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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1:15:53

강남도(당)


당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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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10도 (627년 ~ 733년)
관내도 하남도 하동도 하북도 농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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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15도(733년 ~ 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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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하위 행정구역
2.1. 강남동도(江南東道)
2.1.1. 윤주(潤州)2.1.2. 승주(昇州)2.1.3. 상주(常州)2.1.4. 소주(蘇州)2.1.5. 호주(湖州)2.1.6. 항주(杭州)2.1.7. 월주(越州)2.1.8. 명주(明州)2.1.9. 태주(台州)2.1.10. 무주(婺州)2.1.11. 구주(衢州)2.1.12. 목주(睦州)2.1.13. 흡주(歙州)2.1.14. 처주(處州)2.1.15. 온주(溫州)2.1.16. 복주(福州)2.1.17. 천주(泉州)2.1.18. 건주(建州)2.1.19. 정주(汀州)2.1.20. 장주(漳州)
2.2. 강남서도(江南西道)
2.2.1. 선주(宣州)2.2.2. 지주(池州)2.2.3. 요주(饒州)2.2.4. 신주(信州)2.2.5. 홍주(洪州)2.2.6. 건주(虔州)2.2.7. 무주(撫州)2.2.8. 길주(吉州)2.2.9. 강주(江州)2.2.10. 원주(袁州)2.2.11. 악주(鄂州)2.2.12. 악주(岳州)2.2.13. 담주(潭州)2.2.14. 형주(衡州)2.2.15. 예주(澧州)2.2.16. 낭주(朗州)2.2.17. 영주(永州)2.2.18. 도주(道州)2.2.19. 침주(郴州)2.2.20. 소주(邵州)2.2.21. 연주(連州)
2.3. 검중도(黔中道)
2.3.1. 검주(黔州)2.3.2. 진주(辰州)2.3.3. 금주(錦州)2.3.4. 시주(施州)2.3.5. 서주(敍州)2.3.6. 장주(奬州)2.3.7. 이주(夷州)2.3.8. 파주(播州)2.3.9. 사주(思州)2.3.10. 비주(費州)2.3.11. 남주(南州)2.3.12. 계주(溪州)2.3.13. 진주(溱州)2.3.14. 진주(珍州)

1. 개요

강남도(江南道)는 당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道) 중 하나이다. 여기 적힌 정보들은 《구당서》 40권 지리지3과 《신당서》 41권 지리지5의 정보를 기준으로 하며 강남도를 분할한 강남동도, 강남서도, 검남도를 함께 서술한다.

2. 하위 행정구역

2.1. 강남동도(江南東道)

강남동도는 오늘날 장쑤성 쑤난 지역, 상하이시, 저장성, 푸젠성, 안후이성 황산시를 관할했다.

2.1.1. 윤주(潤州)

남북조시대까지 단양군(丹陽郡)에 속했던 곳이다. 589년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단양군은 폐지되어 장주(蔣州)로 개편되었다. 595년 수나라는 장주의 일부를 분할하여 윤주를 설치했다. 양제의 즉위 후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다시 실시하면서 윤주는 폐지되었다.

무덕(武德) 3년(620년) 두복위의 귀순 이후 당나라는 강도군(江都郡) 연릉현(延陵縣)에 다시 윤주를 설치하고 연릉현을 단도현(丹徒縣)으로 개칭했다. 또한 구용현(句容縣)과 연릉현에 모주(茅州)를 설치했다. 보공석의 반란으로 잠시 점령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보공석을 토벌한 뒤 다시 윤주가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9년(626년) 연릉현, 구용현, 백하현(白下縣)을 윤주 관할로 두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단양군(丹陽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윤주(潤州)가 되었다. 또한 상원현과 구용현은 지덕(至德) 2재(757년) 강녕군(江寧郡)이 설치되었다가 상원(上元) 2년(761년) 윤주 관할이 되었고 광계(光啓) 3년(887년) 이후로 승주(昇州)가 다시 설치되면서 승주의 현이 되었다.

2.1.2. 승주(昇州)

남북조시대까지 단양군(丹陽郡)으로 불렸던 곳이며 육조시대 남조 역대 국가들의 수도였던 곳이다. 589년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단양군은 폐지되어 장주(蔣州)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장주는 다시 단양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두복위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3년(620년) 두복위가 당나라에 귀순하면서 단양군은 윤주(潤州)로 재편되었다. 이후 지덕(至德) 2재(757년) 강녕군(江寧郡)이 설치되었다. 다음 해에 주현제로 복귀하면서 강녕군은 승주로 개편되어 존속했다가 상원(上元) 2년(761년) 폐지되어 윤주에 통폐합되었다. 광계(光啓) 3년(887년) 승주가 다시 설치되었다.

2.1.3. 상주(常州)

후한 시기 오군(吳郡) 무석현(無錫縣)에 설치된 서부도위(西部都尉)가 시초로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나라가 비릉전농교위(毗陵典農校尉)로 전환했다. 서진은 오나라를 멸한 뒤인 281년 이곳에 비릉군(毗陵郡)을 설치했으며 311년 동해왕 사마월의 아들 사마비의 이름을 피휘해서 명칭을 진릉군(晉陵郡)으로 고치면서 남진이 멸망할 때까지 진릉군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다. 수나라 때 진릉군을 폐지하고 그 지역을 상주로 개편했다가 대업(大業) 3년(607년) 다시 비릉군으로 개편했다.

수나라 말엽 두복위가 이곳에 할거했다가 620년 당나라에게 평정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상주로 돌아왔다. 무덕(武德) 6년(623년) 보공석에게 함락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되찾았으며 의흥현(義興縣)에 남흥주(南興州)를 설치했다. 무덕(武德) 8년(625년) 남흥주가 폐지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당나라가 다시 군현제를 시행하면서 상주는 진릉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상주로 돌아왔다.

2.1.4. 소주(蘇州)

후한 순제 영건(永建) 4년(129년) 오군(吳郡)이 회계군에서 분할되어 설치되었고 위진남북조시대까지 이 명칭이 이어졌다. 양나라 태청(太淸) 3년(549년) 오군에 오주(吳州)가 설치되었다가 이듬해에 폐지되어 군으로 돌아갔다. 남진 말엽인 정명(禎明) 원년(587년) 오주가 다시 설치되었다가 정명(禎明) 3년(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하면서 오군은 폐지되고 소주(蘇州)로 개편되었다.

소주는 양제가 즉위한 뒤 오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오군(吳郡)이 되었다. 수나라 말엽 이자통에게 함락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이자통을 평정한 뒤 다시 소주를 설치했다. 무덕(武德) 6년(623년) 다시 보공석에게 함락되었다가 이듬해에 보공석을 평정한 뒤 소주에 도독을 설치했다. 무덕(武德) 9년(626년) 도독을 폐지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당나라가 다시 군현제를 시행하면서 소주는 오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소주로 돌아왔다.

2.1.5. 호주(湖州)

삼국시대로 따지면 보정(寶鼎) 원년(266년) 설치된 오흥군(吳興郡) 일대로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오흥군은 폐지되어 산하 현들이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로 관할이 옮겨졌다. 이후 인수(仁壽) 연간에 호주가 설치되었다가 대업(大業) 연간에 폐지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이자통을 평정한 뒤 오정현(烏程縣)에 호주를 설치했다. 호주는 무덕(武德) 6년(623년) 다시 보공석에게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보공석을 평정하면서 다시 설치되었으며, 무주(武州)를 폐지하고 무강현(武康縣)을 관할로 두었다. 또한 치주(雉州)를 폐지하고 장성현(長城縣)을 관할로 두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오흥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호주가 되었다.

2.1.6. 항주(杭州)

삼국시대 양주(揚州)에 속했던 지역으로 남북조시대 말기에는 전당군(錢唐郡)이었다. 589년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주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면서 '항주'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항주는 여항군(餘杭郡)이 되었다.

항주는 이자통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이자통을 토벌하면서 수복되었고 무덕(武德) 6년(623년) 보공석에게 점령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수복되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잠주를 설치했다가 이듬해 폐지하면서 어잠현이 항주의 현이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여항군이 되었지만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항주가 되었다.

2.1.7. 월주(越州)

대에 설치된 회계군(會稽郡)으로 남북조시대 유송대에 동양주(東揚州)가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적이 있다. 이후 양나라 대에 동양주가 다시 설치와 폐지와 재설치를 반복했으며 남진 대에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한 뒤 회계군은 폐지되어 오주(吳州)가 되었다. 대업(大業) 원년(605년) 월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시행하면서 다시 회계군이 되었다.

월주는 수나라 말 이자통에 의해 함락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이자통을 정벌하면서 월주와 더불어 총관부가 설치되었다. 월주 총관부는 월주, 승주(嵊州), 요주(姚州), 은주(鄞州), 절주(浙州), 강주(綱州), 구주(衢州), 곡주(穀州), 여주(麗州), 엄주(嚴州), 무주(婺州)를 관할했으며, 월주는 당시 회계현(會稽縣), 제기현(諸暨縣), 산음현(山陰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총관부를 도독부로 개편하면서 월주 도독부는 월주, 무주, 은주, 승주, 여주를 관할했으며, 월주는 당시 회계현, 제기현, 산음현(山陰縣), 여요현(餘姚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8년(624년) 은주(鄞州)를 무현(鄮縣)으로 격하하고 승주(嵊州)를 담현으로 격하한 뒤 월주에 통폐합했다. 여주(麗州)는 영강현(永康縣)이 되어 무주의 현이 되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당시 월주 도독부는 월주, 무주, 천주(泉州), 건주(建州), 태주(台州), 괄주(括州)를 관할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회계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월주가 되어 지명이 완전히 정착했다.

2.1.8. 명주(明州)

개원(開元) 26년(738년) 월주(越州) 무현(鄮縣)에 명주를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여요군(餘姚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명주로 돌아왔다. 또한 명주를 설치할 때 옹산현(翁山縣)을 설치했다가 대력(大曆) 6년(771년) 폐지했다.

2.1.9. 태주(台州)

회계군 소속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가 태주의 전신으로 257년 임해군(臨海郡)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동진 대에 임해군의 일부가 분할되어 영가군으로 설치되었다.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임해군과 영가군은 폐지되어 처주(處州)가 되었다가 대업(大業) 3년(607년) 영가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이자통에게 함락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이자통을 평정한 뒤 해주(海州)를 설치했으며 이듬해에 태주로 고쳤다. 태주는 다음 해에 보공석에게 점령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보공석을 평정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임해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태주로 고치면서 지명이 완전히 정착했다.

2.1.10. 무주(婺州)

무주의 전신은 동양군(東陽郡)으로 회계군 소속 서부도위부(西部都尉府)가 삼국시대 오나라 대에 266년 군으로 승격된 것이다. 이후 556년 진주(縉州)가 설치되어 562년까지 존속했고 금화군(金華郡)이 설치되었다. 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한 뒤 군이 폐지되어 무주가 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무주는 607년 다시 동양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엽 이자통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이자통을 평정한 뒤 다시 무주가 설치되었고 화천현(華川縣)과 장산현(長山縣)을 관할했다. 또한 같은 해에 강주(綱州), 여주(麗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강주가 폐지되면서 의오현(義烏縣)이 무주의 현이 되었고, 여주는 무덕(武德) 8년(625년)에 폐지되어 영강현(永康縣)이 무주의 현이 되었다. 정관(貞觀) 8년(634년) 용구현(龍丘縣)을 설치했다. 함형(咸亨) 5년(674년) 난계현(蘭溪縣)과 상산현(常山縣)을 설치했다. 수공(垂拱) 2년(686년) 용구현, 신안현, 상산현을 분할하여 구주(衢州)를 설치하고 무주 내에 동양현(東陽縣)을 신설했다. 천수(天授) 2년(691년) 무의현(武義縣)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무주는 동양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무주가 되었다.

2.1.11. 구주(衢州)

무덕(武德) 4년(621년) 이자통을 평정한 뒤 무주(婺州) 신안현(信安縣)에 구주를 설치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보공석의 난 이후로 한동안 무주에 속했다가 수공(垂拱) 2년(686년) 무주 신안현과 용구현(龍丘縣), 상산현(常山縣)을 분할하여 다시 구주를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신안군(信安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구주가 되었다.

2.1.12. 목주(睦州)

수나라 대인 인수(仁壽) 3년(603년) 설치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목주는 수안군(遂安郡)이 되었다.

수안군은 수나라 말 왕화(汪華)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왕화를 평정하면서 다시 목주가 되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엄주(嚴州) 동려현(桐廬縣)을 통폐합했고 동목주(東睦州)로 개칭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목주가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신정군(新定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리면서 다시 목주가 되었다.

2.1.13. 흡주(歙州)[62]

후한 대인 건안(建安) 13년(208년) 손권이 단양군(丹陽郡)의 일부를 분할하여 신도군(新都郡)을 설치했으며 서진 대인 태강(太康) 원년(280년) 신안군(新安郡)으로 개칭되어 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신안군이 폐지되어 흡주가 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흡주는 다시 신안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신안군은 왕화(汪華)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왕화를 평정하면서 다시 흡주가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신안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리면서 다시 흡주가 되었다.

2.1.14. 처주(處州)

수나라는 남진을 멸한 뒤 영가군(永嘉郡)을 폐지하고 처주(處州)를 설치했다가 뒤에 괄주(括州)로 고쳤다. 양제가 즉위한 뒤 괄주는 다시 영가군이 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이자통을 평정한 뒤 당나라는 괄주(括州)를 설치하고 총관부(總管府)를 두어 송주(松州), 가주(嘉州), 태주(台州)를 관할로 두었다. 당시 괄주는 괄창현(括蒼縣)과 여수현(麗水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총관부를 도독부(都督府)로 개편했다. 무덕(武德) 8년(625년) 송주(松州)를 폐지하고 송양현(松陽縣)을 처주의 현으로 두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도독부(都督府)를 폐지했다. 또한 동가주(東嘉州)를 폐지하고 영가현(永嘉縣)과 안고현(安固縣)을 처주의 현으로 두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진운군(縉雲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괄주(括州)가 되었다. 대력(大曆) 14년(779년) 막 즉위한 덕종 이괄의 피휘를 위해 수나라 대의 처주로 다시 개칭되었다.

2.1.15. 온주(溫州)

무덕(武德) 5년(622년) 동가주(東嘉州)가 설치되어 영가현(永嘉縣), 영령현(永寧縣), 안고현(安固縣), 악성현(樂成縣), 횡양현(橫陽縣)을 관할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동가주가 폐지되어 동가주의 현들은 처주의 현이 되었다가 상원(上元) 2년(675년) 괄주 영가현과 안고현이 분할되어 온주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영가군(永嘉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온주가 되었다.

2.1.16. 복주(福州)

남진 대에 민주(閩州)가 설치되었다가 진보응의 반란 이후로 폐지되었다. 이후 풍주(豊州)가 신설되었으며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천주(泉州)로 개칭되었다. 양제의 즉위 후 천주는 민주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건안군(建安郡)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 대인 무덕(武德) 6년(623년) 건안군 민현(閩縣)에 천주(泉州)가 설치되었다. 경운(景雲) 2년(711년) 민주(閩州)로 개칭되어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되었다. 개원(開元) 13년(725년) 복주(福州)로 개칭되었고 경략사(經略使)를 추가로 두었다. 복주는 본래 영남도에 속했다가 천보(天寶) 원년(742년) 강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장락군(長樂郡)이 되었으며,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복주가 되었다.

2.1.17. 천주(泉州)

오나라 대에 설치된 건안군(建安郡)이 전신으로 서진 대에 진안군(晉安郡)으로 개칭되었으며, 남진 대인 564년 남안군(南安郡)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하면서 천주(泉州)가 되었다. 양제의 즉위 이후 민주(閩州)로 개칭되었다가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건안군(建安郡)이 되었다.

성력(聖曆) 2년(699년) 천주 남안현(南安縣), 포전현(莆田縣), 용계현(龍溪縣)을 분할하여 무영주(武榮州)를 설치했다가 이듬해 폐지했다. 구시(久視) 원년(700년) 무영주를 다시 설치했고 경운(景雲) 2년(711년) 무영주가 천주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천주는 청원군(淸源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천주가 되었다.

2.1.18. 건주(建州)

오나라 대에 설치된 건안군(建安郡)이 전신으로 서진 대에 진안군(晉安郡)으로 개칭되었으며, 남진 대인 564년 남안군(南安郡)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하면서 천주(泉州)가 되었다. 양제의 즉위 이후 민주(閩州)로 개칭되었다가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건안군(建安郡)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건안군에 건주(建州)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건주는 다시 건안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건주가 되었다.

2.1.19. 정주(汀州)

개원(開元) 24년(736년) 복주(福州)와 무주(撫州)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임정군(臨汀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정주로 개편되었다.

2.1.20. 장주(漳州)

수공(垂拱) 2년(686년) 영남도에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장포군(漳浦郡)으로 개편되었고 강남동도 관할로 변경되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장주(漳州)가 되었다.

2.2. 강남서도(江南西道)

2.2.1. 선주(宣州)

서진 대인 281년부터 남북조시대까지 선성군(宣城郡)으로 불린 곳이다. 수나라가 589년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뒤 전국에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선성군은 폐지되어 선주로 대체되었다. 양제의 즉위 후인 대업(大業) 3년(607년) 전국에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선주는 선성군으로 대체되었다.

수나라 말 선주는 두복위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3년(620년) 두복위가 당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다시 실시하면서 선성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선주가 되었다.

2.2.2. 지주(池州)

무덕(武德) 4년(621년) 선주(宣州) 추포현(秋浦縣)과 남릉현(南陵縣)을 분할하여 설치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선주에 통폐합되었다가 영태(永泰) 원년(763년) 강서관찰사(江西觀察使) 이면(李勉)의 주청으로 지주를 다시 설치하고 청양현(靑陽縣)과 지덕현(至德縣)을 관할로 두었으며 석체현(石埭縣)을 신설했다.

2.2.3. 요주(饒州)

208년 손권에 의해 설치된 팽택군(彭澤郡)이 시초로 210년 파양군(鄱陽郡)으로 개칭되어 이 지명이 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 589년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파양군은 요주(饒州)로 대체되었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요주는 파양군으로 개편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강좌(江左)를 평정한 뒤 다시 요주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요주는 다시 파양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요주가 되었다.

2.2.4. 신주(信州)

건원(乾元) 원년(758년) 파양군(鄱陽郡)을 요주(饒州)로 고친 뒤 요주 익양현(弋陽縣)과 더불어 구주(衢州) 상산현(常山縣)과 옥산현(玉山縣), 건주(建州)와 무주(撫州)의 일부 지역을 분할하여 설치했다.

2.2.5. 홍주(洪州)

남북조시대까지 예장군(豫章郡)으로 불린 지역으로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뒤 홍주가 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다시 예장군이 되었다.

예장군은 수나라 말 임사홍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5년(622년) 당나라가 임사홍을 평정한 뒤 다시 홍주가 되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손주(孫州), 남창주, 미주(米州)가 폐지되어 남창현(南昌縣), 건창현(建昌縣), 고안현(高安縣)이 홍주의 현이 되었으며 종릉현과 남창현이 예장현으로 통폐합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홍주는 다시 예장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홍주가 되었다.

2.2.6. 건주(虔州)

오나라 대에 설치된 여릉군 남부도위부(南部都尉府)가 서진 대인 태강(太康) 3년(282년) 남강군(南康郡)으로 승격되어 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이후 남강군은 폐지되어 건주가 되었으며,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남강군이 되었다.

건화군은 무덕(武德) 5년(622년) 당나라가 강좌(江左)를 평정한 뒤 다시 건주가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남강군으로 개편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건주로 되돌렸다.

2.2.7. 무주(撫州)

오나라 대에 설치된 임천군(臨川郡)이 전신으로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무주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무주는 다시 임천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임사홍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5년(622년) 당나라가 임사홍을 평정한 뒤 다시 무주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임천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무주가 되었다.

2.2.8. 길주(吉州)

남북조시대까지 여릉군(廬陵郡)으로 불렸던 지역으로 개황(開皇) 9년(589년)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길주가 되었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다시 실시하면서 길주는 여릉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길주는 임사홍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5년(622년) 임사홍을 평정한 뒤 다시 길주가 설치되어 여릉현(廬陵縣)과 신감현(新淦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영주(潁州)가 폐지되어 안복현(安福縣)을 길주의 현으로 두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남평주(南平州)를 폐지하면서 태화현(太和縣)을 길주의 현으로 두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여릉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길주가 되었다.

2.2.9. 강주(江州)

2.2.10. 원주(袁州)

오나라 대인 267년에 설치된 안성군(安成郡)이 전신으로 이 지명은 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수나라는 개황(開皇) 9년(589년) 남진을 멸한 뒤 안성군을 폐지하고 그 지역을 원주로 개편했으며, 양제가 즉위한 이후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원주를 의춘군(宜春郡)으로 개편했다.

수나라 말 의춘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한 뒤 다시 원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원주는 의춘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원주가 되었다.

2.2.11. 악주(鄂州)

전한 대인 기원전 121년 이전까지 형산군(衡山郡), 그 이후로 남북조시대까지 강하군(江夏郡)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유송 효건(孝建) 원년(454년) 강하군에 영주(郢州)가 설치되어 남북조시대가 종결되는 589년까지 이어졌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강하군은 악주로 대체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다시 강하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강하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한 뒤 다시 악주가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강하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악주가 되었다.

2.2.12. 악주(岳州)

유송 원가(元嘉) 16년(439년) 설치된 파릉군(巴陵郡)이 시초로 양나라 때 파주(巴州)가 설치되었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이후 파릉군과 파주가 폐지되어 악주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악주는 파릉군으로 개편되었다.

수나라 말 파릉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토벌한 뒤 파주(巴州)가 되었다. 무덕(武德) 6년(623년) 악주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파릉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악주가 되었다.

2.2.13. 담주(潭州)

삼국시대로 따지면 장사군(長沙郡)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진나라 대인 영가(永嘉) 원년(307년) 장사군을 중심으로 상주(湘州)가 설치되었다가 함화(咸和) 3년(328년) 폐지되었다. 상주는 이후 의희(義熙) 8년(412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의희(義熙) 11년(416년) 폐지되고, 유송 영초(永初) 3년(422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원가(元嘉) 8년(431년) 폐지되고, 원가(元嘉) 16년(439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원가(元嘉) 29년(452년) 폐지될 때까지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다가 효건(孝建) 원년(454년) 다시 설치되어 남북조시대가 종결되는 589년까지 이어졌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이후 장사군과 상주는 폐지되어 담주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담주는 장사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장사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한 뒤 다시 담주가 되었다. 당시 장사현(長沙縣), 형산현(衡山縣), 예릉현(醴陵縣), 상향현(湘鄕縣), 익양현(益陽縣), 신강현(新康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신강현을 폐지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담주는 장사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복귀하면서 다시 담주가 되었다.

2.2.14. 형주(衡州)

형주의 전신은 장사군 서부도위부(西部都尉府)로 오나라 대인 257년 형양군(衡陽郡)으로 승격되어 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 이후 개황(開皇) 9년(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한 뒤 형양군은 폐지되어 형주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형주는 형산군(衡山郡)으로 개편되었다.

수나라 말 형산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하면서 다시 형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형양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형주가 되었다.

2.2.15. 예주(澧州)

오나라 대인 영안(永安) 6년(263년) 무릉군(武陵郡)의 일부 지역이 분할되어 천문군(天門郡)으로 설치되었다. 수나라는 개황(開皇) 9년(589년) 남진을 멸한 뒤 천문군을 폐지하고 그곳을 송주(松州)로 개편했다가 머지않아 명칭을 예주로 바꿨다. 양제의 즉위 후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다시 실시하면서 예주는 예양군(澧陽郡)으로 개편되었다.

수나라 말 예양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하면서 다시 예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예양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예주가 되었다.

2.2.16. 낭주(朗州)

남북조시대까지 무릉군(武陵郡)으로 불렸던 곳이다. 양나라 말 무주(武州)가 설치되었고 이후 원주(沅州)로 개칭되어 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수나라는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뒤 원주와 무릉군을 폐지하고 이곳을 낭주로 개편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낭주는 무릉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정벌하면서 다시 낭주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무릉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낭주가 되었다.

2.2.17. 영주(永州)

영릉군(零陵郡)으로 불렸던 곳으로 신나라 때 잠시 구의군(九疑郡)으로 불렸지만 남북조시대까지 영릉군이라는 명칭이 계속 이어졌다.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뒤 영릉군이 폐지되고 영주가 설치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영주는 다시 영릉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영릉군은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정벌하면서 다시 영주가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영릉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영주가 되었다.

2.2.18. 도주(道州)

도주의 전신은 영양군(營陽郡)으로 남북조시대 중기까지 이 명칭이 이어졌다가 영양군(永陽郡)으로 개칭되어 589년까지 이어졌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영양군은 폐지되어 영주(永州)에 통폐합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소선을 평정한 뒤 영주(營州)가 설치되었고 다음 해에 남영주(南營州)로 개칭되었다. 정관(貞觀) 8년(634년) 도주(道州)로 개칭되었고 정관(貞觀) 17년(643년) 영주에 통폐합되었다가 상원(上元) 2년(675년)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강화군(江華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도주가 되었다.

2.2.19. 침주(郴州)

신나라 대에 남평군(南平郡)으로 잠시 불린 것을 제외하면 남북조시대까지 계양군(桂陽郡)으로 불렸던 곳이다. 개황(開皇) 9년(589년)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계양군은 폐지되어 침주로 개편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인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계양군이 되었다.

수나라 말 소선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소선을 평정하면서 다시 침주가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계양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침주가 되었다.

2.2.20. 소주(邵州)

무덕(武德) 4년(621년) 소선을 평정한 뒤 남양주(南梁州)가 설치되어 소릉현(邵陵縣), 건흥현(建興縣), 무강현(武岡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건흥현을 무강현에 통폐합하고 소릉현을 소양현(邵陽縣)에 통폐합했다. 정관(貞觀) 10년(636년) 소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소양군(邵陽郡)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소주가 되었다.

2.2.21. 연주(連州)

2.3. 검중도(黔中道)

2.3.1. 검주(黔州)

2.3.2. 진주(辰州)

2.3.3. 금주(錦州)

수공(垂拱) 2년(686년) 진주(辰州) 마양현(麻陽縣)에 금주(錦州)와 4개의 현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노양군(盧陽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금주가 되었다.

2.3.4. 시주(施州)

2.3.5. 서주(敍州)

무주(巫州)는 정관(貞觀) 8년(634년) 진주(辰州) 용표현(龍標縣)이 분할되면서 설치된 주였다. 같은 해에 야랑현(夜郞縣), 낭계현(朗溪縣), 사정현(思征縣)이 설치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정현이 폐지되었다. 천수(天授) 2년(691년) 명칭이 원주(沅州)로 변경되었고 야랑현의 일부를 분할해서 위계현(渭溪縣)을 설치했다. 장안(長安) 3년(703년) 야랑현과 위계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무주(舞州)를 설치했다. 선천(先天) 2년(713년) 담양현(潭陽縣)을 설치했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원(沅)과 원(原)의 발음이 비슷해서 명칭을 무주(巫州)로 고쳤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담양군(潭陽郡)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무주(巫州)가 되었다. 대력(大曆) 5년(770년) 명칭이 서주(敍州)로 변경되었다.

2.3.6. 장주(奬州)

장안(長安) 4년(704년) 원주(沅州)의 두 현을 분할하여 무주(舞州)를 설치했다. 개원(開元) 13년(725년) 명칭이 학주(鶴州)로 변경되었고 개원(開元) 20년(732년) 다시 업주(業州)로 변경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용표군(龍標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업주가 되었으며 대력(大曆) 5년(770년) 장주(奬州)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3.7. 이주(夷州)

2.3.8. 파주(播州)

2.3.9. 사주(思州)

2.3.10. 비주(費州)

2.3.11. 남주(南州)

무덕(武德) 2년(619년) 신설된 주로 신설 당시 융양현(隆陽縣), 부화현(扶化縣), 융무현(隆巫縣), 단계현(丹溪縣), 영수현(靈水縣), 남천현(南川縣)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3년(620년) 명칭이 북주(僰州)로 변경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남주가 되었다. 정관(貞觀) 5년(631년) 삼계현(三溪縣)을 신설했다. 정관(貞觀) 7년(633년) 당산현(當山縣), 남산현(嵐山縣), 귀덕현(歸德縣), 문계현(汶溪縣)을 설치했다가 이듬해에 폐지했다. 정관(貞觀) 11년(637년) 부화현, 융무현, 영수현이 폐지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남천군(南川郡)으로 변경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남주가 되었다.

2.3.12. 계주(溪州)

천수(天授) 2년(691년) 진주(辰州) 대향현(大鄕縣)에 계주(溪州)를 설치했다. 이후 낙포현(洛浦縣)을 설치했다가 장안(長安) 4년(704년) 낙포현을 금주(錦州)로 옮겼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계주는 영계군(靈溪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 다시 계주(溪州)가 되었다.

2.3.13. 진주(溱州)

정관(貞觀) 16년(642년) 영의현(榮懿縣), 부환현(扶歡縣), 악래현(樂來縣)과 함께 설치되었다. 함형(咸亨) 원년(670년) 악래현을 폐지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진계군(溱溪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진주가 되었다.

2.3.14. 진주(珍州)

전한무제가 남월 정복을 목적으로 건위군에서 장가군(牂牁郡)을 분할 설치했다. 이후 서진 영가(永嘉) 5년(311년) 장가군, 주제군(朱提郡), 건녕군(建寧郡)의 일부를 분할해서 야랑군을 설치했다가 양나라 때 폐지되었다.

이후 정관(貞觀) 16년(642년) 진주(珍州)가 설치되었고 야랑현(夜郞縣), 여고현(麗皋縣), 악원현(樂源縣)이 같이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야랑군(夜郞郡)으로 변경되었으며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진주가 되었다. 원화(元和) 3년(808년) 진주는 폐지되었고 진주의 현들은 진주(溱州)로 통폐합되었다. 주명은 야랑현 경계에 있던 융진산(隆珍山)에서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 곡아현(曲阿縣)으로 불렸던 현으로 한때 운양현(雲陽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곡아현이 되었다. 무덕(武德) 5년(622년) 곡아현에 간주(簡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간주를 폐지하면서 다시 윤주에 속하게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단양현으로 개칭되었다.[2] 무덕(武德) 3년(620년) 모주(茅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모주가 폐지되고 장주(蔣州)에 속하게 되었다. 무덕(武德) 9년(626년) 윤주에 속하게 되었다.[3] 수공(垂拱) 4년(688년) 연릉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설치되었다.[4] 금릉읍(金陵邑), 말릉현(秣陵縣)으로 불렸다가 손권이 이곳을 건업현(建業縣)으로 명명했다. 이후 건업현(建鄴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동진 대에 민제 사마업의 피휘를 위해 건강현(建康縣)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임강현(臨江縣)이 분할 설치되고 강녕현(江寧縣)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3년(620년) 두복위의 항복 이후 양주(揚州)가 설치되고 강녕현은 귀화현(歸化縣)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6년(623년) 보공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보공석에게 점령되었다가 다음해에 보공석을 평정하면서 양주는 장주(蔣州)로 개편되었다. 이후 귀화현은 다시 금릉현으로 개편되었다가 무덕(武德) 9년(626년) 백하현(白下縣)으로 개편되었다. 정관(貞觀) 9년(635년) 다시 강녕현(江寧縣)으로 개칭되었다. 상원(上元) 2년(761년) 다시 상원현(上元縣)으로 개칭되고 승주가 폐지되면서 윤주에 속했다가 광계(光啓) 3년(887년) 승주가 다시 설치되면서 승주에 속하게 되었다.[5] 무덕(武德) 4년(621년) 구용현에 모주(茅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모주가 폐지되면서 구용현은 장주의 현이 되었다. 무덕(武德) 9년(626년)부터 윤주(潤州)에 속했다가 지덕(至德) 2재(757년) 강녕군이 설치되면서 강녕군에 속했으며, 보응(寶應) 원년(761년) 승주가 폐지되어 윤주에 속했다가 광계(光啓) 3년(887년) 승주가 다시 설치되면서 승주에 속하게 되었다.[6] 율양현과 율수현은 무덕(武德) 3년(620년) 양주에 속했다가 무덕(武德) 9년(626년)부터 지덕(至德) 2재(757년) 강녕군이 설치될 때까지 선주(宣州)에 속했다. 이후 상원(上元) 2년(761년) 승주가 폐지된 뒤부터 광계(光啓) 3년(887년) 승주가 다시 설치될 때까지 다시 선주에 속했다.[7] 삼국시대까지의 명칭은 비릉현(毗陵縣)으로 회계군(會稽郡)에 속했으며, 오나라 때 연릉읍(延陵邑)이었던 지역이다. 서진 때인 311년 비릉현을 진릉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때 상숙현(常熟縣)에 상주를 설치했다.[8] 서진 때 곡아현(曲阿縣)을 분할하여 무진현(武進縣)을 설치했고 양나라 때 난릉현(蘭陵縣)으로 고쳐졌다.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수공(垂拱) 2년(686년) 진릉현에서 분할하여 다시 설치되었다.[9] 양나라 때 난릉현에서 분할하여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3년(620년) 강음현에 기주(暨州)를 설치하고 강음현, 기양현(暨陽縣), 이성현(利城縣)을 관할로 두었다가 무덕(武德) 9년(626년) 기양현을 폐지하고 이성현을 강음현에 통폐합했다.[10] 후한 때 양선현(陽羨縣)으로 불린 지역이다. 서진 때 의흥군(義興郡)과 의흥현을 설치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의흥현에 남흥주를 설치하고 양선현(陽羨縣)과 임진현(臨津縣)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남흥주와 양선현, 임진현을 통폐합하고 의흥현을 다시 상주에 두었다.[11] 춘추시대 때 합려읍(闔閭邑)으로 불린 곳으로 이후 오현이라는 지명이 정착했다. 수나라가 소주를 설치할 때 주의 서쪽에 있는 고소산(姑蘇山)에서 이름을 땄다.[12] 진한시대에 회계군(會稽郡) 유권현(由拳縣)이었으며 삼국시대 오나라 때 가흥현이 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다시 설치되어 소주 관할이 되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오현에 통폐합되었다가 정관(貞觀) 8년(634년) 다시 설치되었다.[13] 한때 누현(婁縣) 관할이었다가 양나라 때 누현(婁縣)을 분할하여 신의현(信義縣)을 설치했고 다시 신의현에서 곤산현(昆山縣)을 설치했다.[14] 서진 때 오현에서 분리된 해우현(海虞縣)이 시초로 양나라 때 상숙현이 되었다.[15]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 오현에서 분할하여 설치했다.[16] 경운(景雲) 2년(711년) 가흥현에서 분할해 설치했다가 선천(先天) 원년(712년)에 다시 폐지되었고 개원(開元) 5년(717년) 다시 설치되었다.[17] 천보(天寶) 10재(751년) 가흥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8] 전한대까지 회계군(會稽郡), 후한 대에 오군 관할이었던 현으로 266년 오흥군 설치 이후 오흥군의 현이 되었다. 양나라 소태(紹泰) 원년(555년) 진주(震州)가 설치되었으나 이듬해 폐지되었다. 호주의 치소가 오정현에 있었다.[19] 삼국시대 오정현과 여항현(余杭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영안현(永安縣)으로 설치되었고 서진 대에 영강현(永康縣)이 되었다가 다시 무강현이 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무강현에 무주(武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무주를 폐지하면서 호주 관할 현이 되었다.[20] 서진 대에 오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장성현에 치주(雉州)를 설치하여 장성현과 원향현(原鄕縣)을 관할로 두었으나 무덕(武德) 7년(624년) 원향현과 치주를 폐지하여 장성현에 통폐합하고 호주 관할 현으로 두었다.[21] 심법흥이 설치한 현으로 심법흥이 평정된 뒤 무덕(武德) 4년(621년) 도주(桃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州) 7년(624년) 장성현에 통폐합되었다. 인덕(麟德) 원년(664년) 장성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다시 설치했다.[22] 천수(天授) 2년(691년) 무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무원현(武原縣)으로 설치되었고 경운(景雲) 2년(711년) 임계현(臨溪縣)이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덕청현이 되었다.[23] 한대에 회계군(會稽郡)의 현으로 당시 전당현의 당은 '당(唐)'이었다. 수나라 때 여항현(餘杭縣)에 항주를 설치하면서 치소를 전당현으로 옮겼다. 당나라가 들어선 뒤 국호의 피휘를 위해 당(唐)을 '당(塘)'으로 고쳤다.[24] 한대에 해염현(海鹽縣)이었던 지역으로 삼국시대 오나라 대인 258년 염관현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동무주(東武州)에 속했으나 무덕(武德) 7년(625년) 전당현에 통폐합되었다. 정관(貞觀) 4년(630년) 다시 설치되었다.[25] 회계군(會稽郡)에 속했던 현으로 이후 오흥군(吳興郡)의 현이 되었다가 남북조시대에는 전당군(錢唐郡)의 현이 되었다. 수나라가 전국적으로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항주의 현이 되었다.[26] 한대에 회계군(會稽郡) 부춘현(富春縣)이었던 현으로 삼국시대 때 오군의 현이 되었다. 동진 때 부양현이 되었다.[27] 한대에 단양군(丹陽郡)에 속했던 현이다. 무덕(武德) 7년(624년) 잠주(潛州)를 설치하면서 임수현(臨水縣)과 함께 잠주의 현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잠주와 임수현을 폐지하면서 다시 항주의 현이 되었다.[28] 수공(垂拱) 4년(688년) 여항현, 어잠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옛 임수현(臨水縣) 자리에 설치했다.[29] 영순(永淳) 원년(682년) 부양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30] 수공(垂拱) 2년(686년) 어잠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 무융현(武隆縣)으로 개칭되었다가 같은 해에 다시 자계현이 되었다.[31]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 자계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무융현(武隆縣)으로 설치했다. 신룡(神龍) 원년(705년) 당산현으로 개칭되었다.[32] 무덕(武德) 7년(624년) 회계현을 분할하여 설치했다가 이듬해에 폐지했다. 수공(垂拱) 2년(686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대력(大曆) 2년(767년) 다시 폐지되었고 대력(大曆) 7년(772년) 다시 설치되었다. 원화(元和) 7년(812년) 다시 폐지되었다가 원화(元和) 10년(815년) 다시 설치되었다.[33]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설치되어 요주(姚州) 관할이 되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주가 폐지되어 월주의 현이 되었다.[34] 무덕(武德) 4년(621년) 담현에 승주(嵊州)와 담성현(剡城縣)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승주와 담성현을 폐지했다.[35] 의봉(儀鳳) 2년(677년) 회계현과 제기현의 일부를 분할해 영흥현(永興縣)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명칭을 소산현으로 고쳤다.[36] 회계군(會稽郡) 관할이었으며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은주(鄞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주가 폐지되고 월주(越州) 관할이 되었다. 개원(開元) 26년(738년) 무현 자리에 명주가 설치되었다.[37] 봉화현과 자계현은 개원(開元) 26년(738년) 무현에서 분할하여 설치했다.[38] 신룡(神龍) 원년(705년) 영해현(寧海縣)과 무현(鄮縣)을 분할하여 설치했으며 광덕(廣德) 2년(765년) 명주 관할이 되었다.[39] 전한 대에 회계군(會稽郡) 회포현(回浦縣)이었으며 후한 대에 장안현(章安縣)이 되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대에 임해현(臨海縣)이 설치되어 쭉 이어졌다. 무덕(武德) 4년(621년) 주를 설치할 때 천태산(天臺山)에서 이름을 따서 태주라 명명했고 임해현을 태주의 치소로 삼았다.[40] 삼국시대에 시평현(始平縣)이었으며 서진 대에 시풍현(始豊縣)이 되었다. 수나라 말에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었다가 정관(貞觀) 8년(634년) 다시 설치되었다. 상원(上元) 2년(675년) 당흥현으로 개칭되었다.[41] 상원(上元) 2년(675년) 임해현의 일부가 영녕현(永寧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으며 천수(天授) 원년(690년) 황암현으로 개칭되었다.[42] 상원(上元) 2년(675년) 임해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43] 영창(永昌) 원년(689년) 임해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44] 회계군(會稽郡) 오상현(烏傷縣)이었던 지역으로 후한 때 장산현(長山縣)이 설치되었다. 266년 동양군(東陽郡)이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금화산(金華山)의 이름을 따서 금화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45] 진나라 때 오상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강주(綱州)를 설치하고 화천현(華川縣)을 신설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강주와 화천현을 폐지하고 현의 명칭을 의오현으로 고쳤다.[46] 오나라 때 오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여주(麗州)와 진운현(縉雲縣)이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여주와 진운현을 폐지했다.[47] 수공(垂拱) 2년(686년) 오상현(烏傷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신설했으며 동양군에서 이름을 땄다.[48] 함형(咸亨) 5년(674년) 금화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49] 천수(天授) 2년(691년) 영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무의현(武義縣)을 설치했으며 뒤에 무성현이 되었다.[50] 천보(天寶) 13재(754년) 의오현, 난계현과 항주(杭州) 부양현(富陽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신설했다.[51] 후한 대에는 신안현(新安縣)이었으나 진 대에 '신(新)'을 '신(信)'으로 고쳤다. 무덕(武德) 4년(621년) 구주와 더불어 수강현(須江縣)과 정양현(定陽縣)이 함께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구주와 수강현, 정양현이 폐지된 뒤 무주의 현이 되었다가 구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구주의 현이 되었다.[52] 한대에 회계군(會稽郡) 태말현(太末縣)이었던 현으로 266년 이후 동양군(東陽郡)의 현이 되었다. 진 대에 용구현(龍丘縣)이 되었고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곡주(穀州)와 태말현(太末縣), 백석현(白石縣)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백석현과 태말현을 신안현에 통폐합했다. 정관(貞觀) 8년(634년) 금화현(金華縣)과 신안현(信安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용구현을 설치했다. 수공(垂拱) 2년(686년) 구주의 현이 되었다.[53] 무덕(武德) 4년(621년) 신안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었다가 영창(永昌) 원년(689년) 다시 설치되었다.[54] 여의(如意) 원년(692년) 용구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현의 서쪽에 형계(刑溪)가 있었는데 진나라 때 유이가 '형(刑)'자를 싫어하여 영천(盈川)이 되었고 이것이 현의 이름이 되었다. 증성(證聖) 원년(695년) 무안현(武安縣)을 설치했다가 뒤에 폐지했으며 원화(元和) 7년(812년) 영천현이 신안현에 통폐합되었다.[55] 함형(咸亨) 5년(675년) 신안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수공(垂拱) 2년(686년) 구주의 현이 되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신주(信州)의 되었다가 다시 구주의 현이 되었다.[56] 한대에 회계군(會稽郡) 부춘현(富春縣)이었던 곳으로 221년 설치되었다. 수나라 대에 폐지되었다가 영순(永淳) 2년(683년) 동려현(桐廬縣)과 치산현(雉山縣)의 일부가 다시 건덕현으로 설치되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년) 치소를 건덕현으로 옮겼다.[57] 208년 이전까지 흡현(歙縣)의 일부였던 곳이 208년 신안현(新安縣)으로 설치되었다. 수나라 대에 치산현(雉山縣)이 되었다. 문명(文明) 원년(684년) 다시 신안현이 되었으며, 개원(開元) 20년(732년) 환순현(還淳縣)이 되었다가 영정(永貞) 원년(805년) 막 즉위한 헌종의 즉위를 피휘를 위해 청계현이 되었다.[58] 영창(永昌) 원년(689년) 치산현의 일부가 수창현으로 설치되었다가 재초(載初) 원년(690년) 다시 폐지되었고 신룡(神龍) 원년(705년) 다시 설치되었다.[59] 225년 부춘현의 일부가 동려현으로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엄주(嚴州)가 설치되어 동려현, 분수현(分水縣), 건덕현(建德縣)을 관할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엄주와 분수현, 건덕현이 폐지되었으며 동려현은 목주의 현이 되었다. 치소는 동계(桐溪)에 있었다가 개원(開元) 26년(738년) 종산(鐘山)으로 옮겨졌다.[60] 무덕(武德) 4년(621년) 엄주(嚴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엄주와 분수현, 건덕현이 폐지되어 동려현으로 통폐합되었다. 여의(如意) 원년(692년) 동려현의 일부가 무성현(武盛縣)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룡(神龍) 원년(705년) 분수현으로 개칭되었다.[61] 208년 손권에 의해 흡현의 일부가 신정현(新定縣)으로 설치되었으며 서진 대에 수안현으로 개칭되었다.[62] 안사고나 호삼성에 따르면 歙의 음이 '섭(攝)'과 같다고 전하고 있고, 현대 중국어에서도 지명으로 쓰일 경우는 'shè'로 발음하기에, '섭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후한 때의 자전인 『설문해자』에서는 지명으로 쓰인 '歙'의 반절을 '許及切'으로 표기하고 있고, 이에 따라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어 한자사전들도 '歙'의 음은 '흡'으로 기재한다.[63] 208년 손권에 의해 흡현의 일부가 휴양현(休陽縣)으로 분할되었고 258년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서진 대에 해녕현(海寧縣)이 되었고 수나라 대인 598년 휴녕현이 되었다.[64] 영휘(永徽) 5년(654년) 흡현의 일부가 북야현(北野縣)으로 분할되었으며 나중에 적계현으로 개칭되었다.[65] 개원(開元) 28년(740년) 설치되었다.[66] 영태(永泰) 2년(766년) 설치되었다.[67] 전한 대에 회계군(會稽郡) 회포현(回浦縣)으로 불린 지역으로 후한 대에 장안현(章安縣)으로 불린 지역이다. 송양현(松陽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괄창현(括蒼縣)을 설치했다. 대력(大曆) 14년(779년) 막 즉위한 덕종 이괄의 피휘를 위해 여수현(麗水縣)으로 개칭되었다.[68] 후한 대에 장안현(章安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연간 송양현에 송주(松州)를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송주를 폐지하였다.[69] 괄창현(括蒼縣)과 무주(婺州) 영강현(永康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70] 경운(景雲) 2년(711년) 괄창현(括蒼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71] 무덕(武德) 8년(625년) 송양현에 통폐합되었다가 경운(景雲) 2년(711년) 다시 설치되었다.[72] 건원(乾元) 2년(759년) 월주(越州) 자사 독고여(獨孤嶼)의 주청으로 괄주 용천향(龍泉鄕)에 현을 설치했다.[73] 후한 대에 장안현(章安縣)의 동구향(東甌鄕)이 영녕현(永寧縣)으로 분할되었다. 257년 임해군(臨海郡)이 설치되었고 동진 대에 영가군(永嘉郡)이 설치되었다. 수나라 대에는 처주의 현이었지만 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영가군이 되었다. 당나라 때는 처주의 명칭이 괄주로 바뀌었으며 675년 온주가 설치되면서 온주의 현이 되었다.[74] 삼국시대 오나라 대에 나양현(羅陽縣)이 설치되었고 이후 안양현(安陽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진 대에 명칭이 안고현으로 변경되었다. 수나라 대에 현이 폐지되었으나 당나라 때 다시 설치되었다. 675년 온주가 설치되면서 온주의 현이 되었다.[75] 무덕(武德) 5년(622년) 안고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폐지되었다가 대족(大足) 원년(700년) 다시 설치되었다.[76] 무덕(武德) 5년(622년)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영가현에 통폐합되었다. 재초(載初) 원년(689년) 영가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다시 설치하였다.[77] 무덕(武德) 6년(623년)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었다. 이후 장안(長安) 2년(702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원화(元和) 3년(808년) 다시 폐지되었고 원화(元和) 5년(810년) 다시 설치되었다.[78] 무덕(武德) 6년(623년) 민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신녕현(新寧縣)으로 설치되었고 이후 장락현으로 개칭되었다. 원화(元和) 3년(808년) 복당현(福唐縣)에 통폐합되었으나 원화(元和) 5년(810년) 다시 설치되었다.[79] 성력(聖曆) 2년(699년) 장락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만안현(萬安縣)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복당현으로 개칭되었다.[80] 무덕(武德) 6년(623년) 민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온마현(溫麻縣)이 설치되었고 같은 해에 연강현으로 개칭되었다.[81] 무덕(武德) 6년(623년) 설치되었다가 연강현에 통폐합되었다. 이후 장안(長安) 2년(702년) 연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다시 설치했다.[82] 영태(永泰) 2년(766년) 후관현과 우계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83] 함통(咸通) 2년(866년) 설치되었다.[84] 정원(貞元) 원년(785년) 후관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85] 개원(開元) 29년(741년) 설치되었다.[86] 개원(開元) 8년(720년) 남안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고 치소를 진강현에 두었다.[87] 서진 대부터 남북조시대까지 진안현(晉安縣)으로 불렸던 현이며, 수나라 대에 남안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5년(622년) 남안현에 풍주(豊州)가 설치되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풍주가 폐지되었고 풍주의 현들은 천주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무영주를 설치했고 무영주가 경운(景雲) 2년(711년) 천주로 개칭되었다.[88] 무덕(武德) 5년(622년) 남안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포전현을 설치했다.[89] 성력(聖曆) 2년(699년) 포전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청원현(淸源縣)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선유현으로 개칭되었다.[90] 개황(開皇) 12년(592년) 설치되었다.[91] 본래 명칭은 오흥현(吳興縣)이었으며 무덕(武德) 4년(621년) 당흥현(唐興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이후 건안현에 통폐합되었다. 재초(載初) 원년(689년) 건안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당흥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천수(天授) 2년(691년) 무령현(武寧縣)으로 개칭되었다. 신룡(神龍) 원년(705년) 당흥현으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포성현으로 개칭되었다.[92] 무덕(武德) 4년(621년)에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건안현으로 통폐합되었으며, 수공(垂拱) 4년(688년) 다시 설치되었다.[93] 무덕(武德) 5년(622년) 소무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폐지되었다. 수공(垂拱) 4년(688년) 다시 설치되었다가 원화(元和) 3년(808년) 폐지되었으며, 원화(元和) 5년(810년) 다시 설치되었다.[94] 주의 치소가 있는 곳이다.[95] 본래 황연현(黃連縣)이었으나 천보(天寶) 원년(742년) 영화현으로 명칭을 고쳤다.[96] 본래 건주(建州) 관할로 무덕(武德) 4년(621년)에 설치되었으며 건안현(建安縣)에 통폐합되었다가 영휘(永徽) 6년(655년) 다시 설치되었고 대력(大曆) 12년(777년) 정주 관할이 되었다.[97] 주를 설치하면서 같이 설치되었으며 장주의 치소가 있다. 개원(開元) 29년(741년) 회은현(懷恩縣)을 장포현에 통폐합했다.[98] 과거 천주(泉州)에 속했다가 성력(聖曆) 2년(699년) 무영주(武榮州) 관할이 되었으며, 경운(景雲) 2년(711년) 무영주가 천주로 개칭되었다. 개원(開元) 29년(741년) 장주 관할이 되었다.[99] 742년 정주(汀州)를 설치하면서 정주 관할이 되었다가 대력(大曆) 12년(777년) 장주 관할이 되었다.[100] 남북조시대까지 완릉현(宛陵縣)으로 불렸다가 수나라 대에 선성군으로 개칭되었다.[101] 서진 대에 설치된 현이다. 무덕(武德) 3년(620년) 남예주(南豫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면서 다시 선주에 속하게 되었다.[102] 무덕(武德) 3년(620년) 경현에 유주(猷州)와 남양현(南陽縣), 안오현(安吳縣)이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유주와 남양현, 안오현이 경현으로 통폐합되어 선주에 속하게 되었다.[103] 유송 대에 고장현(故鄣縣), 선성군 광덕현 등이 수안현(綏安縣)으로 통폐합되었다. 당나라 중기까지 이 명칭이 이어졌다가 지덕(至德) 2재(757년)에 광덕현으로 개칭되었다.[104] 동진 대 이전까지 춘곡현(春穀縣)이었던 지역으로 양나라 대에 남릉현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지주(池州)가 설치되었다가 주가 폐지되면서 다시 선주에 속하게 되었다. 치소는 자기성(赭圻城)에 있었다가 장안(長安) 4년(704년) 청양성(靑陽城)으로 옮겨졌다.[105] 천보(天寶) 11재(752년)에 경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06] 남북조시대까지 존속했던 현으로 수나라 대에 선성현으로 통폐합되었으나 무덕(武德) 3년(62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무덕(武德) 6년(623년)에 폐지되었으나 천보(天寶) 3재(744년)에 다시 설치되었다.[107] 보응(寶應) 2년(763년) 태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08] 한대에 단양군(丹陽郡) 석성현(石城縣)이었던 지역으로 수나라 때인 개황(開皇) 19년(599년) 남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추포현을 설치했다.[109] 천보(天寶) 원년(742년) 경현(涇縣), 남릉현(南陵縣), 추포현(秋浦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10] 지덕(至德) 2재(757년) 파양현(鄱陽縣)과 추포현의 일부를 분리하여 설치했다. 영태(永泰) 원년(763년) 지주가 설치되면서 지주의 현이 되었다.[111] 영태(永泰) 2년(764년) 추포현과 부량현(浮梁縣)의 분할하여 설치했다.[112] 무덕(武德) 5년(621년) 파양현의 일부가 광진현(廣晉縣)으로 분할되어 호주(浩州)의 현이 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호주가 폐지되고 광진현도 파양현으로 통폐합되었다.[113] 무덕(武德) 4년(621년) 옥정현(玉亭縣)과 장성현(長城縣)을 설치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옥정현을 장성현에 통폐합하고 무덕(武德) 8년(625년) 장성현을 여간현에 통폐합했다.[114] 무덕(武德) 4년(621년) 현이 설치되었으며, 무덕(武德) 9년(626년) 폐지되었다가 뒤에 다시 설치되었다.[115] 무덕(武德) 4년(621년) 파양현의 일부가 신평현(新平縣)으로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었다. 개원(開元) 4년(716년) 파양현의 일부가 신창현(新昌縣)으로 설치되었고 천보(天寶) 원년(742년) 부량현이 되었다.[116] 무덕(武德) 4년(621년) 요주(饒州)에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익양현에 통폐합되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영풍현(永豐縣)을 설치하면서 상요현도 다시 설치되었으며 원화(元和) 7년(812년) 영풍현을 상요현에 통폐합했다.[117] 무덕(武德) 4년(621년) 요주(饒州)가 설치되면서 요주의 현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신주에 속하게 되었다.[118] 영태(永泰) 원년(765년) 익양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19] 증성(證聖) 원년(695년) 상산현(常山縣)과 수강현(須江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구주 관할 현으로 설치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신주의 현이 되었다.[120] 홍주의 치소로 남북조시대까지 남창현이라는 명칭이었다. 수나라 대에 예장현(豫章縣)이 되었다. 보응(寶應) 원년(762년) 막 즉위한 대종의 피휘를 위해 종릉현(鐘陵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덕종 정원(貞元) 원년(785년) 남북조시대까지 사용했던 명칭인 남창현으로 개칭되었다.[121] 삼국시대에 남창현의 일부가 부성현(富城縣)으로 설치되었으며 진 대에 풍성현이 되었다.[122] 원래 명칭은 건성현(建城縣)이었지만 무덕(武德) 5년(622년) 태자 이건성의 피휘를 위해 고안현으로 개칭되었고 망채현(望蔡縣), 화양현(華陽縣)과 함께 새롭게 신설된 정주(靖州)의 현이 되었다. 무덕(武德) 7년(624년) 정주는 미주(米州), 균주(筠州)로 개칭되었다가 다음해에 폐지되었고 화양현과 망채현도 폐지되었다. 고안현은 홍주의 현이 되었다.[123] 한 대에 해혼현(海昏縣)이었던 지역으로 후한 대인 104년 건창현(建昌縣)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5년(622년) 남창주(南昌州) 총관부(總管府)가 설치되어 남창주, 서오주(西吳州), 정주(靖州), 미주(米州), 손주(孫州)를 관할했으며, 건창현은 용안현(龍安縣), 영수현(永修縣)과 함께 남창주의 현이었다. 무덕(武德) 8년(625년) 남창주와 손주가 폐지되고 남창주 신오현, 영수현, 용안현(龍安縣)이 건창현으로 통폐합되었으며, 손주 건창현(建昌縣)은 예장현에 통폐합되고 남창주 건창현은 홍주의 현이 되었다.[124] 영순(永淳) 2년(683년) 건창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25] 장안(長安) 4년(704년) 건창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경운(景雲) 원년(710년) 예녕현(豫寧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보응(寶應) 원년(762년) 막 즉위한 대종의 피휘를 위해 다시 무녕현으로 개칭되었다.[126] 정원(貞元) 15년(799년) 설치되었다.[127] 오나라 때 감현의 일부가 양도현(陽都縣)으로 분할되어 설치되었으며 서진 대에 영도현(寧都縣)이 되었다. 이후 수나라 대에 건화현으로 개칭되었다.[128] 오나라 대인 236년 남야현(南野縣)의 일부가 분할되어 남안현(南安縣)이 설치되고 서진 대에 남강현으로 개칭되었다.[129] 영순(永淳) 원년(682년) 남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남안현(南安縣)을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신풍현으로 개칭되었다.[130] 신룡(神龍) 원년(705년) 남강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31] 정원(貞元) 4년(788년) 설치되었다.[132] 무덕(武德) 5년(622년) 남성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영성현(永城縣), 동흥현(東興縣)이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폐지되었다.[133] 오나라 대에 신건현(新建縣)이 설치되어 양나라 대에 파산현(巴山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숭인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5년(622년) 일부가 분할되어 의황현(宜黃縣)이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폐지되었다.[134] 경운(景雲) 2년(711년) 남성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가 선천(先天) 2년(713년) 폐지했다. 이후 개원(開元) 8년(72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135] 한대에 예장군(豫章郡)에 속했던 현으로 후한대에 서창현(西昌縣)이 되어 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가 수나라 때 다시 여릉현이 되었다.[136] 개황(開皇) 9년(589년) 수나라남진을 멸한 뒤 서창현으로 설치되었으며 개황(開皇) 11년(591년) 동창현(東昌縣)이 통폐합되고 태화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무덕(武德) 5년(622년) 남평주(南平州)가 설치되어 태화현, 영신현(永新縣), 광흥현(廣興縣), 동창현(東昌縣)을 관할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남평주가 폐지되고 영신현 등 3개 현이 태화현으로 통폐합되었다.[137] 삼국시대 오나라 대인 267년 안성군(安成郡)이 설치되었다. 안성군은 수나라 대에 폐지되어 안복현(安復縣)이 되었다가 뒤에 명칭이 안복현(安福縣)으로 변경되었다.[138] 한대에 예장군(豫章郡)에 속했던 현이다.[139] 현경(顯慶) 2년(657년) 태화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40] 대에 의양현(宜陽縣)으로 개칭되었으나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뒤 다시 의춘현이 되었다.[141] 평향현과 신유현은 오나라 대인 267년에 설치된 현이다.[142] 신양현(新陽縣)이 수나라 대에 영흥현으로 개칭되었다.[143] 천보(天寶) 2년(743년) 설치되었다.[144] 진나라 대에 돈양현(沌陽縣)으로 불렸던 곳으로 개황(開皇) 17년(597년) 한진현(漢津縣)이 되었다가 양제가 즉위한 뒤 한양현이 되었다.[145] 무덕(武德) 4년(621년) 한양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46] 옛 명칭은 하준현(下雋縣)으로 남북조시대에 파릉현(巴陵縣)이 되었다.[147] 한 대에 잔릉현(孱陵縣)으로 불렸던 곳으로 안남현(安南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수나라 때 화용현으로 개칭되었다. 수공(垂拱) 2년(686년) 용성현(容城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다시 화용현이 되었다.[148] 한 대에 익양현(益陽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양나라 때 약산현(藥山縣)이 설치되었다. 약산현은 수나라 때 안락현(安樂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이후 원강현(沅江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악주에 속했다. 건녕(乾寧) 연간에 교강현으로 개칭되었다.[149] 원휘(元徽) 2년(474년) 설치된 현으로 무덕(武德) 8년(625년) 나현(羅縣)을 통폐합했다.[150] 신룡(神龍) 3년(707년) 상음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창강현으로 설치되었다.[151] 남북조시대까지 임상현(臨湘縣)으로 불렸으며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이후 장사현이 되었다.[152] 후한 대에 상남현(湘南縣)이었던 현으로 257년 일부가 형양현(衡陽縣)으로 분할되었다. 천보(天寶) 8년(749년) 상담현이 되었다.[153] 한대애 영릉군(零陵郡) 종무현(鐘武縣)이었던 곳으로 후한 대에 중안현(重安縣)이 되었다가 이수 상향현으로 개칭되었다.[154] 무덕(武德) 4년(621년) 일부가 신강현(新康縣)으로 분할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신강현이 다시 익양현으로 통폐합되었다.[155] 임상현(臨湘縣)으로 불린 현이며,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설치되었다.[156] 후한 말엽에 설치되어 수나라 때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경룡(景龍) 2년(708년) 다시 설치되었다.[157] 원래 명칭은 임증현(臨蒸縣)으로 증양현(蒸陽縣)에서 분리되었다.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이후 형양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임증현으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개원(開元) 20년(732년) 다시 형양현으로 개칭되었다.[158] 원래 명칭은 신녕현(新寧縣)이었으나 천보(天寶) 원년(742년) 상녕현으로 개칭되었다.[159] 수나라 때 폐지되었으나 성력(聖曆) 원년(698년)에 유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다시 설치했다.[160] 수나라 대에 뇌음현(耒陰縣)으로 불렸지만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뇌양현으로 개칭되었다.[161] 수나라 때 잔릉현(孱陵縣)의 일부가 안향현으로 분할되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잔릉현을 안향현으로 통폐합했다.[162] 수나라 때 영릉현(零陽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개황(開皇) 18년(598년) 자리현으로 개칭되었다. 인덕(麟德) 원년(664년) 숭의현(崇義縣)을 자리현에 통폐합했다.[163] 남북조시대까지 천릉현(泉陵縣)으로 불렸으며 남북조시대 통일 후 영릉현이 되었다.[164] 남북조시대까지 존속했던 현으로 수나라의 통일 후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정관(貞觀) 원년(627년) 폐지되었다가 정관(貞觀) 4년(630년) 다시 설치되었다.[165] 소선이 상원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7년(625년) 폐지되었다가 상원(上元) 2년(761년) 형남절도사 여인의 상주로 다시 설치되었다.[166] 남북조시대까지 영포현(營浦縣)으로 불렸던 현이며 영양군이 설치된 뒤 영양군의 치소가 되었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영포현은 영양현(永陽縣)이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홍도현으로 개칭되었다.[167] 남북조시대까지 영도현(泠道縣)으로 불렸던 현이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영도현은 영도현(營道縣)에 통폐합되었다가 당흥현(唐興縣)으로 설치되었다. 장수(長壽) 2년(693년) 무성현(武盛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다시 당흥현이 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연당현으로 개칭되었다.[168] 226년 이전까지 창오군(蒼梧郡) 풍승현(馮乘縣)이었으며 226년부터 589년까지 임하군(臨賀郡)에 속했다. 무덕(武德) 4년(621년) 하주 풍승현의 일부가 분할되어 강화현이 설치되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영주의 현이 되었다가 상원(上元) 2년(675년) 도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도주의 현이 되었다. 문명(文明) 원년(684년) 운계현(雲溪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강화군으로 개칭되었다.[169] 정관(貞觀) 8년(634년) 폐지되어 영도현에 통폐합되었다가 천수(天授) 2년(691년)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영명현으로 개칭되었다.[170] 대력(大曆) 2년(767년) 호남관찰사 위관지의 주청에 따라 연당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고 당시 연호를 현의 이름에 붙였다.[171] 소선이 침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무덕(武德) 7년(625년) 폐지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설치되었다. 장수(長壽) 원년(692년) 고평현(高平縣)이 설치되었다가 개원(開元) 23년(735년) 폐지되었다.[172] 진나라 대에 침현의 일부가 여성현(汝城縣)과 진녕현(晉寧縣)으로 각각 분할되었다. 이후 남진 대에 노양군(盧陽郡)이 설치되어 노양현(盧陽縣)을 관할했다. 수나라의 남북조시대 통일 후 노양현은 침주의 현이 되었고 천보(天寶) 원년(742년) 의창현(義昌縣)으로 개칭되었다.[173] 서진 대에 침현의 일부가 평양현과 평양군(平陽郡)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소선이 다시 설치했으며, 무덕(武德) 7년(624년) 폐지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설치되었다.[174] 후한 대에 설치된 한녕현(漢寧縣)이 오나라 대의 양안현(陽安縣), 서진 대의 진녕현(晉寧縣), 수나라 대의 진흥현(晉興縣)으로 개칭되었다. 정관(貞觀) 8년(634년) 폐지되었다가 함형(咸亨) 3년(672년) 다시 설치되어 자흥현이 되었다.[175] 한대에 장사국(長沙國) 소릉현(昭陵縣)이었으며 후한 대에 소양현(昭陽縣)이 되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대인 266년 영릉북부도위부(零陵北部都尉府)가 소릉군(邵陵郡)으로 승격되었으며 진 대에 사마소의 이름을 피휘하여 소양현(邵陽縣)이 되었다. 589년 수나라남진을 평정한 뒤 소양현은 담주(潭州)의 현이 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남양주가 설치되었다가 정관(貞觀) 10년(636년) 남양주는 소주(邵州)가 되었다.[176] 한대에 영릉군(零陵郡) 도양현(都梁縣)이었으며 진 대에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7년(624년) 건흥현을 무강현에 통폐합했다.[177] 금주를 설치하면서 함께 설치되었다. 상풍현은 원래 명칭이 만안현(萬安縣)이었으나 천보(天寶) 원년(742년) 상풍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78] 천수(天授) 2년(691년) 진주(辰州) 대향현(大鄕縣)에 계주(溪州)를 설치하면서 같이 설치된 현으로 장안(長安) 4년(704년) 금주 관할이 되었다.[179] 무덕(武德) 7년(633년) 진주(辰州)에 설치되었다. 정관(貞觀) 8년(634년) 무주를 설치하면서 용표현에 무주의 치소를 두었다.[180] 정관(貞觀) 8년(634년) 설치되었다.[181] 선천(先天) 2년(713년) 용표현의 일부를 분할해서 설치했다.[182] 정관(貞觀) 8년(634년) 무주(巫州)에 야랑현(夜郞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장안(長安) 4년(704년) 무주(舞州)가 설치되면서 무주 관할이 되었으며 개원(開元) 20년 아산현(峨山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83] 천수(天授) 2년(691년) 야랑현에서 분할 설치되었으며 원주(沅州)에 속했으며 장안(長安) 4년(704년) 업주 관할이 되었다.[184] 본래 충주(充州) 관할이었으나 천보(天寶) 3년(744년) 충주가 폐지되면서 업주 관할이 되었고 충주는 기미주가 되었다.[185] 무덕(武德) 2년(619년) 융양현으로 설치되었으며 선천(先天) 원년(712년) 남천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남주의 치소이다.[186] 한나라 때 무릉군(武陵郡) 원릉현(沅陵縣), 천릉현(遷陵縣)이었던 현으로 양나라 때 대향현이 설치되었다. 진주(辰州) 소속이었으나 천수(天授) 2년(691년) 계주 관할이 되어 계주의 치소가 설치되었다.[187] 정관(貞觀) 9년(634년) 대향현에서 분할해 설치했으며 진주 관할이었다가 천수(天授) 2년(691년) 계주(溪州) 관할이 되었다.[188] 정관(貞觀) 16년(642년)에 신설된 현들로 원화(元和) 3년(808년) 진주가 폐지되면서 진주(溱州)의 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