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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6:36:13

우광신

오광신에서 넘어옴
파일:오광신.jpg
중화민국 14대 육군총장
정체 吳光新
간체 吴光新
한국식 독음 오광신
영문 Wu Guangxin
자당(自堂), 식당(植堂)
출생 1875년[1]
청나라 안휘성 합비
사망 1939년 11월 15일 (향년 64세)
영국령 홍콩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안직전쟁에서 2차 직봉전쟁2.3. 말년과 죽음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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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의 주요 인물로 쉬수정, 푸량쭤, 진윈펑과 함께 안휘파 4대 금강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5년 안휘성 합비에서 태어났다.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16기 포병과에 입학하여 1904년 졸업했으며[2][3] 1910년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북양 3진 포병관대(管帶)를 지냈으며 1914년 제20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와 동향사람임과 더불어 처남이라 돤치루이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돤치루이와 부자결의를 맺고 돤치루이를 아버지로 모셨다. 1917년 8월, 펑궈장직예군벌과 대치하려는 돤치루이의 의도에 따라[4] 장강상류경비사령(長江上遊總司令)에 임명되었고[5] 호법전쟁 도중 사천사판사(四川查辦使)에 임명되어 충칭에 진주, 잠시 사천을 지배하였으나 12월에 웅극무가 봉기하고 탕지야오가 점건천 3군 회의를 열어 정국군을 조직하면서 포위되어 무장해제당했다.

2.2. 안직전쟁에서 2차 직봉전쟁

1920년 장강상류총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우페이푸쉬수정취퉁펑의 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북상하자 2월 23일에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자오티를 대신하여 하남독군에 임명되어 우페이푸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7년이나 하남을 지배하던 하남독군 자오티가 강력하게 저항하는 통에 하남독군 교체 파동이 일어났다. 자오티는 군대를 집결시켜 오광신의 군대에 대한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한편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에 가입했다. 돤치루이를 견제하고자 했던 차오쿤우페이푸는 무력을 써서라도 오광신의 하남독군 임명을 저지할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여기에 하남인들이 오광신이 그저 안휘군벌의 이익을 위해 하남의 민생을 방기할 것이라 여겨 오광신의 취임에 맹렬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1920년 2월 26일 오광신의 하남독군 임명안이 각의에서 통과되었음에도 대총통 쉬스창은 왕인천을 하남성장에 임명하는 것만 재가하고 오광신 임명안에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돤치루이는 화가 나 국무총리 진윈펑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별수가 없던 진윈펑은 2월 27일 하야하였다.[6] 이후 돤치루이도 양보하여 오광신의 병력을 호북으로 회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20년 안직전쟁이 벌어지자 호북독군 왕잔위안과 싸우다가 장징야오와 함께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의 휘하 병력들은 패잔병이 되어 유랑하다가 대부분 토비가 되었다. 1921년 석방된 이후 봉천군벌에 몸을 의탁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때 봉군 6군단 부군장으로 참전했다. 베이징에 입성할 때 무려 4개 혼성여단을 추가로 신설하여 리징린과 함께 7만의 대군을 거느렸다.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의 하야에 공을 세운 펑위샹, 손악, 호경익 등과 충돌을 빚었는데 리징린, 양위팅, 장쉐량, 장쭝창, 량훙즈 등과 회담을 하던 중 갑자기 손악을 욕하기도 했다.
"손악은 공산당원이다! 우리 모두 그 사람 조심해야 한다!"

이에 펑위샹이 농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손악 형을 높게 보시는군. 손악 선생은 매일 커다란 시가를 두개나 피우는데 이러한 공산당원 말인가?"

펑위샹의 재치로 오광신의 도발에도 웃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의 연합은 이런 식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924년 11월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자 육군총장, 육군훈련총감에 임명되었다. 1924년 11월 톈진회의에 참가해 2차 직봉전쟁 이후의 중국의 정세에 관해 논했고 1924년 12월의 톈진회의를 통해 강소독군 치셰위안 토벌을 논의했고 1925년 5.30 사건이 일어나자 남방에 파견되어 처리를 맡았는데 이때 쑨촨팡을 절강독판에 임명하여 남방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지만 신임 강소독판 양위팅의 안하무인의 행패와 봉천군벌의 지나친 확장에 불만을 품은 쑨촨팡이 1925년 손봉전쟁을 일으키면서 나가리되었다.

2.3. 말년과 죽음

1926년 3.18 시위 이후 펑위샹의 압력으로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붕괴하면서 동반하야했다. 이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밀린 쑨촨팡의 주선에 따라 진윈펑, 양문개, 웅병기 등과 회담했으나 진윈펑이 돤치루이 옹립을 주장하자 우페이푸의 대표 웅병기가 반발하는 통에 성과 없이 끝났다. 북양군벌이 완전히 몰락한 이후 상하이에 칩거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령 홍콩으로 피신하였고 1939년 홍콩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81년생.[2] 유명한 동기로는 차이어, 취퉁펑이 있다.[3]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93년에 3기로 졸업.[4] 당시 펑궈장은 리춘, 진광원, 왕잔위안 등을 장강 하류의 독군에 임명하였다.[5] 역시 안휘군벌 푸량쭤는 호남독군에 임명.[6] 2월 29일, 쉬스창의 만류로 사직 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