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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8:16:04

오스카 로메로

파일:external/2.bp.blogspot.com/SuperMartyrio-2.5.jpg
본명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이 갈다메스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출생지 엘살바도르 시우다드바리오스
사망지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생몰년도 1917년 8월 15일 ~ 1980년 3월 24일 (향년 62세)
시복 2015년 5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리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1]
시성 2018년 10월 14일, 교황 프란치스코
축일 3월 24일

1. 개요2. 생애3. 시복 및 시성 과정
3.1. 시복3.2. 시성
4. 평가: 해방신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5. 미디어믹스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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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메로 대주교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 그의 순교 40주기인 2020년에 공개되었다.)
나는 지금도 살해 위협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들 속에서 되살아날 것입니다. 주교 한 사람은 죽겠지만, 하느님의 교회와 그 백성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 로메로 대주교가 피살당하기 2주 전, 멕시코 신문사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그의 실질적인 유언으로 평가받는다.

가톨릭 성직자이자 성인으로 엘살바도르대주교.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2. 생애

<가톨릭신문>에 실린 로메로 대주교의 일생 정리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병약했고 학교도 12살 때까지만 다녔다고 한다. 이후에는 목수 일을 배우는 등 노동자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유럽에 유학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오랫동안 사목했고, 알콜 중독자의 재활을 지원하는 등 일반적인 사제의 길을 걸었다.

원래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1977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교구장 겸 대주교가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 측에서 환영했을 정도로 사회정의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사제이며 친구로 농민운동을 하던 복자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 독재운동에 가담하였다.[2]

이후 1979년 쿠데타로 들어선 엘살바도르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빈곤층을 돕고 인권침해를 고발했다. 그러다 1980년 프로비덴시아 병원 경당에서 미사 김사 기도 중 무장괴한 4명에게 저격을 받아 암살당했다.피격 직후 사진(노약자 클릭 주의) 당시 독재정부가 그의 죽음에 개입했으며, 사후 30년이 지나 2009년에야 엘살바도르 정부가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정도 가능했다.

장례식장에 신자들 25만 명이 운집했는데 폭탄 테러와 총격전이 벌어져 40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주교[3]가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엘살바도르 천주교회 사상 첫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1992년 엘살바도르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추기경이 된 2017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3. 시복 및 시성 과정

3.1.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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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한 오스카 로메로의 시복 미사, 2015년 5월 23일
20세기순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성공회)에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때 '하느님의 종'[4]으로 인정되었으나 그가 종교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죽었다는 점을 이유를 내세운 교황청 내의 반대 의견 때문에 절차가 지지부진했는데,[5]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지 6주만에 시성 절차가 재개되었다.[6] 기사

그리하여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다.[7] 마침내 2015년 5월 23일 시복식거행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살바도르 델 문도 광장에서 거행된 이번 시복 미사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했으며, 3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을 기념했다. 축일은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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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이전에 그려진 이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설치된 20세기의 순교자 10인 조각상
교황청에서 정식 시성을 하기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 일부에서는 그를 아메리카 대륙과 엘살바도르의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에게 헌정된 교회와 교구, 이콘도 있다. 가톨릭 사제였지만 성공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의 타 계열 분파에서도 존경받으며 그가 암살당했을 때는 전세계에서 추도객들이 찾아왔다.

3.2. 시성

2018년 3월 7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교황 바오로 6세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기적을 인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

2018년 10월 14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교황 바오로 6세 등 동료 성인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4. 평가: 해방신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로메로 주교가 처음부터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전통주의자였고,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그리스도인으로 인권을 옹호했을 뿐, 해방신학과는 거리가 있던 보수적인 주교였다. 일례로,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의 오류를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임무를 맡은 오푸스 데이의 성 십자가 사제회와 교류하며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날 아침에도 오푸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 집전 중에 피격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 후에 그를 해방신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오스카 로메로가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수용한 해방신학의 이론가거나 운동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순교 이후 그의 강론은 당시 라틴아메리카 예수회를 중심으로 퍼져있던 해방신학의 이야기와 일정 부분 공통점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민중과 함께하는 적극적 모습으로의 극적 변화 역시 그를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해방신학의 내용을 떠나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를 엘살바도르와 라틴아메리카의 저항의 성인으로 만든 것. 해방신학과 그를 따른 성직자들이 성인에게 끼친 영향은 과장되지도 과소평가되지도 않아야 한다.

어쨌든 진작에 시성이 되어야 했지만,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할까 우려한 교황청에서 이를 늦춘 것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스카 로메로의 시성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보수건 진보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것은 장려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탄압한 남유럽(예: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의 군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20세기 천주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프랑코 정권 문제는, 스페인 극좌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교회 탄압과 학살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이다.

다만 해방신학의 문제를 떠나 오스카 로메로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순교'란 탄압 앞에 하느님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는 것인데 여기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있으면 복잡해진다. 우리가 아는 순교는 대부분 법적, 정치적으로 믿음을 막는 세력에 의한 죽음이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가 점차 늘어나는 가운데(심지어 북한 조차도)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복잡해진 것. 오스카 로메로의 시성으로 이제 이런 작업의 첫발을 뗀 것.

5. 미디어믹스

로메로 대주교에 관한 서적으로는 그의 시복을 앞둔 2014년 미국의 가톨릭계 언론인 케빈 클라크가 쓴 전기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그가 시성된 2018년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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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만들어진 미국 영화 <로메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배급하고 주인공인 로메로 역은 영화배우 라울 줄리아가 맡았다.[8] 실제 인물과 닮은 모습과 함께 배우의 열연까지 더해진 덕분에 '대부분이 알지 못했던 참상'을 호소력 깊게 알리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 그 외 엘살바도르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살바도르>에서도 그의 암살을 엘살바도르 내전의 발발 계기가 된 주요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마침 한국에서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여서 곧바로 개봉할수 있었다. 70~80년대 군부를 비난한 고발영화들이 개봉금지 처리되었다가 88~89년 지옥의 묵시록, , 계엄령, Z, 찰리 채플린 영화들이 개봉하던 추세에 발맞춰 최신작으로 개봉할 수 있었던 것. 영화감독 하명중이 운영하던 하명중 영화 제작소에서 수입하여 1989년 8월 12일 개봉해 서울관객 23만명으로 당시 기준으로 꽤 성공했다. 정작 영화는 350만 달러 저예산 영화였으나, 북미 흥행이 120만 달러에 그치는 실패를 거둔 거랑 달리 한국에서 더 성공한 셈이다.

한국 개봉 당시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의 야권 정치인들이 극장을 직접 방문해서 관람하였는데,[9] 이를 두고 정치적인 논쟁 거리가 되기도 했다.

6. 기타



[1]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다.[2]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에 대해 2020년 2월 바티칸에서 시복을 결정했고, 그는 2021년 1월 22일 동료 순교자 3인과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3] 1942년생, 산살바도르 대교구 보좌주교(1982~2022). 교구장 주교를 제치고 보좌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된 것이 이례적으로 보이나, 추기경 인선 당시 차베스 주교가 한 교구의 보좌주교로만 무려 35년을 지냈다는 점이 크게 반영되었다.[4] 성인에 이르는 단계 중 하나. 그 위로는 가경자, 복자, 성인 순으로 이어진다.[5] 특히 베네딕토 16세는 라칭거 추기경 시절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써 해방신학을 적극적으로 반박한 적이 있다. 이러다 보니 해방신학과 얽힌 문제가 진척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6]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와 같은 중남미(보다 정확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며, 역시 엘살바도르 이상으로 잔혹한 군부 독재를 경험했다. 이 점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시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시키는 데 공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7] 순교자가 아닌 사람이 시복되려면 기적의 사례가 인정되어야 하지만 순교자가 시복될 때는 기적 심사가 면제되기 때문이다.[8] 괴기시트콤 아담스 패밀리 영화의 가장 역으로 제일 잘 알려진 배우이다.[9] 특히 김대중은 본인이 천주교 신자(세례명 토머스 모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