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2대 직예독판 | ||
한문 | 李景林 | |
한국식 독음 | 이경림 | |
영문 | Li Jinglin | |
자 | 방신(芳宸) | |
출생 | 1885년 3월 28일 청나라 즈리성 짜오창현 언차진[1] | |
사망 | 1931년 11월 13일 중화민국 산둥성 지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북양속성강무학당(현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무술인.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즈리성 짜오창현 언차진에서 태어났다. 1907년 북양속성강무학당 졸업 후 군인이 되었으며 무술을 잘 하였기 때문에 금위군 군관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진압에 참여했다. 바오딩 군관학교 졸업 이후 바오구이칭의 눈에 띄어 그의 막하로 들어가 1914년 흑룡강성 육군 1사단 참모장이 되었으며 1917년 1사단장 쉬란저우가 봉천군벌에 가담하면서 1918년 섬봉군 참의로 이동하였다.1919년 1월 취퉁펑의 1여단 1단장에 배속되었으나 쉬수정을 싫어했기 때문에 1920년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직예군벌에 호응하여 안휘군벌과 싸웠고 그 공으로 1921년 봉군 제7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동북육군 1사단장에 임명되어 1차 직봉전쟁에 동로군 3부대장으로 참여했지만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봉군 2군장 겸 2로군 사령관이 되어 장쭝창과 함께 10월 22일 창려를 점령하는 등 활약했고 장쭤린의 밀명에 따라 펑위샹 부대와 싸우지 않아 펑위샹이 무사히 회군, 북경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1923년, 봉천군벌의 동계군사훈련에 참가했는데 이때 자신의 대항군이었던 장쭝창과 훈련 통재관인 궈쑹링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북경정변으로 직예군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베이징에 입성하여 펑위샹이 흡수했던 직군을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았고 왕청빈을 축출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다. 또한 직예는 직예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직예성 의회에 의해 직예 보안사령관 겸 직예성장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11월 돤치루이 내각이 들어서자 경기경비사령관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강소와 안휘를 안휘군벌에게 찾아주겠다는 장쭤린의 제안에 따라 루융샹에 이어 직예독판에 임명되었다. 12월 12일 톈진회의에서 강소독군 치셰위안 토벌에 대해 우광신, 장쉐량, 양위팅, 루융샹 등과 함께 논의하였고 이어 제노전쟁이 일어났다.
2.2. 반봉사건
1925년 손봉전쟁이 일어나자 1방면군 군단장에 임명되어 쑨촨팡과 교전했다. 한편 펑위샹이 우페이푸와 연계하여 봉군을 치려는 기미를 보이자 장쭤린으로부터 펑위샹 공격을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보경안민(保境安民)을 주장하며 거절했다. 양위팅이 실지 회복을 주장하며 강경한 관내 진출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했으나 장쭤린은 펑위샹은 믿을 수 없으니 즉각 국민군 2군이 점령한 보대를 탈환할 것을 지시할 뿐이었다.궈쑹링이 반봉사건을 계획하자 직예와 열하의 통치권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가담, 11월 25일 양위팅 처벌과 장쭤린 하야를 요구했으나 산시성에 주둔한 국민군 웨웨이쥔, 쑨웨가 펑위샹의 제지를 듣지 않고 옛 원한 때문에 리징린을 공격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리징린은 산동독판 장쭝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장쭝창은 직로연군을 조직, 자신이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리징린을 부사령관에 임명하고 우페이푸, 장쭤린과 연대하여 펑위샹과 싸우게 되었다.
2.3. 직봉풍전쟁
1926년 4월, 전투가 톈진으로 번지자 네덜란드 공사를 수석으로 하는 8개국 공사단이 신축조약을 근거로 작전 중지를 요구했고 이에 국민군 1군 장즈장 부대가 텐진에서 남구로 퇴각, 추위푸가 경기 지역에 진입했고 리징린이 톈진을 점령했다. 이에 임시 집정 돤치루이는 권좌 유지를 위해 봉계와 손을 잡고자 했고 장쭤린의 건의에 따라 추위푸가 리징린의 직예독판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안 국민군의 루중린이 집정부를 포위하였고 이 때문에 돤치루이는 하야하였다.우페이푸와 장쭤린의 합작이 성사된 이후 1926년 4월 25일, 장쉐량, 장쭝창과 함께 베이징에서 우페이푸의 대표 치셰위안, 왕화이칭과 회의를 하였다. 이후 우쥔성이 열하도통 쑹저위안을 격파하고 몰아내자 직노연군은 리징린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추위푸를 전적지휘관으로 삼았다. 이에 리징린은 봉군을 이탈하여 자유행동에 나서려 했으나 부하인 룽전과 후위쿤이 장쭤린에게 밀고해버렸다. 장쭤린은 리징린에게 봉군에서 이탈할 수 없음을 경고하는 한편 룽전과 후위쿤을 각각 16, 17연합군으로 편성하여 군장으로 삼아 리징린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후 추위푸가 직노연군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리징린은 하야해야 했다.
2.4. 국민혁명과 말년
1931년의 리징린 |
국민당의 1차 북벌이 벌어지자 1926년 9월 쑨촨팡이 안국군 정부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리징린은 이를 거절하고 1927년 3월 중국국민당으로 전향했다. 추위푸에게 체포되었지만 일본의 중재로 석방되어 난징의 국민정부에 합류, 장제스로부터 노군초무사 직을 받아서 산동군의 패잔병을 수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공으로 1928년 4월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중앙의 편에 서서 산동 전선에 참전했다. 1931년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로부터 산동성에 체류할 것을 권유받아 산동성에 정착, 무술관 관장을 하였으며 <삼재검법>과 <무당 검법>을 비롯한 무술서를 저술했다.
1931년 11월 지난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郭松齡의 '反奉事件',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 중국어 위키피디아 리징린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