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라시대(기원전 57년~935년)에 제작된 어진 및 초상과 어진 제도의 운영 등에 대해 소개하는 항목이다.2. 상세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와 달리 어진과 어진 제도의 운영에 대해 기록이 많지 않다. 신라는 왕을 어진과 초상을 그리고 제작한 시기는 최소한의 기록을 보면 빠르게 잡으면 제27대 선덕여왕 혹은 제28대 진덕여왕, 늦게 잡아도 제35대 경덕왕 이후부터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어진과 초상을 제작 및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 어진의 형태로 유물이 전해지는 것은 제56대 왕 경순왕하고 추존왕까지 포함하면 흥무왕, 조각상까지 합치면 제28대 왕 진덕여왕 셋뿐이다.3. 진전 제도
통일신라시대 진전 제도는 선대 군왕의 추복을 위한 성전사원 같은 곳에 어용(御容)을 모신 별도의 시설을 운영했던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4. 신라 어진과 초상의 수난
궁예가 부석사에 신라 왕의 어진을 찢었다는 기록이 있어 어진은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어진과 초상들은 진덕여왕과 경순왕, 사진으로나마 어진이 전해지는 흥무왕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현대까지 전해지기거나 보존되지 못 했다.다만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일명 남산 감실부처로 불리는 불상이 제27대 선덕여왕의 용안을 본땄다는 설이 있다. 비슷하게 석굴암 본존불의 얼굴도 당시 제35대 경덕왕을 본땄다는 설이 있다.
사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된 사찰에서 불상의 얼굴이 당대 임금의 용안을 따라 만들었다는 설은 굉장히 흔하다. 대표적으로 룽먼석굴의 본존 비로자나불은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다.
5. 목록
기록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어진은 다음과 같다.대수 | 왕호/시호/묘호 | 봉안 장소 | 비고 및 관련 기록 |
01 | 혁거세 거서간 | 공식적으로는 제작 기록이 없음 | |
02 | 남해 차차웅 | 기록 없음 | |
03 | 유리 이사금 | 기록 없음 | |
04 | 탈해 이사금 | 기록 없음 | |
05 | 파사 이사금 | 기록 없음 | |
06 | 지마 이사금 | 기록 없음 | |
07 | 일성 이사금 | 기록 없음 | |
08 | 아달라 이사금 | 기록 없음 | |
09 | 벌휴 이사금 | 기록 없음 | |
10 | 내해 이사금 | 기록 없음 | |
11 | 조분 이사금 | 기록 없음 | |
12 | 첨해 이사금 | 기록 없음 | |
13 | 미추 이사금 | 기록 없음 | |
14 | 유례 이사금 | 기록 없음 | |
15 | 기림 이사금 | 기록 없음 | |
16 | 흘해 이사금 | 기록 없음 | |
17 | 내물 마립간 | 기록 없음 | |
18 | 실성 마립간 | 기록 없음 | |
19 | 눌지 마립간 | 기록 없음 | |
20 | 자비 마립간 | 기록 없음 | |
21 | 소지 마립간 | 기록 없음 | |
22 | 지증왕 | 기록 없음 | |
23 | 법흥왕 | 기록 없음 | |
24 | 진흥왕 | 기록 없음 | |
25 | 진지왕 | 기록 없음 | |
26 | 진평왕 | 기록 없음 | |
27 | 선덕여왕 | 공식적으로는 제작 기록이 없음 | |
28 | 진덕여왕 | 소릉[1][2][3] | 어진은 아니나 당태종의 무덤이 소릉에서 석상이 전해진다. |
29 | 태종 무열왕 | 기록 없음 | |
추존 | 흥무왕 | 미상 | 기록에는 없으나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흥무왕의 어진도 전한다. |
30 | 문무왕 | 공식적으로는 제작 기록이 없음 | |
31 | 신문왕 | 기록 없음 | |
32 | 효소왕 | 기록 없음 | |
33 | 성덕왕 | 기록 없음 | |
34 | 효성왕 | 기록 없음 | |
35 | 경덕왕 | 단속사 | 삼국유사 속두류록 |
36 | 혜공왕 | 기록 없음 | |
37 | 선덕왕 | 기록 없음 | |
38 | 열조 원성왕 | 기록 없음 | |
39 | 소성왕 | 기록 없음 | |
40 | 애장왕 | 기록 없음 | |
41 | 헌덕왕 | 기록 없음 | |
42 | 흥덕왕 | 기록 없음 | |
43 | 희강왕 | 기록 없음 | |
44 | 민애왕 | 기록 없음 | |
45 | 신무왕 | 기록 없음 | |
46 | 문성왕 | 기록 없음 | |
47 | 헌안왕 | 기록 없음 | |
48 | 경문왕 | 기록 없음 | |
49 | 헌강왕 | 기록 없음 | |
50 | 정강왕 | 기록 없음 | |
51 | 진성여왕 | 기록 없음 | |
52 | 효공왕 | 기록 없음 | |
53 | 신덕왕 | 기록 없음 | |
54 | 경명왕 | 기록 없음 | |
55 | 경애왕 | 기록 없음 | |
56 | 경순왕 | 금강산, 해인사, 고자암, 은해사[4], 숭혜전 | 신라 왕 중 어진 형태의 유물이 남아있음. |
5.1.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은 없으나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불상이 제27대 선덕여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찬가지로 석굴암 본존불의 얼굴이 당시 제35대 경덕왕을 본땄다는 설이 있다.
5.2. 진덕여왕
그림이 아닌 조각상이며 하반신 부분만 남아있다. 1982년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 산동문 밖 동북쪽 약 1000미터 부근에서 발견됐는데 석상이 발견된 부근에서 ‘신라…군(新羅…郡)’, ‘덕(德)’ 등의 명문이 새겨진 석상 좌대 잔편을 발견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석상이 진덕여왕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견이 있었고 현재는 이 석상이 진덕여왕상인 것으로 확정되었다.###
5.3. 흥무왕(김유신)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朝鮮名賢肖像畵寫眞帖)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로 이 영정에 대한 설명 내용은 "김유신은 왕경인이니 가야국 시조 수로왕의 12세손이다. 수로왕이 소호금천(少昊金天·중국의 건국시대 통치자인 삼황오제 중 한 명이자 헌원황제의 아들)씨의 후예라고 자청해 성을 김이라고 하였다.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벼슬이 안무제군사(安撫諸軍事)에 이르렀으며 갈문왕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을 사통해 유신을 낳았다. 유신은 어려서부터 크게 재능이 뛰어나고 지략이 원대하였다. 후일 당과 수교해 무덕한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하고 신라의 천하통일을 이뤄 재상에 올랐으며 흥덕왕 때에는 흥무왕에 추증되었다."라고 쓰여있으며, 희미하게 흥무왕 영정이라는 글이 있다.출처
5.4. 경덕왕
단속사에 경덕왕의 어진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5.5. 경순왕
1749년 상용암 제작본 | 1794년에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 초상 | ||
1904년 승려화가 이진춘이 그린 밑그림 | 1904년 이진춘이 그린 경순왕 어진 |
통일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초에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금강산본, 해인사본,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고자암[5]에 봉안해 놓은 고자암본 세 종류의 경순왕 어진이 그려졌다고 한다. 당시의 세 원본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금강산본을 제외한 나머지 두 종류의 어진을 후대에 모사한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경순왕 어진은 부분적으로 불화의 표현기법이 사용되긴 했지만 본래 경순왕의 외모 역시 특정할 수 있을만큼 어느정도 사실적 그림체로 제작되었다.
- 1677년 강원도 원주 고자암에서 제작된 것
-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제작된 것
-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6]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 1904년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그리고 이것의 밑그림
이들 어진은 경순왕 사당인 경상북도 경주시의 신라 왕실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숭혜전 창고에 방치되었다 2007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진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5.6. 그 외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혁거세 거서간의 상과 문무왕의 상이 그려져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혁거세 거서간과 문무왕의 어진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6. 참고 문헌
- [고려 초기 초상화제도의 수립], 한국미술연구소, 2017 *
[1] 당태종소릉도[2] 금석록[3] 장안지[4] 조선왕조실록[5]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뒤 말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생활하던 곳이다. 이름이 참[6] 정조시대 화가로 인물 초상화 분야에서는 김홍도를 능가할 정도의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평가받았다. 정조 어진을 제작하는데 참여한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