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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1:34:07

절강포정사

명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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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하위 행정구역
3.1. 항주부(杭州府)3.2. 엄주부(嚴州府)3.3. 가흥부(嘉興府)3.4. 호주부(湖州府)
3.4.1. 안길주(安吉州)
3.5. 소흥부(紹興府)3.6. 영파부(寧波府)3.7. 태주부(台州府)3.8. 금화부(金華府)3.9. 구주부(衢州府)3.10. 처주부(處州府)3.11. 온주부(溫州府)

1. 개요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 줄여서 절강포정사 또는 절강성은 명나라의 행정구역이다.

2. 역사

에서 강남동도(江南東道)에 속했던 지역이다. 당 멸망 후 오대십국시대에는 오월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월 멸망 후 송나라양절로(兩浙路)를 설치했다. 정강의 변 이후 양절로는 양절동로(兩浙東路)와 양절서로(兩浙西路)로 나뉘었으며 송나라가 멸망한 뒤 원나라는 강절등처행중서성(江浙等處行中書省), 줄여서 강절행성을 설치하고 치소를 항주로(杭州路)에 두었다.

용봉(龍鳳) 4년(1358년) 강절행성에 근거했던 한림아가 중서분성(中書分省)을 설치하고 치소를 영월부(寧越府)에 두었다. 용봉(龍鳳) 9년(1363년) 중서분성의 치소를 엄주부(治嚴州府)로 옮겼다. 용봉(龍鳳) 12년(1366년) 중서분성을 폐지하고 절강등처행중서성(浙江等處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치소를 항주부(杭州府)에 두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뒤인 홍무(洪武) 3년(1370년) 항주도위(杭州都衛)를 설치했다. 홍무(洪武) 8년(1375년) 도위를 절강도지휘사사(浙江都指揮使司)로 고쳤고 홍무(洪武) 9년(1376년) 행중서성을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로 고쳤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당시 2,138,225호, 10,487,567명이 살았다. 홍치(弘治) 4년(1491년) 당시 1,503,124호, 5,305,843명이 살았다. 만력(萬曆) 6년(1578년) 당시 1,542,408호, 5,153,005명이 살았다.

3. 하위 행정구역

3.1. 항주부(杭州府)

589년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항주(杭州)가 설치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항주는 여항군(餘杭郡)이 되었다가 당나라가 들어선 뒤 다시 항주가 되었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742년) 다시 여항군으로 돌아왔다가 숙종 건원(乾元) 원년(758년)부터 항주 지명이 정착되었다. 오대십국시대 오월의 중심지였으며 오월 멸망 후 송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정강의 변 이후 임안부(臨安府)로 승격되어 송나라의 임시수도로 기능했다. 몽골 제국이 송나라를 멸한 뒤 항주로(杭州路)가 되어 강절행성에 속했다. 강절행성에 할거했던 한림아가 용봉(龍鳳) 12년(1366년) 항주로를 부(府)로 고쳤다.

3.2. 엄주부(嚴州府)

3.3. 가흥부(嘉興府)

3.4. 호주부(湖州府)

3.4.1. 안길주(安吉州)

3.5. 소흥부(紹興府)

남북조시대까지 회계군(會稽郡)으로 불렸다. 589년 수나라의 남북조 통일 이후 오주(吳州), 월주(越州)로 불렸으며 양제가 즉위한 뒤 회계군이 되었다가 당나라가 들어선 뒤 다시 월주가 되었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742년) 다시 회계군으로 돌아왔다가 숙종 건원(乾元) 원년(758년)부터 월주 지명이 완전히 정착했다. 오대십국시대 오월 때 월주 혹은 회계부(會稽府)로 불렸다가 오월이 멸망한 뒤 송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정강의 변 이후 소흥부(紹興府)로 승격되었으며, 몽골 제국이 송나라를 멸한 뒤 소흥로(紹興路)가 되어 강절행성에 속했다. 강절행성에 할거했던 한림아에 의해 용봉(龍鳳) 12년(1366년) 소흥로는 다시 소흥부가 되었다.

3.6. 영파부(寧波府)

738년 명주(明州)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으며, 742년부터 758년까지 여요군(餘姚郡)이었다가 758년부터 1195년까지 명주로 불렸던 지역이다. 남송 대인 1195년 경원부(慶元府)로 승격되어 1276년까지 이어졌으며, 원나라 대에 경원로(慶元路)가 되었다. 1367년 경원로는 다시 명주부(明州府)가 되었으며, 명나라가 들어선 뒤인 홍무(洪武) 14년(1381년) 국명을 피하기 위해 영파부로 개칭되었다.

3.7. 태주부(台州府)

3.8. 금화부(金華府)

남북조시대까지 동양군(東陽郡)으로 불렸으며, 589년 수나라의 남북조 통일 이후 무주(婺州)로 불렸고 양제가 즉위한 뒤 동양군이 되었다가 당나라가 들어선 뒤 다시 무주가 되었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742년) 다시 동양군으로 돌아왔다가 숙종 건원(乾元) 원년(758년)부터 무주 지명이 완전히 정착했다. 원나라 대에 무주로(婺州路)가 되었다. 1358년 무주로는 영월부(寧越府)로 개칭되었다가 1360년 금화부로 개칭되었다.

3.9. 구주부(衢州府)

3.10. 처주부(處州府)

3.11. 온주부(溫州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