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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2:19:21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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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볼셰비키당 당수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리모노프
Эдуард Вениаминович Лимонов
duard Veniaminovich Limonov
파일:Eduard Limonov.jpg
본명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
Эдуард Вениаминович Савенко
출생 1943년 2월 2일
소련 니즈니노브고로드주 제르진스크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제르진스크)
사망 2020년 3월 17일 (향년 77세)
러시아 모스크바
재임기간 민족 볼셰비키당 당수
1993년 ~ 2007년
다른 러시아 당수
2010년 ~ 2020년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소련 밖에서의 생활2.3. 정치 활동의 시작2.4. 말년
3. 성향4. 참고문헌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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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작가이자 정치인. 민족 볼셰비키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다른 러시아의 창립자였다.

2. 생애

2.1. 초기

소련 제르진스크에서 출생한 에두아드르 사벤코는 이후 하리코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부모는 사벤코에게 독서를 장려하였고, 부모의 영향으로 사벤코는 여러 문학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생애에 대한 구술에 의하면 그는 무려 13세 시절부터 저속한 시를 쓰기 시작했고, 청소년기에는 절도 등의 경범죄에 연루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사벤코는 문단에서 쓰기 위한 필명을 고안했는데 그 필명이 바로 리모노프였다.

1966년 사실혼 관계였던 안나 루빈시테인(Анна Моисеевна Рубинштейн)과 함께 모스크바로 온 리모노프는 거기서 바지 수선 일을 하며 돈을 벌었지만 이내 다시 하리코프로 돌아왔다. 1967년에는 다시 모스크바로 이주, 1973년에 옐레나 샤포바와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그의 문학적 재능이 썩는 것을 아까워한 한 의사가 그에게 언더그라운드 문학가들의 회담 장소로 사용되던 '제41 서점'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그 서점에서 근무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시집을 판매하게 된다.

1974년 리모노프는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소련 측 보도에 의하면 KGB 측은 리모노프 부부에게 정보원으로 일할지, 망명을 할지 선택하게 했다고 하며, 이스라엘로의 이주도 허락했다고 한다.[1]

2.2. 소련 밖에서의 생활

뉴욕에 정착한 리모노프는 아내와 이혼했다. 그는 러시아어 신문 교정자로 일하며 소련 망명자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는 펑크 문화에 이끌렸고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또한 그는 미국 내 트로츠키주의 그룹인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에도 가입했는데, 이 때문에 스파이로 의심받아 수십 명의 지인들이 심문당하는 등 FBI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그는 가난한 삶을 살았고, 노숙자들과도 어울렸다고 한다.

그가 1979년에 처음 출판한 소설 <나는 에디(It's Me Eddie)>는 사실 1977년에 완성되었지만 미국 출판사 어디에서도 출판하려 하지 않았기에 결국 그가 새로 이주한 프랑스에서 1980년에 출판할 수 있었다. <나는 에디>는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나중에 리모노프는 이 책에 반소련적 어조가 없어 미국에서 출판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술했듯 리모노프는 1980년 프랑스로 이주하였으며, 당시 연인이었던 나탈리야 메드베데바(Наталья Медведева)와 함께였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13년간 무국적자로 지내다가 1987년에야 프랑스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선 1982년 리모노프는 나탈리야와 결혼했다.

2.3. 정치 활동의 시작

1991년 러시아 국적을 회복하고 러시아로 돌아온 리모노프는 이때부터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시기 세르비아를 지지하여 보스니아 전쟁 무렵에는 세르비아 측 저격수로도 참여했다. 또한 리모노프는 조지아압하지야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 등 소련에서 분리된 국가들의 친러 분리주의를 지지했고,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1992년 지리놉스키의 그림자 내각에서 안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지리놉스키와 결별하고는 1994년 <지리놉스키에 대항한 리모노프(Limonov against Zhirinovsky)>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1993년 5월 1일 리모노프는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음악가 예고르 레토프세르게이 쿠료힌과 함께 민족 볼셰비키당을 창당하고 그 당수가 되었으며,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에는 반옐친 시위대에 참여했다.[2] 민족 볼셰비키당은 볼셰비즘, 나치즘, 펑크 문화를 조합하였기 때문에 청년들의 호응을 얻었다. 당의 신문은 그의 필명에서 따온 '리몬카'였는데, 신문의 극단적인 논조 때문에 1996년 러시아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95년 아내와 이혼한 리모노프는 계속 민족 볼셰비키당수로 활동했고 <영웅의 해부학(Anatomy of a Hero)>이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다. 1999년 8월 24일에는 세바스토폴 시계탑 꼭대기에서 15명의 지지자와 함께 국가두마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호 조약의 비준을 거부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2001년 리모노프는 테러, 불법 무기 구매, 헌정 질서 파괴 혐의로 투옥되었고 리몬카에 게재된 기사로 인해 카자흐스탄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고 비난당했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불법 무기 구매 혐의로 4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했다. 감옥 안에서 그는 8권의 책을 남겼다.

이 무렵 민족 볼셰비키당은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사실 이 당은 애초부터 분열의 조짐이 매우 큰 당이었다. 리모노프와 레토프를 위시한 극좌파와 두긴을 위시한 극우파의 갈등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3] 특히 인종 문제가 큰 화두로 떠올랐는데, 백인만 당원으로 받자는 두긴의 주장을 리모노프가 거부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국 이 갈등이 폭발해 두긴이 먼저 리모노프를 향해 "볼셰비즘적 속물은 나가라!"며 탈당을 강요했고, 이에 리모노프 또한 격분하여 "나갈 거면 나치인 니가 나가라!"라고 반격, 두긴이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탈당하게 되어 민족 볼셰비키당은 순식간에 당세가 절반으로 깎여나갔다. 이후 2007년 4월 19일 민족 볼셰비키당은 불법정당으로 해산되었다.

2006년 리모노프는 여배우 예카테리나 볼코바(Екатерина Волкова)와 결혼해 아들 보그단과 딸 알렉산드라를 보았지만 2년 후 또 헤어졌다.

2.4. 말년

민족 볼셰비키당이 해산된 뒤에도 리모노프는 정치 활동의 꿈을 접지 않고 남은 자신의 파벌들과 함께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정치인들과 협력하며 정치 활동에 주력했다. 때문에 그는 여러 반정부 집회로 자주 구금되었으며, 2009 7월에는 '31전략(Strategy-31)' 집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후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한 리모노프는 2010년 7월 '다른 러시아'를 창당해 당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다른 러시아 역시 민족 볼셰비키당처럼 불법 군소정당일 뿐이었다.

2014년 다른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을 지지하였고, 돈바스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민병대까지 만들었다.

리모노프는 2020년 3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3. 성향

리모노프는 서방에서는 극우 또는 파시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좌익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했다. 그의 대통령 출마 선언문에서는 민족주의적 의제와 좌파적 의제[4]가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상술했듯 민족 볼셰비키당수였던 시절 백인만을 당원으로 받자는 두긴의 주장을 '러시아에 살고 러시아어를 하며 러시아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은 모두 러시아인이다' 라며 거부하고 유색인종을 당원으로 받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데서[5] 볼 수 있듯 히틀러 이후 파시즘에 이식된 인종주의와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모노프를 극우로 분류하는 주장이 결코 틀린 건 아닌데, 그는 정치적으로는 우파적 스탠스를 취했으며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했다. 즉, 그는 혼합 정치파시즘적 좌파의 훌륭한 표본인 것이다.

4. 참고문헌

5. 기타


[1] 정작 리모노프와 옐레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2] 이 때 그는 지리놉스키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상술했듯 둘은 결별하고 만다.[3] 자유주의자였던 쿠료힌은 당 활동에 점점 열의를 잃고 있었고, 1996년에 사망하여 영향력이 없었다.[4] 물가 동결, 자본 국외유출 금지, 건설업과 에너지 기업들의 국유화[5] 심지어 현재도 러시아 내에서 차별의 대상인 흑인들도 당원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