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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4:10:52

왕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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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


王希
생몰년 미상.

1. 개요2. 생애3. 후사4. 기타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 개성 왕씨 후손을 자칭하며 숭의전에서 고려 왕조에 제사를 지낸 인물. 본관은 전주 왕씨(全州 王氏). 자는 성무(聖務).

2. 생애

아버지 왕귀손(王貴孫)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유공(金有恭)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사족 무반 출신이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한량으로 정로위(定虜衛)에 속했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충청도 신창현(현 충청남도 아산시)의 유향소(留鄕所)에 속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신창현에서는 유력 인사였다.

1540년(중종 35) 고려의 봉사손 왕적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고려 왕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맡은 왕씨 봉사손은 조선 왕조로부터 관직, 경기도 마전군의 농지와 노비를 제공받는데, 왕희가 본관을 고쳐가며 개성 왕씨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이러한 혜택 때문이었을 것이다.

봉사손 후보 중 아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1] 왕희는 후계자로 낙점됐고, 종6품 숭의전감에 오른다. 왕희는 1588년(선조 21) 왕훈이 왕희의 본관 조작을 밝히기 전까지 49년간을 개성 왕씨로 살았다. 육조의 해당 부처에서 왕씨 호적을 분석한 결과 왕희의 관향 사칭 정황이 드러났고, 왕희는 관작을 삭탈당했다. 이후의 삶은 알 수 없다.

3. 후사

결국 왕적때처럼 봉사자 후보를 또 새로 정해야 했고, 선조는 1589년(선조 22) 7월 4일 의정부에서 정승, 판의정부사 등과 논의했다. 이 문제는 예조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좌의정, 판의정부사)이 많았는데, 선조는 대수가 가깝고 자손이 많은 자로 정해야 한다는 영의정 류전(柳琠)의 의견을 따라 5명의 후보를 2명으로 추렸다.# 다음은 실록에서 언급된 후보의 목록이다.

이튿날인 7월 5일 재차 논의가 있었다. 선조는 승정원에 시켜 왕훈의 노망 여부를 물어보도록 했고, 백발이긴 했지만 말에 어긋난 것이 없다는 승정원의 회신을 듣고 최종 후보 중 왕훈이 마침내 낙점됐다.#

4. 기타



[1] 슬하에 장남 왕원보(王元輔), 차남 왕원필(王元弼), 3남 왕원익(王元翊), 4남 왕원우(王元佑), 5남 왕원(王元) 등 5형제를 두었다.[2] 족보상 왕희걸(王希傑)의 5촌 종질(從姪)이다. 왕희걸의 아버지 왕무(王懋)의 큰형 왕서(王恕)의 아들 왕희량(王希亮)의 아들이다.[3] 유금필의 딸이다.[4] 족보상 왕희걸(王希傑)의 7촌 재종질(再從姪)이며, 아래의 왕훈과는 8촌 삼종형제(三從兄弟) 사이로, 왕희걸의 조부 왕종의(王宗義)와 왕훈의 증조부 왕종례(王宗禮), 왕휘의 증조부 왕종신(王宗信) 등 세 사람은 친형제간이다. 그런데 왕종의는 왕지덕(王地德)의 차남, 왕종례는 3남, 왕종신은 5남이므로 사실 왕희걸이 계보상으로는 이 셋 중 적통에 가장 가깝다.[5] 슬하에 장남 왕홍두(王弘斗)와 서자 왕홍서(王弘緖), 왕홍기(王弘器)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왕홍서와 왕홍기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6] 마찬가지로 족보상 왕희걸(王希傑)의 7촌 재종질(再從姪)이고, 위의 왕휘와는 8촌 삼종형제간이다.[7] 슬하에 장남 왕유경(王有慶), 차남 왕중경(王重慶), 3남 왕준경(王俊慶), 4남 왕우경(王遇慶), 5남 왕수경(王守慶), 6남 왕인경(王仁慶), 7남 왕득경(王得慶) 등 7형제를 두었다.[8] 정확히는, 안경공부터 왕희까지 독자로만 이어지다 왕희의 아들 대에 비로소 파가 갈라진다. 다시 말해 안경공파는 모두 왕희의 후손이다. 이는 왕희 또는 왕희의 후손이 후사가 끊긴 고려의 왕족의 후손으로 편입을 했다는 것을 의심케 한다.[9] 왕훈에 의해 전주 왕씨라는 것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영녕공 왕준의 후손으로 기록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