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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1:45:44

우란프로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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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발 과정3. 이후4. 실패 이유5. 기타6. 대체역사물에서의 성공7. 관련 문서

1. 개요

Uranprojekt

나치 독일핵개발 프로젝트. '우란프로옉트'는 우라늄(Uran)과 계획(Projekt)의 합성어다. 영어로 하면 '우라늄프로젝트'.

2. 개발 과정

1938년오토 한에 의해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자 과학자들은 "저 핵분열로 일어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무기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핵분열을 무기로 쓰일 수 있음을 알아채어 물리학자들을 초빙해 우란페어라인(Uranverein/우라늄 클럽)을 조직하고 핵분열의 무기화, 무기이용 가능성을 연구해 왔지만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이들을 군에 동원하는 바람에 계획은 그대로 중단되었다.

그렇게 일시중단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에 다시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당시 독일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들을 다시 모아서 핵무기 개발을 요청한다.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1]에서 우란프로옉트의 일환으로 원자로 연구와 핵무기의 제조가능 여부에 대해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과 같은 과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6월 4일 나치 수뇌부, 지도부의 앞에서 원자력의 군사적 의미를 밝힐 때 그들은 핵무기 제조를 위해 우라늄 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해서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나도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지만 그 자리에서 그들이 연구 중에 발견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4천 톤의 우라늄 광석을 채굴했고[2], 점령한 노르웨이에 수력발전소에서 추출하는 중수 탱크도 있었지만 이 중수탱크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미영 연합군 특공대를 보내서 폭파했으며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하는 바람에 연구에 큰 차질이 생겼다.베르모크 수력발전소, 중수공장 폭파작전

독일 과학자들은 감속재로 중수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는 흑연도 사용할 수 있었으나 흑연은 일부 과학자들의 잘못된 실험 결과 때문에 조기에 배제되었다. 이는 매우 큰 실수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서는 흑연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3] 독일이 중수를 고집한다는 사실을 첩보를 통해서 알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나치가 들어선 후 핵물리학을 연구하던 많은 유대계 학자들이 학계에서 강제추방되었고 결과적으로 핵개발을 할 수 있는 인력풀이 매우 빈약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190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필리프 레나르트유대인의 학문인 핵물리학 따윌 대체 어떻게 믿느냐는 황당한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순수 독일 물리학자 중에서는 핵개발을 할 인재 자체가 부족했다.

심지어 핵물리학 연구의 기본 장비인 사이클로트론조차도 없었는데 1942년에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세계 최대급의 사이클로트론 건설예산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연구팀은 오히려 아직은 제대로 만들 수도 없을 테니 제발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자며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종전 때까지 나치 독일이 사용할 수 있었던 사이클로트론은 프랑스 점령지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이델베르크 대학 단 1개뿐이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비효율적인 반응로 설계문제였다. 이 반응로는 하이젠베르크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이 설계도를 고의로 연합국에 노출시킴으로서 독일의 핵개발 계획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반응로가 매우 비효율적이라서 임계상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보다는 독일이 핵에너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우려로 고평가되었다.[4]

그 결과 독일이 벨기에에서 손에 넣었던 천연우라늄 및 광석 전량이 처음 독일 손에 들어갔을 때 상태 그대로 미국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5]로 독일은 핵무기 또는 핵에너지 개발에 기초적인 접근조차도 달성하질 못했다. 여기에 독일의 핵무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영국의 특수작전으로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수를 수 톤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등 외부적인 요인 덕분에 설사 전폭적인 지원과 독일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고 해도 실제 역사에서 진행된 수준 이상의 연구 성과는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링크 핵개발에 들어갈 당시 전황이 독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핵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대다수의 연구진들이 실험이나 엔지니어링에는 무지(혹은 무관심)한 이론물리학자들이었다. 심지어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로[6]의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 등의 독일 과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연구를 사보타주했다는 의혹이 있다. 오토 한처럼 명백히 강제로 끌려와서 연구에 참여하는 바람에 사보타주를 행한 사람들도 있었고 연구의 총책임자였던 하이젠베르크도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구에 열의를 갖지도 않았다. 이는 1992년 영국이 보관중이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팜홀에서 포로로 억류되었던 독일 과학자들이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공식적으로도 확인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후의 인터뷰에서 원자로 연구비용을 타먹으면서 핵무기 개발에는 기술상이나 비용상의 이유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끌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핵무기에 너무 관심을 갖지 않도록 보고도 되도록 늦게 사소한 방식으로 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핵개발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치 독일의 핵무기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과학사 학자들도 있었다. 해당 녹취록은 도청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중요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감청과 도청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청을 알고 일부러 연기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7] 닐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독소전쟁을 찬양하며 핵무기 연구와 그 위력을 상세히 말해서 분노한 적도 있다. 다만 보어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서 게슈타포의 집중감시를 받았고 도청까지 당하고 있던 터라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에 우호적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기밀인 핵무기 연구를 굳이 발설한 것 자체도 연합국에 고의로 정보를 발설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에서 해당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보어가 게슈타포에게 감시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피하면서 핵 개발의 진행과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며 보어가 자신에게 나치에 적극 협력한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 서운함을 표하고 있다. 그는 전후 네이처 지에 기고한 독일의 핵개발 역사 관련기사에서 우리는 폭탄을 만들 능력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능력 부족과 사보타주 모두 사실일 수도 있다. 은밀히 사보타주를 감행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면 원자폭탄 개발에 어떤 난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난관을 돌파할 능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둘 다 반반 사실로 인정한다.

우란프로옉트는 패망 직전까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결국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3. 이후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의 우라늄 원자로는 하이거로흐(Haigerloch)로 옮겨졌고 알소스 미션(Alsos mission)으로 해체되었다

4. 실패 이유

우란프로옉트가 실패한 이유[8]는 우선 핵심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실험과는 거리가 있는 이론 물리학자라서 대규모 실험이 병행되어야 하는 핵개발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치는 당시 독일 물리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저명한 유대계 물리학자들을 대거 탄압하여 자기 손으로 핵심 인력들을 미국으로 유출시켜 버리는 더 큰 실수를 범했다.[9] 이렇게 미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인 엔리코 페르미[10]만 해도 이론과 실험 모두 가능[11]하여 맨해튼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12] 게다가 뛰어난 과학자 수십 명 몫을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인 반신(半神, Demigod) 존 폰 노이만[13]도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을 정도니 인력풀에 있어서 이미 나치는 미국과 게임이 전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핵개발을 할 수 있는 핵심 과학자의 절대적인 부족과 아울러 나치 독일은 전쟁 막바지에 핵개발에 쏟을 수 있는 여러가지 자원 수급도 매우 열악했다. 핵개발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자원이 필요하다. 핵물질만이 아니라 도시 하나가 쓸 수 있는 급의 엄청난 전기도 소모된다. 패전 직전 수세에 몰리던 나치는 이를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 자체는 전쟁과 동떨어진 상태였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을 수 있는 여력이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재와 자원의 열악함 때문에 나치 독일이 핵개발을 전력으로 밀어붙였다고 해도 미국보다 먼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도 독일이 먼저 핵을 개발하면 연합국 측이 크게 밀릴 것임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독일은 핵무기개발에서 거의 진행된 것이 없었고 맨해튼 계획에서 개발된 핵무기는 일본 제국히로시마나가사키각각 차례대로 투하되었다.

나치 독일이 무너지고 나서 세워진 서독은 프랑스 측에게 비밀리에 핵개발협력을 제안 받은 바가 있지만 프랑스에서 샤를 드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결국 끝내 무산되었다.

2024년 들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이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러시아 위협론이 대두되고 강경 자국우선주의자이자 고립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올라가면서[14] 나토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독일 정치인들 사이에서 독일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6. 대체역사물에서의 성공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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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스 플랑크 연구소.[2] 벨기에령 콩고의 신콜로브웨(Shinkolobwe) 광산[3] 이 계획으로 제작된 세계 최초의 원자로 '시카고 파일-1'도 감속재가 흑연이었다.[4] 이 문제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핵개발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연합국에 알리려고 했다가 역효과만 부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5] 핵물질은 천연 상태에서 고순도로 정제를 해야만 사용 가능하다.[6] 핵반응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계산하려면 원자로가 반드시 필요하다.[7] 2차 대전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연합국도 서로 포로가 될 경우 도청이나 전향자를 활용하여 정보를 캐낼 가능성에 대해서 교육했기 때문에 당연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8] 과학자들의 사보타주설 등을 다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9] 나치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이렇게 할 수 밖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독일 대학가에서도 반유대주의는 팽배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나치에 동조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10]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1942년에 개발했다.[11] 그래서 페르미를 만능 물리학자라고도 한다. 현재까지도 페르미만큼 이론과 실험 모두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물리학자는 거의 없을 정도다.[12] 정작 페르미는 이탈리아인이고 유대인이 아니지만 부인이 유대인이라서 미국으로 망명한 경우다. 페르미가 핵개발에서 한 엄청난 역할을 생각할 때 그의 망명은 나치에게는 핵심적인 전력 손실.[13] 핵무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품인 폭축 렌즈를 개발하고 각종 수치 계산을 전담했다.[14] 결국 당선되어 재집권하였다.[15] 애초에 수소폭탄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묘사되며, 히틀러가 평행세계(현실)의 수소폭탄 실험 영상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