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7:36:12

유예도

파일:유예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유애다(柳愛多), 유애덕(柳愛德)
출생 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사망 1989년 3월 25일 (향년 92세)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관 고흥 유씨[1]
가족 큰아버지 유중권, 아버지 유중무
사촌 유우석, 유관순
아들 한필동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명은 '유애다(柳愛多)', '유애덕(柳愛德)'이다. 독립유공자이자 유중권의 동생인 유중무의 딸이며, 유우석·유관순 남매의 사촌 누나·언니이고,[2] 군인 한필동[3]의 어머니이다.

2. 생애

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무와 어머니 강릉 김씨(1873 ~ ?. 5. 12)[4]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14년 이화학당입학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기미독립선언서 선포식에 4촌 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여했고, 이어 일어난 3.1 운동에도 가담했다. 이후 3월 13일 고향 천안군 갈전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으로 내려와 유관순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동네 어른들을 설득해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에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조인원태극기와 함께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큰아버지 유중권, 큰어머니 이소제, 아버지 유중무, 4촌 동생 유관순,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김상헌(金尙憲), 김상훈(金相訓), 김상철(金相喆), 조병호(趙炳鎬), 이순구, 한동규(韓東奎) 등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여세를 몰아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군 헌병들이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주재소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큰아버지 유중권과 큰어머니 이소제 등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에 아버지 유중무가 큰아버지 유중권의 시신을 둘러 메고 주재소로 달려간 뒤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孟星鎬)[5]에게 "너희는 몇 십 년이나 보조원 노릇을 하겠느냐"며 일갈하는 등 유혈 진압에 대해 항거하다가 체포되었고, 이어 4촌 동생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가까스로 두안골에 있던 외가로 피신했고,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1919년 5월 2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불기소처분받았다. 이후 궐석재판에서 7년 6개월 형을 받았고, 일본 경찰이 외가로까지 수색해오자, 외숙부의 도움을 받아 충청북도 진천군을 거쳐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당시 청주감리교회 목사였던 한태유의 동생 한철유와 혼인했고, 은거 생활을 이어가다가 1934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도피생활로 인하여 유관순이 옥사한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8.15 광복 후 농촌계몽 지도원, 신탁통치 반대 운동 지도위원, 애국부인회 지방책임자 등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 때는 차남 한창동이 전사하는 참척을 겪기도 했다.

이후 홍성에서 살다가 1967년 사별 후 상경하여 오류동교회의 장로 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고척동[6]에 있는 20평 규모의 집에서 방 2개를 세 놓아 생활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간 장남 한필동이 한국에 있던 시절에 친구에게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어 1977년 3월에 집을 압류당했다.[7]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자 한필동의 동료들을 비롯하여 각계 각층에서 구호의 손길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이 소식이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전해졌다. 박정희는 금일봉을 하사함과 동시에 고척동 집을 되찾게 해주어 유예도는 옛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때,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원호처[8]로부터 지원을 일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원호처는 유예도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사했고, 1976년 8월에 부산지검에서 3.1운동 당시에 유예도가 기소중지되었던 기록이 발견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유예도는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광복회에 가입하여 원호금을 수령하였고, 같은 해에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이후 3.1 여성동지회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89년 3월 25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1] 검상공파(檢詳公派) 27세 '석(錫)'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남자형제 유경석(柳京錫)·유정석(柳丁錫)·유인석(柳寅錫)은 항렬자를 썼다. 유예도의 족보명은 '유애덕(柳愛德)'이다.(족보)[2] 즉, 유관순 위인전에서 언급되는 '애다 언니', '애덕 언니'가 바로 이 사람이다.[3]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반공포로 석방 사건 당시 마산 포로수용소의 경비대장이었다.[4] 김병일(金秉日)의 딸이다.[5] 이후 충청남도 도순사(道巡査)가 되었고, 1927년 12월 31일에 정근증서(精勤證書)를 수여받았다.[6] 현재 구로구.[7] 참고로 아들 한필동미국으로 같이 이민할 것을 권했으나, 유예도는 "고국에 뼈를 묻겠다."라면서 한국에 남았다.[8]국가보훈부.[9] 극중에서는 '애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