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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09 20:52:27

왕적(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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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


王績
? ~ 1540년(중종 35)

1. 개요2. 생애3. 후사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의 인물. 왕순례의 서손자이고 왕천계(王千繼)의 아들이다. 숭의전감으로 마전(麻田)에서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2. 생애

왕적은 선조들의 뒤를 이어 경기도 마전군의 숭의전에서 봉사했다. 박수문(朴守紋)이 경기도사(京畿道使)를 지내던 시기[1] 마전을 찾았는데 마을이 쇠잔하고 인구가 줄어있었다. 왕적은 박수문에게 원래 30명이던 노비가 대부분 죽었으니 제사에 심부름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1540년(중종 35)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3. 후사

왕적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많은 왕씨들이 왕적의 뒤를 이어 봉사하려고 했다. 봉사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왕씨 모두가 천얼이었는데, 숭의전감은 문관직을 겸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천첩 소생인 얼자를 뽑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충렬왕의 13대손이라는 유생 왕인위(王仁偉)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세파(世派)의 근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봉사자로 정하기에는 애매했다.

예조판서 정옥형은 제사를 주관할 왕씨의 적파를 따로 정해 뽑을 것을 중종에게 아뢰었고, 이듬해까지 봉사자 후보는 다섯 명으로 좁혀졌다. 중종은 최종 후보를 가리기 위해 ① 한양 거주자, ② 아들 있음을 부가 조건으로 세웠다. 근거는 먼 지방에 살면서 경기도 마전군으로 왕래하게 되면 제사에만 힘쓰기가 힘들고, 아들이 없으면 왕적의 경우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조에서는 숭의전 봉사자는 마전에 거주해야 하고 지방이든 한양이든 왕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왕희로 후사를 삼는 것이 합당하다는 글이 특별히 중종에게 올라간 바 있었다. 따라서 비록 거주지가 한양은 아니지만 조건 ②에 가장 알맞는 왕희가 왕적의 뒤를 잇는 봉사자에 낙점됐다.#
[1] 박수문이 급제한 것이 중종 2년이고 마전의 실상을 중종에게 아뢴 것은 중종 11년이다. 박수문은 중종 6년부터 삼사에서 관직을 지내므로 경기도사 부임 시기는 중종 초일 것이다.[2] 슬하에 장남 왕원보(王元輔), 차남 왕원필(王元弼), 3남 왕원익(王元翊), 4남 왕원우(王元佑), 5남 왕원(王元) 등 5형제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