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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10:36:56

올가 코르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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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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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colbgcolor=#131230> 이름 올가 발렌티노브나 코르부트
О́льга Валенти́новна Ко́рбут[1]
Olga Valentinovna Korbut
국적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1955~1991)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1991~)
출생 1955년 5월 16일
소련 벨로루시 SSR 흐로드나
신체 152cm, 39kg[2]
종목 기계체조
주종목 이단평행봉, 평균대
은퇴 1978년
가족 배우자 레오니드 보트케비치(1978-2000),
아들 리차드 보트케비치, 4녀 중 넷째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5. 수상 기록6. 기타
6.1. 흑역사6.2.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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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라루스미국의 前 기계체조 선수이다.

2. 생애

엔지니어 겸 요리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았지만 운동에는 소질이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아이들, 심지어는 또래의 남자 아이들보다도 달리기가 빨랐다. 8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조를 시작하여 3년 뒤 벨라루스에 있는 스포츠 학교에 입학했다.

3. 선수 경력

3.1. 입문

입학한 뒤 그녀의 첫번째 코치는 1964 도쿄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였던 옐레나 볼체츠카야였지만, 1년 뒤 레날드 크니쉬의 그룹으로 옮겼다. 크니쉬 코치는 처음에 코르부트의 게으름과 변덕스러운 성격을 발견했지만 곧 그녀의 재능, 유별나게 유연한 척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는 연기와 잠재력을 발견했고 코르부트는 그와 함께 하면서 평균대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초고난도의 기술을 배웠다.

1969년 14살의 나이로 처음 참가한 소련선수권에서 5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70년 열린 같은 대회에 참가해 도마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부상으로 인해 1972 뮌헨 올림픽 전에 많은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3.2. 1972 뮌헨 올림픽

부상이 아문 뒤 17살의 나이로 처음 참가한 올림픽에서 수준급의 체조 실력과 묘기를 선보였다. 평균대, 마루, 단체 종합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3관왕을 하고, 이단평행봉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특히 평균대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기술은 그녀가 최초로 선보여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4년 후 나디아 코마네치에 해당하는 체조요정이 되었던 셈이다.[3]

개인종합까지는 다 잘했는데, 이단평행봉 경기에서 시작부터 발이 땅에 걸려 삐그덕대더니 끝날 때까지 이런 큰 실수를 3번이나 해버렸고 이 경기로 1위에서 7위까지 추락해 메달이 날라갔다. 결국 개인종합 금메달은 동료인 루드밀라 투리스체바에게 돌아갔고[4], 본인도 많이 속상했는지 평행봉 경기가 끝난 뒤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또한 그녀가 이단평행봉에서 받은 은메달은 아직까지 체조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바로 그녀가 선보인 코르부트 플립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이단평행봉에서 뒤로 도는 기술을 아무도 선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봐도 고난도 기술이다. 한마디로 극강의 초고난도 기술이었으며 역동적이고 획기적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바로 다음 해에 국제 체조 연맹에서 '너무 많은 선수들이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는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금지시켰을 정도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코르부트는 그런 기술을 조금의 흠도 없이 완벽하게 경기했다. 당연히 모두가 '당연히 금메달이겠거니'라고 생각했지만, 점수판에 점수가 발표된 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벽한 초고난도 연기를 펼쳤는데도 9.8점[5]이 나와 그 전에 경기한 9.9점을 받은 동독의 카린 얀츠에 밀려 은메달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관중들은 심판을 향해 야유를 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그대로 얀츠가 금메달, 코르부트가 은메달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기술을 완벽히 연기한 것치고 너무 점수가 낮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왜 올가 코르부트가 최초의 체조 만점자가 아닌지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들도 많다.

전후사정을 알면 판정 이유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판정으로 금메달을 가져간 카린 얀츠는 사실 올림픽에서 편파 판정의 피해를 많이 본 선수였다. 직전 올림픽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에게 침공을 당했다. 그에 대한 동정표였는지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라 차슬라프스카가 이 대회에서 상당히 후한 판정을 받는데, 덕분에 얀츠는 이단평행봉 금메달을 억울하게 뺏겼다. 그리고 이 72년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지는데, 체조 경기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메달인 개인종합은 내용상 타마라 라자코비치와 카린 얀츠의 양자 대결이었는데, 엉뚱하게 코르부트의 팀동료 류드밀라 투리셰바가 가져 가면서 얀츠는 또 판정으로 금메달을 뺏긴 모양새가 됐다. 이단평행봉 경기 판정 시점에서 '어제' 벌어진 일이었다. 이쯤되면 심판진들도 동독과 얀츠에 대한 심적 부채감이 있었을 것이다. 보상 차원에서, 소련 선수인 코르부트의 점수를 고의로 낮게 줌으로써 얀츠가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을 가져갈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심판진 내 합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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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종합 메달은 놓쳤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그리고 파격적인 기술과 깜찍한 외모, 매력적인 웃음 등으로 뮌헨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으며, ‘뮌헨의 달링’ 이라 불리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인기를 증명하듯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과 만나기도 했다. 같은 해에 AP통신에서 발표한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됐다.

3.3.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소련 체조 코치들과 관계자들은 루마니아 출신의 체조 천재 나디아 코마네치를 이길 수 있는 선수로 코르부트를 지목했지만 부상 탓에 막상 경기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36년이나 지난 2012년에 했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원래 본인은 1976년에 올림픽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소련의 에이스인 그녀가 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억지로 나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72 뮌헨 올림픽 이후 소련의 친선대사로 발탁돼 세계 각국을 다니느라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춘기가 지나갈 시기여서 몸이 바뀌는 것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준비도 되지 않았고 몸도 너무 피곤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올림픽에서는 자신이 1972년 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시도한 코르부트 플립을 실패하며 노메달에 그쳤다.[6] 그래도 앞선 대회 챔피언의 명성에 어울리게 단체전에서 금메달, 평균대에서는 나디아 코마네치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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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성적을 거두었지만 코마네치뿐 아니라 동료인 넬리 킴[7]에게까지 그늘이 가려져 1976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4. 은퇴 이후

1977년, 그로드노 주립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됨과 동시에 체육계에서 은퇴한다고 밝혔고, 같은 해 벨라루스의 포크록밴드인 Pesniary의 멤버 레오니드 보트크비치와 결혼하여 다음 해에 아들 리차드를 낳았다.

1988년, 남녀 체조선수를 모두 통틀어 최초로 체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참고로 두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나디아 코마네치다.

1991년,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거주하던 그녀는 300km 가량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방사능의 여파가 민스크까지 퍼져 갑상선 기능에 손상을 입었다. 이후 곧 바로 미국 애틀랜타로 이주해 코치 생활을 이어나갔다.

2002년, 그녀는 애리조나 주의 스코츠데일로 이주해 스코츠데일의 체조와 치어리딩 등에서 수석 코치를 맡았다. 2017년부터는 개인 신분으로 체조 코치를 맡고 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colcolor=#000> 금메달 1972 뮌헨 단체전
금메달 1972 뮌헨 마루
금메달 1972 뮌헨 평균대
금메달 1976 몬트리올 단체전
은메달 1972 뮌헨 이단평행봉
은메달 1976 몬트리올 평균대
세계선수권
금메달 1974 바르나 단체전
금메달 1974 바르나 도마
은메달 1974 바르나 개인종합
은메달 1974 바르나 마루
은메달 1974 바르나 이단평행봉
은메달 1974 바르나 평균대
유럽선수권
은메달 1973 런던 개인종합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73 모스크바 단체전
금메달 1973 모스크바 개인종합
금메달 1973 모스크바 마루
금메달 1973 모스크바 이단평행봉
금메달 1973 모스크바 평균대
동메달 1973 모스크바 도마

6. 기타

6.1. 흑역사

1991년 이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커진 불안감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갔고, 대표적인 벨라루스계 미국인으로 꼽힌다.

2002년 조지아 주의 한 식료품점에서 치즈, 초콜릿 시럽, 무화과, 조미료 등 19달러 어치의 음식을 훔치다가 기소된 적이 있다.

코르부트의 말로는 차에 지갑을 놓고 내려 차 문까지 카트를 몰고 지갑을 챙긴 다음 다시 가게로 끌고 가서 계산을 하려고 했다고 해명했는데, 마트의 보안관이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핸드백에 진열돼있는 음식을 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고, 결국 600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또한 2006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를 일으켰다가 머그샷을 찍는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코르부트의 흑역사는 아니지만 셋이 살던 집에서 코르부트와 그녀의 남편만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아들 리차드는 계속 그 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절도 죄를 수사하는 중 마침 리차드가 살고 있던 집에서 3만 파운드(한화 약 3369만 원) 가량의 위조 지폐가 발견돼 리차드가 기소된 적이 있다.

2017년 생활고를 이유로 올림픽 메달과 경기복을 경매에 내놓았다. 본인은 이 돈으로 평생 소원인 텃밭에서 식물을 키우며 살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말은 이렇게 해놓고는 실제로는 콘도(고급 아파트)를 샀다.

6.2. 폭로

1999년, 은퇴한지 한참이 지난 코르부트가 자신이 15살이던 1972년부터 소련 대표팀 코치였던 레날드 크니쉬의 협박에 강제적으로 그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했다. 그 짓은 크니쉬가 다른 선수를 새로운 섹스파트너로 삼을 때까지 수년 간 반복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주장 후 올가 코르부트는 러시아에서 관종 취급을 당했다. 2018년에 여러명의 구소련 출신 체조선수들이 해당 코치에 대해 올가 코르부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동일 증언을 하였다.


[1] 벨라루스어로 '볼하 발랸치나우나 코르부트(Во́льга Валянці́наўна Ко́рбут)'.[2] 현역 시절[3] 코르부트 플립을 국제무대에 처음 선보인 건 71년 유럽선수권에서였던 것 같다. 미국의 체조잡지에 "시범 경기에 나온 어느 어린 러시아 여자아이가 상단봉에 올라서서 뒤로 플립을 한 후 상단봉을 잡고 하단봉에 몸을 말아 돌렸다"라고 코르부트 플립을 본 것을 인상깊게 묘사하고 있다.[4] 투리스체바는 코르부트가 실수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기뻐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팀동료의 실수에 저렇게 내놓고 좋아하는지 당황해 했다. 이후에도 투리셰바는 수십 년에 걸쳐 올가 코르부트에 대한 지속적인 적의를 보였다.[5] 10점이 만점이며, 현재는 만점제도가 폐지되었다.[6] 정확히 말하면 코르부트 플립 자체는 성공했다. 그러나 뒤공중돌기 이후에 바로 이어진 하단봉에 몸을 말고 다시 상단봉을 잡는 동작에서 상단봉을 잡지 못해 실패한 것이다.[7] 최초로 마루와 도마에서 만점을 받았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한, 코마네치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체조 선수였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