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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연쇄살인 사건/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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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건 내용)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 청주 처제 살인사건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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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목록3. 1986년
3.1. 1차 사건3.2. 2차 사건3.3. 3차 사건 ★3.4. 4차 사건 ★
4. 1987년
4.1. 5차 사건 ★4.2. 6차 사건
5. 1988년
5.1. 7차 사건 ★5.2. 8차 사건
6. 1990년
6.1. 9차 사건 ★
7. 1991년
7.1. 10차 사건

1. 개요

이춘재에게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여성 10여 명이 강간, 살해당한 사건.

2. 사건 목록

||<tablebgcolor=#fff,#000><tablewidth=100%><tablebordercolor=gray><rowbgcolor=#333,#ddd><rowcolor=#eee,#111><width=8%> 번호 ||<width=22%> 일시 ||<width=35%> 피해자 및 정황 ||<-8> 기타 ||
1차 사건 1986년
9월 15일
06:2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할머니(72)가 귀가하다 피살[1] 날씨 맑음, 액살(손으로 목이 졸림). 정액 반응 음성
2차 사건 1986년
10월 20일
22: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2]에서 박현숙 씨(26)가 맞선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날씨 흐림, 액살.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3차 사건 1986년
12월 12일
23: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140[3]에서 권정분 씨(25)가 귀가 중에 집 앞에서 피살날씨 맑음, 교살(스타킹으로 목이 졸림). 스타킹으로 재갈을 물리고 팬티를 얼굴에 씌움.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4차 사건 1986년
12월 14일
23:00
(추정)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논둑[4]에서 이계숙 씨(22)가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날씨 비. 두 손 결박. 교살. 우산으로 난행, 거들을 얼굴에 씌움.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5차 사건 1987년
1월 10일
20:50
(추정)
화성군 태안읍 황계리[5]에서 홍진영 양(18)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날씨 맑음. 두 손을 결박하고 양말로 재갈물림. 교살.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6차 사건 1987년 5월 2일
23: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 씨(29)가 남편의 우산 마중 가다 피살 날씨 비, 교살.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7차 사건 1988년 9월 7일
21:30
(추정)
화성군 팔탄면 가재3리 292 농수로에서 안기순 씨(54)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날씨 흐림, 두 손을 결박하고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 물림. 교살. 정액 검출(혈액형 판정 불능).
8차 사건 1988년 9월 16일
02: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424[6] 주택에서 박상희 양(13)이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피살액살. 결박이나 재갈 없음. 1989년 7월25일 윤성여 씨(당시 22세)가 검거되었으나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
9차 사건 1990년
11월 15일
18:30
(추정)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4)이 학교 마치고 귀가 중 피살[7] 날씨 안개, 손과 발을 결박하고 브래지어로 재갈물림. 교살. 볼펜·포크•수저•면도칼로 난행. 정액(B형).
10차 사건 1991년 4월 3일
21:00
(추정)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599[8]에서 권순상 씨(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날씨 맑음, 교살. 족적 2점(감정 불능), 정액 검출(B형)
{{{#!wiki style="margin: -10px 0 -6px; display: inline-flex"
}}} :DNA 등의 유력한 증거가 발견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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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는 사건 당시 기준이므로 지금의 행정 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사건의 주 무대였던 태안읍은 2006년부터 6개 행정동으로 분리되면서 없어진 지명이다. 10차 사건의 발생지인 동탄면도 동탄신도시의 개발에 따라 동으로 전환되었다.

화성에서 일어난 10번의 사건에서 총 10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령은 13살 중학생부터 71살 할머니까지 매우 다양했다.

강간살인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고 속옷을 안면에 씌우거나 두 손을 뒤로 묶는 등 대단히 충격적인 범행 수법으로 화제가 되었다. 목을 졸라 살해한 것 뿐만 아니라 가슴이 9차례나 난도질 (9차사건)되거나 음부에 복숭아 9조각(7차사건)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은 화성군[9][10]일 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당연히 범인을 빨리 잡으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여론에 떠밀려 경찰은 엄청난 숫자의 용의자들을 잡아들였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여름인 6월, 7월, 8월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데 그 대학교는 6월에도 학생들이 나가기 때문에 일용직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수사 책임자가 밝힌 자세한 사건 내역 - 2006년 1월 기사(월간조선), 2019년 8월 인터뷰(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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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6년

3.1. 1차 사건

1986년 9월 14일 밤 9시경 또는 9월 15일 새벽 6시경에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씨(71)가 피살된 사건.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9월 15일 오전 6시경 농사일을 걱정하여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실종되었다. 실종된 지 약 4일 후인 9월 19일 오후 2시경 목초밭에서 목장 주인이 숨진 피해자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피해자는 옷이 모두 벗겨진 알몸 상태였으며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6시 20분이었다. 특이한 점은 팬티를 벗기고 다리를 X자형으로 복부에 밀착시켜 놓았다. 사망 원인은 액살이었으며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소지품이 흩어져 있었다. 또한 피해자가 범행을 당하는 동안 구역질을 하면서 쏟아 낸 위장의 내용물이 일부 풀밭에 묻어 있었다. 질액을 채취한 분석에서는 정액 반응이 음성으로 나와 성폭행 여부가 불분명했다.
경찰은 이씨가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가다가 범인의 눈에 띄어 목초밭으로 끌려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지문, 유류품, 족적, 체모 등의 단서를 발견하는데 모두 실패해 용의자조차 잡지 못하고 말았다.[11]

다만 이춘재를 잡고 보니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 전인 9월 14일 밤 9~10시 경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고 목격자도 밤 9시경에 살인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을 토대로 범행 시각이 변경되었다.

2001년 9월 14일 공소시효 만료.

3.2. 2차 사건

1986년 10월 20일 밤 10시 경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현숙씨(26)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1차 사건이 발생한 후 1달 5일만에 발생하였다.

송탄시 신정로에 거주 중이던 피해자는 이날 수양어머니인 허모씨가 거주하던 태안읍 송산리에 버스를 타고 갔고 소개로 맞선을 보고 오후 8시 50분경 집으로 돌아갔다. 허씨는 마을 입구까지 피해자를 배웅했고 피해자는 1km 정도 떨어진 버스 정류장을 향해 둑길을 걸어가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실종 약 3일 후인 10월 23일 오후 2시경 농수로의 콘크리트 수로 안에 숨져 있는 피해자를 논 주인이 발견 후 신고했다. 당시 피해자는 알몸 상태에서 시멘트 농수로 안에 웅크린 자세로 발견되었으며 결박이나 재갈을 물린 흔적은 없었다. 가슴 부위에는 드라이버 같은 것에 의한 상처가 네군데 있었다. 목에는 스타킹이 감겨 있었으며 부검 결과 사인은 액살로 밝혀졌다. 옷가지들은 농수로 둑에 버려져 있었고 강간당한 흔적과 정액이 확인되어 조사했으나 혈액형 분석에는 실패했다. 경찰은 대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유팩, 담배꽁초, 모발을 분석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분석 결과 B형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경찰은 이번에도 유력 용의자를 밝혀내는 데 실패했으며 수사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2]

2001년 10월 19일 공소시효 만료.

3.3. 3차 사건 ★

19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에서 권정분씨(26)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생존자가 있었던 미수사건 이후 13일 만에 발생하였다.

피해자는 26세의 여성으로 실종 당일 남편이 근무하는 수원시 세류2동 소재 모 제과점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근하는 남편과 헤어진 뒤 혼자 귀가하기 위해 10시 30분경 버스에 탔고, 11시가 약간 지날 시점에 안녕리 삼거리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실종 4개월 후인 1987년 4월 23일 논두렁 보수 작업을 하던 논 주인 김씨에 의해 부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권씨의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않은 곳이었다. 실종된 지 131일 만에 발견된 피해자의 사체는 너무 부패가 심하여 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소지품 중에서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이 발견되어 신분이 확인되었다.

백골화된 피해자의 입 부분은 거들과 스타킹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고, 다른 한쪽 스타킹은 피해자의 목을 감고 있었으며 피해자의 피 묻은 팬티가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 팬티에서는 정액 양성반응이 보였으나 혈액형은 판정이 불가하였다.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논바닥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재갈을 물린 후 성폭행을 하고 피해자의 스타킹을 이용해 교살한 후 시신을 둑 밑의 모래 부대 아래에 은닉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2001년 12월 11일 공소시효 만료.

3.4. 4차 사건 ★

1986년 12월 14일 오후 11시경 정남면 관항리 논둑에서 이계숙씨(22)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3차 사건 이후 불과 이틀 만에 벌어졌다.

피해자 이씨는 이날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수원 시내의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맞선은 잘 진행되면서 밤 10시 이후에 끝났고 이씨는 11시경 집이 있는 종점인 정남면 면소재지에 내려 1km 떨어진 집으로 가다가 11시 5분 쯤 이웃 주민 강모(여.70)씨에게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실종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은 관항리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며 실종 7일 후인 12월 21일 오후 12시 반경 관항천 둑에서 수색 중이던 주민에 의해 들깻단으로 덮인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현장을 조사한 결과 큰길에서 사체 발견 장소까지 약 200여 미터를 끌려온 흔적이 있었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여 있었으며 거들은 머리에 씌워져 있었고 블라우스를 벗기고 다시 겉옷을 입힌 것이 확인되었다.[13] 조사 결과 피해자는 스타킹으로 목을 졸려 살해당했으며 피해자 주변에서 발견된 우산 손잡이에는 피해자의 혈액이 묻어 있었고, 사체 주변에는 손수건과 모발, 음모 등이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윗입술은 심하게 부풀어 있었고 우산 손잡이를 이용하여 국부를 난행당하여 다량의 출혈 흔적이 발견되었다. 피해자 주위에는 피해자의 우산 등이 사체 곁에 평행으로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 또한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에서 침과 정액이 검출되었으나 사건 당일 비가 왔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나 지나 혈액형 판독에는 실패했다. B형의 혈액형이 검출되기는 했으나 피해자의 혈액형도 B형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이 사건은 3차 사건의 피해자가 늦게 발견됨에 따라 연쇄살인과의 가능성을 연결 짓지는 못했으나 음부 난행 등 범행의 엽기성으로 인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2001년 12월 13일 공소시효 만료.

4. 1987년

4.1. 5차 사건 ★

1987년 1월 10일 오후 8시 50분경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홍진영 양(18)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경기도 평택 모 여고 2학년이던 홍양은 회사에 이력서를 내러 간 후 수원시 북문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고 저녁 8시 30분경 태안읍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 8시 50분경 반정리 정류소에서 내린 후 실종되었다. 피해자의 사체는 실종 다음날인 1월 11일 오후 1시경 볏짚을 옮기던 논주인이 볏단 속에서 발견했다.

피해자는 다른 사건과는 달리 옷이 모두 입혀져 있었으며 양손이 속옷으로 묶여있었다. 부검 결과 피해자는 입고 있던 털목도리로 교살당했으며 성폭행 흔적이 나왔다. 정액이 검출되긴 했으나 혈액과 섞여있어 혈액형 판별이 어려웠고 대신 천조각과 음모 등에서 나온 혈액형은 모두 B형으로 나왔다.

5차 사건은 4차 사건 27일 후 발생했으며 이 사건을 포함해 4차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수사본부가 있는 태안지서에서 반경 2km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4차 사건과 연관하여 연쇄살인의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3차 사건의 피해자가 4월 23일에 발견되며 연쇄살인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파일:IMG_4430.jpg
1987년 1월 15일조선일보

2002년 1월 9일 공소시효 만료.

4.2. 6차 사건

1987년 5월 2일 오후 11시 경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씨(29)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진안리에 거주 중이던 피해자는 폭우가 내리는 밤에 퇴근하는 남편의 우산 마중을 나갔다. 밤 9시에 집을 나선 피해자는 9시 30분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10시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이때 남편은 야근 때문에 밤 10시 30분에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으며 11시쯤에 버스정류장에 내렸으나 정류장에도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남편은 실종 후 약 6일간 수소문하다 7일째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은 수색 도중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스정류장에서 바로 밑 논바닥에서 피해자의 샌들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시신은 실종된 지 약 일주일 후인 5월 9일 수업을 마치고 산을 넘어 집으로 귀가 중이던 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피해자의 집에서 200m 떨어진 무덤 옆 나무더미였고 시신은 상의는 벗겨지고 하의는 운동복을 입은 상태로 목에는 블라우스와 속옷이 감겨 있었다. 사체 옆에는 남편에게 주려고 가져간 우산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피해자의 곁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길옆에 400여평 가량 고추밭이 있었는데 피해자가 범인에게 끌려 고추밭을 지나간 흔적과 범인의 발자국이 약 50미터에 걸쳐 발견되었다. 부검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교살이었다. 현장에서 234mm의 족적이 발견되었고 피해자의 하의에서 발견된 정액을 조사한 결과 A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피해자의 남편이 A형이었기 때문에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6차 사건은 5차 사건과의 발생간격이 3달 22일로 늘어났고, 발생지점은 5차 사건까지 1번국도 상행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발생한 것과는 달리 오른쪽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2002년 5월 1일 공소시효 만료.

5. 1988년

5.1. 7차 사건 ★

19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 경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기순씨(54)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피해자는 이날 장남이 운영하던 수원 시내의 분식집에서 일손을 도운 후 저녁 8시 40분쯤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다가 실종되었다. 밤이 늦도록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남편은 날이 밝자마자 친척들에게 연락해 피해자를 찾아 해맸고 실종 다음날인 9월 8일 아침 9시 30분쯤에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 풀숲에서 피가 흥건한 피해자의 시신을 찾아냈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었고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린 상태였으며 쥐색 치마를 벗겼다가 도로 입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부검 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 끈으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피해자의 질 내부에서 2개 분량의 복숭아가 발견되는 등 심한 국부난행이 흔적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이후 8달 14일만에 태안 면에서 매우 거리가 있는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사건 이후 이춘재가 현장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논밭에 족적을 남겼고 그 족적이 마을버스 노선이었던 도로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춘재가[14] 그 곳에서[15] 수원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도 경찰이 확인하였다. 당시 그 버스정류장 노선을 지나가는 버스를 전수 조사하여 당시 그 시간대에 운행했던 버스기사를 찾아 목격자를 확보하고 몽타주를 배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용의자의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 물이 들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는데 사실은 이춘재가 자신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것이 아니라 변태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이춘재 새끼손가락에 묻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난 데다 더욱 잔혹해진 수법에 여론은 난리가 났고 당시 화성경찰서장이 교체되었다.

2003년 9월 6일 공소시효 만료.

5.2. 8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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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6일 새벽 2시 경 태안읍 진안리 주택에서 박상희양(13)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6. 1990년

6.1. 9차 사건 ★

1990년 11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3)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태안읍 능리에 거주하던 피해자는 중학교 1학년생(1977년생)으로 사건 당일 학급의 청소 당번이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늦은 시각에 하교를 하게 되었고 오후 5시경 친구인 이 양[16]과 헤어져 하교하던 중 실종되었다. 이후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축산업자 전모(41)씨에 의해 감색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목격된 것과 정 씨(45)에 의해 능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S석재에서 500여m 떨어진 연립주택 앞을 미정 양이 지나갔는데 20대 청년으로 보이던 의문의 남성이 팔을 휘두르며 그 뒤를 쫓아간 것이 목격된 것을 끝으로 밤 9시가 되도록 피해자는 귀가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돌아오지 않자 매우 불안해진 가족들은 인천에 있는 친척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 밤을 새워 주변 근방을 모조리 뒤지며 피해자를 찾아 해맸으나 결국 피해자는 다음 날인 11월 16일 아침 9시경 태안 병점 5리 삼성석재뒤 소나무 숲 야산 오솔길 소나무 가지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는 피해자의 삼촌이었다. 피해자가 발견된 야산은 밤에 늘 경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었다.[17]

발견 당시 피해자는 교복으로 덮여 있었으며 양손과 양발이 하나의 스타킹으로 묶여 몸이 활처럼 휜 상태였다. 입에는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 있었고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있었다. 또한 질 안에서 피해자의 소지품이었던 수저, 포크, 볼펜 등이 나왔으며 교복 상의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다. 피해자의 가슴 좌우에 약 20회 정도로 얇게 베인 상처가 발견되었는데, 이러 한 상처 주위에는 생활반응이 보이지 않아 사후에 난 상처로 판단되었다.

거기다 피해자의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잡채가 발견되었는데 이 말은 피해자가 잡채를 먹은 지 2시간 내에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피해자가 이날 점심 도시락으로 잡채를 싸 왔지만 점심에 먹은 것은 진작 소화되었어야 했고 저녁에는 바로 하교하기 때문에 먹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피해자의 도시락에서 지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잡채를 먹이거나 혹은 억지로 먹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에서는 40개 정도 되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고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2019년 9월 25일 방송한 MBC 실화탐사대 50회에서는 당시 9차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전 '한 남성'이 같이 있었던 광경을 봤다는 목격자를 소개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후 그 남성을 한 전기 회사 앞에서 목격했고[18], 나중에 경찰 수사본부 건물 앞에서 경찰관과 함께 있던 그 남성을 다시 목격했다고 한다(총 3차례). 이때 그는 깜짝 놀라 "저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지목했으나, 당시 경찰 측은 "같은 경찰 직원"이라면서 묵살해버렸다고 한다. 목격자는 이춘재의 사진을 보고 기억 속의 범인과 비슷하다고 했다.

2005년 11월 14일 공소시효 만료.

7. 1991년

7.1. 10차 사건

1991년 4월 3일 오후 9시경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순상(69)씨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권씨는 수원시 매탄동에 있는 큰딸의 집에 갔다가 6시 반경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오후 8시경 동탄면 오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이 있는 반송리 쪽으로 귀가하던 중 피살되었다. 다음날 밭둑을 올라가던 중인 중장비 운전기사가 피해자를 발견해 신고했다.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집에서 200m 떨어진 곳으로, 하의가 벗겨지고 검은 스타킹이 목에 감겨 있는 상태였으며 음부에는 양말이 삽입되어 있었다.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재갈도 없고 손을 결박하지도 않았으며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 역시 교살이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모방범죄로 의심받기도 했다.

경찰은 양말에서 B형의 정액과 지문을 채취했고 이 지문을 3천명 가량의 용의자와 약 4만명의 참고인과 대조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2006년 4월 2일 공소시효 만료. 이로써 결국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모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1] 전문가들은 이것이 연쇄 강간만 저지르던 이춘재가 저지른 첫 살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2] 현재 화성시 진안동 북부(논밭 일대).[3] 현재 화성시 안녕동 140-5 성우교차로 일대.[4] 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관항교차로 인근 논밭 일대.[5] 현재 화성시 황계동 수원 공군기지 남측 논밭 일대.[6] 현재의 진안동 다람마을월드메르디앙1차아파트 일대.[7] 강도 미수사건의 대한 화풀이+등화관제로 인한 목격자 부재+ 피해자가 범인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시너지로 인해 가장 잔인하게 살해되었다.[8] 현재 동탄국제고등학교 후문 인근.[9] 범인이 저렇게 끔찍한 범죄를 수차례 이상씩 저질렀음에도 잡히지 않아 그로 인해서 몇 년 동안 가족이나 지인들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두려움을 떨어야 했고 밤에 길거리로 나가기 힘들었으며 특히 여학생은 범죄를 우려해서 아예 외지로 전학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또 수사도 살인의 추억에 나온 것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 초상권 개념도 미비하던 시절이다 보니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하면 실명 및 얼굴을 진범이든 범인이 아니었든 간에 그냥 막 공개하여 실제로는 별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용의자로 특정되었다가 아닌 것이 밝혀져 풀려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트라우마를 가지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여성은 여성대로 죽음의 공포를 마주봐야 했고 남성은 남성대로 경찰에게 얻어맞거나 용의자로 특정되어서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어 트라우마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화성이 개발되면서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되었지만 중년층 이상의 토박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나 다름없다.[10] 화성시로의 승격은 2001년에 이루어졌다.[11] 당시 북한의 김포공항 폭탄 테러와 서울 아시안 게임 때문에 경찰관들이 신경 쓰고 수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해당 살인 사건 소식에 대한 경찰과 국민들의 관심이 낮았다.[12] 한편 이날 이후 3차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10.28 건국대학교 항쟁, '북한이 금강산댐으로 물폭탄 수공 위협하려 한다'는 정부의 거짓 발표에 평화의댐을 짓기 위한 전국적 모금 운동, 조선일보에서 저지른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때문에 전국이 요란했다. 그래서 해당 살인 사건 소식에 대한 경찰과 국민들의 관심이 낮았다.[13] 이 겉옷이 빨간 투피스였는데 이 사실은 이후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노린다는 루머의 시작점이 되었다.[14] 당시에는 용의자[15] 이 곳은 버스정류장도 아니었는데 이춘재가 손을 흔들어서 버스를 잡아 탔다고 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탑승했기 때문에 버스 안내양이나 버스기사가 유심히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16] 해당 사건 이후 이 양의 모친은 여인숙을 운영하던 자신의 집이 사실상 당시 사건 조사를 하던 형사들의 숙소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며 딸인 이 양은 형사와 경찰들에 의해 조사를 받느라 심리적인 고충을 겪기도 했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17] 이때 경찰에게 범행이 발각되지 않은 건 등화관제 때문이다. 등화관제 시기엔 불빛을 모두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18] 실제 이춘재는 당시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의 '전기 부품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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