太師)[1049년] |
직위 | 상서령(尙書令)[1031년] 내사령(內史令)[1049년] 중서령(中書令) |
작위 | 개성국공(開城國公)[1031년] 평양공(平壤公) |
3. 생애
현종 때 받은 작위는 개성국공(開城國公). 문종 초에 평양공(平壤公)으로 바뀌었다.평양공이 사망한지 2년이 지난 1072년, 그를 옹립하려는 모의가 발각되어서 주모자들이 처벌받는 일이 벌어진다.[7]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지 2년 이상이 지나서 갑자기 들킨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장남 왕진(王璡)이 사망한 평양공을 대신하여 유배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나름 명망이 있었는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사후에 정간왕(靖簡王)으로 추증되었다. 추증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문종 때 추증되었다는 설과 순종 때 추증했다는 설이 있다.
4. 가족관계
아내의 이름은 사서에 나오지 않지만, 정간왕 즉위 음모인 거신의 난에 휘말려 곡주(谷州)로 유배된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가 정간왕의 아내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에 장녕궁주라는 이름은 이 대목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며, 수안택주라는 호를 가진 사람으로 선종의 딸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더불어 수안현(遂安縣)은 곡주군(谷州郡)의 속현이기도 하다.태위(太尉)의 직위에 있었던 장남 왕진(王璡)은 거신의 난으로 인해 유배를 간 후 사망했으며, 사공의 직위에 있었던 차남 왕거(王琚)는 거신의 난 이전에 요절했다고 한다. 그의 세 아들 중 후손을 둔 것은 어린 나이로 사면을 받은 막내아들 낙랑공 왕영 뿐이다. 왕영은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차녀 보령궁주(保寧宮主) 왕씨[8]와 혼인해 아들 2명을 뒀다. 딸인 정의왕후(貞懿王后) 왕씨는 순종과 혼인하였다.
5. 후손
개성 왕씨의 한 분파인 평양공파는 정간왕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직간접을 불문하고 사료에 많이 등장하며, 《고려사》 열전 종실편을 보면 다른 항목에 비해 거의 20배 가량 많다.삼별초에게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왕온(王溫)은 그의 7대손이며, 고종~원종 때에 등장하는 영녕공 왕준(王綧)[9]은 승화후의 동생이다.
또한 충선왕에 의해 대리통치를 하게 되는 제안대군, 희종의 왕비 성평왕후 임씨, 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 유씨,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慶昌宮主) 유씨,[10] 공민왕의 제3비 익비(益妃) 한씨[11]도 그의 후손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정간왕의 후손들은 모두 왕영의 후손들이며, 왕영부터 그의 8세손인 왕숙까지 무려 8연속으로 국왕의 부마가 되는 영예를 누린다. 이 때문에 정간왕의 후손은 부계 직계와는 상관없이 외가, 진외가, 외외가 등으로 왕통 직계와 실질적으로 매우 가까운 촌수 관계를 유지했다.
[1031년] 弘引崇孝光德功臣守太尉兼尙書令開城國公[1031년] [1049년] 守太師兼內史令[1031년] [1049년] [1031년] [7] 이 사건을 거신의 난이라고 하며 만약 실행되었다면 실패한 조선시대 계유정난이 되었을 것이다.[8] 순종, 선종, 숙종, 의천과 동복 남매. 보령궁주의 출생 기록이 없어 이 4명과의 서열순은 알 수 없다.[9] 왕준이 포로로 몽골에 끌려간 이후 왕준 일가는 13세기 초 홍다구 일가와 함께 요동을 관할하며 요동의 고려인들을 관리하였고, 홍씨 일가와 함께 요동행성의 고위관직을 맡았다.[10] 세 사람 다 남편과 성씨가 겹치는 걸 피하려고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썼다.[11] 익비는 공민왕과 혼인한 후 한씨 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