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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8:31:27

영동1지구

영동제1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永東第一地區 土地區劃整理事業
파일:영동지구종합평면도.jpg
영동지구 종합평면도
<colbgcolor=#003478><colcolor=#ffd700> 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사동·잠원동·서초동·방배동·양재동 일원
(現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일부, 압구정동 일부, 논현동 일부, 역삼동 일부, 도곡동 일부, 서초구 반포동 일부, 잠원동, 서초동, 방배동, 양재동)
면적 12,737,631.4㎡
지구 지정 1966년 12월 28일
시행 인가 1968년 1월 18일
시행 완료 1991년 12월 28일
총 사업비 4,725,800,000원
시행 주체 서울특별시
1. 개요2. 상세3. 개발 배경4. 사업 진행5. 도시계획
5.1. 택지5.2. 학교
6. 현재

1. 개요

서울특별시 강남구서초구 일대의 총 12,737,631.4㎡ 대지에 조성된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 영동2지구과 함께 영동신시가지 개발사업에 포함되었다.

1966년 12월 28일에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되었고, 1968년 1월 18일에 사업 시행 인가를 받아 착공하였으며, 1991년 12월 28일에 최종 환지처분을 하며 사업이 모두 완료되었다. 사업비는 총 4,725,800,000원이 소요되었다. 이때 정비된 지역은 현재의 강남구 신사동·압구정동·논현동·역삼동·도곡동서초구 반포동·잠원동·서초동·방배동·양재동의 각 일부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2. 상세

영동신시가지 개발사업은 지금의 강남을 있게 한 사업으로서, 1960년대 당시 온통 논밭 뿐이었던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서초구를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동1지구로 지정되었던 지역은 대부분 지금의 서초구, 그리고 강남대로 일대의 강남구 서쪽 영역 일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지금에는 영동이라 하면 충청북도 영동군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영동이라는 지명은 서울시민들에게 다소 생소해졌지만, 1963년 서울 편입 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통합된 행정구역이 없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시흥군 신동면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울 편입 이후에는 이 일대를 따로 아울러 부를 만한 마땅한 지명이 없었다. 때문에 동작대로를 기준으로 영등포의 동쪽이라 하여 영동(永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영동이라는 지명이 강남으로 완전히 대체된 것은 1975년에 강남구를 성동구로부터 분리신설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영동대교영동고등학교 등의 명칭이 남아 있다.

영동신시가지 개발사업은 지금의 신도시와 견주어도 그 규모가 훨씬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서쪽은 영동1지구, 동쪽은 영동2지구로 나누어 시행하게 되었고, 영동1지구는 영동2지구보다 3년 빠른 1968년에 먼저 삽을 떴다.

3. 개발 배경

본래 이 지역은 시흥군 신동면과 광주군 언주면에 포함되었던 지역으로, 서울 바깥의 어느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했다. 1950년 당시 169만 명이었던 인구는 불과 10년 만인 1960년에 이르러 244만 명을 넘어갔고, 당시 지금의 서울 강북 일부 지역과 영등포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서울특별시 관내에는 늘어나는 인구 문제로 인해 시가지가 무분별하게 팽창하고 인프라는 더 이상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등의 만성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이 당시에는 지금보다 서울의 영역이 훨씬 작았고, 자동차도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퇴근에 2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재건할 겸, 난개발로 얼룩진 기존 시가지를 정비하고자 일제강점기 때부터 진행되었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확대하여 진행하였으나, 이미 서울의 수용능력은 그걸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기존의 서울은 미어터지고 있었다. 따라서 시역을 대폭 확장하고 신시가지를 개발하여 인구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북에 있던 기존 시가지는 북한과 너무 가까웠다. 유사시에 서울은 피난조차 쉽지 않은 지리적 단점이 있었기에 한강 이남의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제1공화국 당시에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거론되었던 경인통합론이 대두되었고, 지금의 부평 일대를 신시가지로 개발하는 방안이 유력했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인천이 북한과 가깝다는 이유로 경인통합안을 반려하였고, 대신 한강 이남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1963년 1월 1일에 한강 이남의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동면, 광주군 언주면·대왕면 일부·중대면·구천면, 김포군 양서면·양동면 지역과 양주군 노해면·구리면 일부 지역을 서울특별시로 대거 편입하였고, 동년 발표된 서울시 재정비 계획에 따라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는 부도심으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66년,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취임하면서부터 마침내 영동 개발의 서막이 올랐다.

1966년 8월에는 새서울 백지계획이 발표되었다. 지금의 강남 땅을 무궁화 모양의 신시가지를 개발하고,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는 계획으로서, 피에르 랑팡이 처음 계획했던 워싱턴 D.C.를 모델로 하였다. 비록 훗날에는 사법부만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천도 계획이 다소 축소되었고, 새서울 백지계획 대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강남 개발의 첫 구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사업 진행

1966년 9월 19일, 서울시는 건설부에 영동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지정을 요청하였고, 동년 12월 28일에는 지구지정을 받았다. 처음 계획은 동년 8월에 이미 발표되었던 새서울백지계획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1967년부터는 경부고속도로가 영동지구 내를 관통하는 것으로 계획되면서 계획이 크게 바뀌었다. 이때부터 도시계획의 윤곽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하였다. 또한 규모가 매우 방대한 관계로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로 나뉘어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영동1지구 내에서도 서초대로를 기준으로 1공구와 2공구로 나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1968년 1월 8일, 마침내 사업 시행 인가가 떨어져 일제히 공사에 들어갔다. 1969년 12월 26일에는 제3한강교(現 한남대교)가 완공되어 강북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공사는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뒤이어 1971년 8월 15일에는 강변5로(現 올림픽대로 동작~한남 구간)이 완공되었다.

영동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발표되자, 일명 복부인이라 불리던 투기꾼들이 몰려들면서 지가가 폭등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강력한 토지 거래 규제를 시행하고 사업 계획도 여러 차례 변동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업 시행 구역의 면적도 당초 계획이었던 10,334,641.3㎡에서 15,615,785㎡에서 늘어났다가, 다시 14,171,133㎡로 축소되었고, 16,952,366.9㎡로 다시 늘어났다가, 최종적으로 12,737,631.4㎡로 사업이 종료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5. 도시계획

사업 시행 이전 사업 시행 이후
사유지 94% 택지 53%
일반 체비지 5%
국공유지 6% 공공용지 42% 도로 23.1%
학교 5.5%
공원 1.74%
기타 10.52%
감보율: 39.1%
영동1지구는 기존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다른 점이 많았다. 기존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시가지 정비와 택지 개발이 주요 목표였다면, 영동1지구는 아예 행정·상업 기능을 겸비한 새로운 서울의 도심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적도 기존 사업에 비해 매우 컸고, 비용도 기존 사업에 비해 크게 소요되었으며, 각 행정기관 청사와 인프라를 건설하는 공공용지의 비율이 기존 사업에 비해 높다는 것이다.

한강변 제방을 따라 강변5로(現 올림픽대로 동작대교-한남대교 구간)을 개설하고 내부 도로망은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격자 형태로 배열되었는데, 종축으로는 서쪽부터 명달로, 반포대로, 서초중앙로, 강남대로(당시 영동1로)가, 횡축으로는 북쪽부터 잠원로, 나루터로, 신반포로, 서초대로, 사임당로, 효령로, 남부순환로를 개설하는 계획이었다.

내부 간선도로망은 50m 이상의 광폭으로 계획되었고, 강북과는 다르게 한 블럭당 규모가 꽤 크게 조성되었다. 또한 영동1지구 내 도로율은 23.1%로, 1960년 기준 8%에 불과했던 서울의 도로율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비율이었다. 이처럼 광폭의 도로와 큰 블럭, 높은 도로율은 모두 자동차 위주의 이동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동차가 그다지 않지 않던 당시의 한국에서는 '차도 없는 나라에서 뭐하러 도로 비중을 그렇게 크게 잡느냐'며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던 모양이나, 그렇게 도로율을 높이고도 지금 와서는 교통체증이 만연한 걸 보면 그 당시 계획의 필요성은 입증된 셈이다.

5.1. 택지

5.2. 학교

이전된 학교 이전 전 위치 이전 후 위치 이전 년도
서울교육대학교 성동구 행당동[1] 서초구 서초동 1977년
서울고등학교 중구 신문로2가[2] 서초구 서초동 1980년

6. 현재


[1] 현재 해당 부지에는 덕수고등학교 행당분교와 행당중학교가 있는 자리.[2] 현재 해당 부지에는 원래 그 터에 있었던 경희궁의 일부 전각이 복원되었고, 나머지 부지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