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우다 안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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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八木・宇田アンテナ / Yagi–Uda Antenna일본의 공학자 우다 신타로가 만든 안테나. 야기라는 이름은 우다 신타로를 조수로 둔 도호쿠제국대학의 야기 히데츠구 교수의 이름인데, 논문 자체는 공동 명의로 발표되었으므로 저런 이름이 붙었다.
민간으로도 많이 전파가 되어 꽤나 장수하고 있는 안테나이다. 당장 위의 사진에서도 야기-우다 안테나가 TV(텔레비전) 수신용으로 사용 되고 있다. 물론 시기가 흘러 기술의 발전의 영향으로 과거보다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옥외용 안테나로 여전히 보인다. # 위성용 접시 안테나가 아니면 지금도 기본적으로 이 안테나다.
2. 상세
1925년에 개발되어 1926년에 보고되었다. 도호쿠제국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에는 당시 초단파를 중심으로하는 전자기파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야기 히데츠구(八木 秀次)라는 일본의 공학자와 그의 조수 우다 신타로(宇田 新太郎)라는 인물이 야기 우다 안테나(Yagi-Uda Antenna)라는 전파공학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물건을 개발하였다. 제작은 거의 대부분 우다 신타로가 했으나, 논문은 공동 명의로 발표되었다. 게다가 특허는 교수의 갑질로 야기 교수 단독 명의로 해 버렸다. 그래서 초기에는 실제 개발자인 우다의 이름이 없이 '야기 안테나', '야기 히데츠구의 안테나'라고 불리기도 했다.쉽게 말하자면 현대까지 흔히 사용되는 생선뼈처럼 생긴 TV 수신 안테나가 바로 이 야기 우다 안테나이다. 물론 수신뿐만 아니라 송신에도 이용 가능하다.
원리는 안테나 소자에 직접 전류를 흘려서 전파를 방사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무급전 안테나 원리를 이용해 반파장 다이폴 안테나 전방에 약간 짧은 도선인 도파기를 후방에 약간 긴 도선인 반사기를 배열하여 단향성의 날카로운 지향성을 갖도록 하는 원리로, 당시에는 획기적인 기술로서 전쟁에 있어서도 레이더 기술에 큰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이었다.
3. 제2차 세계대전 관련
물건 자체는 매우 뛰어났지만,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의 시대착오적인 결정으로 도입이 매우 늦어졌고, 이는 일본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되었다.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이 최고급 기술을 무시해버린다. 당시 일본은 돈 들여서 레이더 따위를 개발하는 것보다 훈련을 통해 인간의 시력을 단련시키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사고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정보를 듣게 되면서 "우리도 레이더를 써야하는 거 아냐?"라는 의견이 일선 군인들 사이에서 나와 전파탐신기를 도입할지 어떨지를 묻는 간담회가 열리게 되는데. 여기서 일본 육군 상층부가 말하길 "군대는 기습이 생명이므로 기습을 우선시해야 하는 장비들이 전파를 내쏘는 것은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이 되므로 전파탐신 같은 건 필요 없다."였다. 태평양 전쟁 때는 진주만 공습 때 이미 무선 침묵을 유지했고, 그런 행동이 미국의 정보전에 대해 효과를 보긴 했다. 그리고 여러 무선국에서 감청한 통신과 전파 기록을 비교해 발신지를 추적하는 기술은 그때 이미 실용화되어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도 본격적인 레이더를 장비한 전함은 추축국에선 적었고, 함포 사격 제원으로 쓸 수준에는 전쟁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전쟁 중에야 미국이 도달한다. 문제는 일본 해군이 함포 사격보다 훨씬 먼 거리를 타격하는 함대 항공전을 세상에 꺼냈으면서도 그런 장거리 전역을 관할하는 데 있어 레이더의 효용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상대가 레이더를 가지고 있으면 결국에 탐지될 건 다 탐지된다. 특히 총포를 쏘는 순간 총구 화염이나 소리 때문에 위치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다만 일본은 야간전에서는 무연 장약을 사용했고, 전쟁 초기에는 미 해군에게 확실하게 이득을 보았다. 미 해군이 SG레이더를 사용한 야간전 교리를 확립한 다음에는 일본 해군만 눈 감은 꼴이 되지만. 레이더의 불필요를 주장하는 논리로선 매우 조잡하다.
물론, 전파도 탐지가 되므로 적 세력 직전에서 전파를 쏴대는 짓을 하면 역탐지의 우려나 적어도 적함이 왔다고 광고하는 상황이 생겨 문제가 생기긴 한다. 전자전이 발전한 현대에는 이 문제 때문에 레이더의 전파를 역추적해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아예 레이더 자체를 추적, 공격하는 전술 및 장비를 개발하고 있다. 수뢰전대 따위로 야간 뇌격전이나 야간 근접전을 노리던 일본군 해군에는 확실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었던 셈.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 위치가 파악된다고 봐야 하는 육상 기지나 상대적으로 원거리 포격력과 높은 피탐지율을 가지는 전함 같은 대형 함선에는 역탐지 가능성을 감수해서라도 충분히 달 가치가, 아니 무조건 달아야 했다. 전함이란 핵탄두와 탄도 미사일이 개발되기 전까지 각국이 보유한 가장 강한 원거리 타격 병기이자 전략 무기였다. 그런 만큼 전선에 모습이 드러나면 적국의 최중요 타겟으로 지정되는 함선이다. 그리고 전파 역탐지 문제가 가시화될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레이더를 잠시 안 쓰면 된다는 아주 편리한 해결책이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모순점이 또 하나 있다. 견시를 이용해 적을 발견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적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한다. 야간 감시를 위해 어둠에 적응한 눈을 가진 견시를 섬광이 번쩍이는 전투에 참가시키면 눈 버린다. 그렇다면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하는데, 유일한 해법이 탐조등이다. 그런데 탐조등을 켜면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 배의 위치를 알아차린다.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 감지에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이는 매우 위험하다. 전파를 쏴대면 역탐지의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시광선을 쏴대면 기계를 쓸 것도 없이 인간의 눈으로 역탐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위험한데, 탐조등이 비추는 배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명확해진다. 적과 아군이 뒤섞일 경우 피아 식별이 어려울 수도 있는데, 유용한 정보가 아군만이 아닌 적군에게도 제공되는 것이다. 거기다 육군 상층부가 생명이라고 까지 말했단 기습은 아군의 병력과 움직임을 숨기는게 중요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습을 거는 측의 입장이고 기습을 대비하는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빠르고 정확하게 적의 공세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과달카날 해전 2차 야간전에서 일본군의 전함 기리시마가 탐조등을 켰을 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적과 아군이 뒤섞이는 바람에 레이더만으로는 피아 식별이 어려워서 함부로 포격을 못하고 있던 전함 워싱턴은 아군 전함이 탐조등에 의해 환하게 드러나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군 전함이 1척인데, 거기에 탐조등을 비추는 대형함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적이었다. 곧바로 워싱턴은 16인치 주포를 일제사격해서 기리시마를 날려버렸고, 2차 야간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반면에 연합국은 이 기술의 진가를 일찍이 알아보았다. 이 기술을 통해 고성능 레이더를 만들 수 있었고, 결국 일본에 궤멸을 가져오게 된다. 만약 기술 유출이라도 막았다면 할 수도 있는데 영국에 특허를 낸 제품이기도 했다. 특허 출원까지 했는데 뭔 수로 공개를 막을 수 있을까. 이것에 관해서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영국군의 레이더 관련 서류를 입수하는데, 일본군 조사관이 당시 레이더 조작병이었던 레먼 부사관에게 이 노트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묻자, 레먼 하사관은 "야기는 이 안테나를 만든 일본인의 이름인데,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냐?"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을 고민에 빠트린 적의 기술이 사실은 자국민의 손에 개발되었다는 것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어찌되었든 자신들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일본은 야기-우다 안테나를 응용한 레이더 개발을 착수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한 마디로 뒷북인 셈이다.
그리고 만들어낸 레이더마저도 연합군 입장에서 볼 때 장난감이 따로 없을 정도로 기술이 엉망이었다. 레이더가 돌아가면서 적이 어느 위치에 있는 지 보여주는 PPI 스코프 같은 장비는 끝까지 개발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어느 각도에 뭐가 있다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도만 발휘했다. 제품 개발이란 게 하루 아침에 뚝딱 하고 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게다가 야기-우다 안테나는 성능이 매우 우수한 대신 특정 방향에서 수신률이 강력한 지향성 안테나인 관계로, 레이더에 응용하려면 추가 보완 장치의 기술 개발이 필요했다. 애당초 민간용으로 개발된 기술이었고. 결론은 일본군의 응용 능력 부족.
그리고 연합군은 레이더를 마음껏 쓰면서도 자기는 적에게 탐지되지 않는 방법도 고안해냈다. 카미카제 항목에도 나오는 레이더 피켓함으로, 구축함에 레이더를 장착시키고 마음대로 레이더를 쓴 것이다. 당연히 역탐지에 걸리지만, 그 구축함은 주력 함대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얻어터져도 주력 함대가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그 대신 레이더 피켓함의 승조원들은 카미카제들이 자꾸만 날아오자 노이로제에 시달린 끝에 "우린 항모 아님"이라고 커다랗게 써놓기도 했다. 피켓함을 본 카미카제들이 항모는 안 찾고 피켓함에 그냥 꼴아박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일본 해군도 신형 레이더를 신형 구축함에 달아 취역시키기는 했지만, 건조된 구축함이 너무 적었고 이미 그 정도로는 영향을 줄 수 없을 만큼 전황이 기운 다음이었다.
우다 신타로는 일본을 위해 기술을 개발했지만 일본은 이것을 무시하였고, 정작 연합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일본 패망의 원인이 돼 버렸다는 것이 알려져서 전후에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이건 야기 히데츠구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수의 성과를 자기 이름만으로 특허를 낸 죄가 있고, 그 업적을 가로채 회사도 세우고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니 불평할 자격은 없다. 진짜로 억울한 건 우다 신타로. 다만 우다 신타로도 사후에나마 욱일대수장을 추서 받는 등 업적은 인정 받았다.
하지만 야기가 전쟁 전에 계속해서 군부에 야기-우다 안테나의 보급과 레이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던 것을 생각하면 전파 기술 유출로 인한 일본군의 패망은 오히려 이들이 만든 기술을 내친 일본군이 자초한 결과라 봐야 한다. 때문에 1956년 일본 정부가 문화 훈장을 수여했을 때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뭐병 식으로 투덜대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 참고로 링크의 내용은 오류가 있는데, 문화 훈장은 1956년에 받은 것이고 야기가 세상을 떠난 1976년에 받은 훈장은 욱일대수장이다. 그것도 사후 추서된 훈장.
한편, 우다 신타로는 공학 교수로 지내다 야기 히데츠구와 같은 1976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신의 무덤에 이 안테나를 세워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덤에 안테나를 세우는 것은 이상했는지, 우다의 묘비에 이 안테나를 새기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전문 기술의 위험성과 필요성을 무시한 결과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일본이 기술이 없었던 건 아니다. 높으신 분들이 전파 기술에 관해서 무식했을 뿐이다. 충분히 그 기술이 나왔으면 활용할 방안이 있었음에도 그걸 무시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항목에서 좀 더 자세한 내막을 볼 수가 있는데, 완전 막장이 따로 없다.
참고로 연합군이 야기-우다 안테나 덕분에 레이더 시스템이 크게 발전한 건 아니다. 대전 이전부터 복잡하고 다양한 레이더 시스템 중 극히 일부에만 사용되었으며, 주로 정찰기 또는 대잠, 야간 전투기에 일부만, 또는 실험용으로만 쓰였다. 대표적인 건 TBF Avenger 및 PBY 카탈리나 같은 기종이다. 추축국에서도 Ju 88 R-1 전폭기 등의 노즈콘에 부착되어 사용되었다. 연합군의 진정한 레이더 혁명은 1940 영국 버밍엄 대학의 캐비티 마그네트론으로, 발전소가 필요할 정도로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레이더 시스템의 사용 전력을 수백배 끌어내려 소형화, 고출력화, 고해상력으로 시야밖 전투, 자동 사격통제 시스템과의 연동으로 인간보다 100배 이상 명중률이 상승한 대공포(+근접 신관) 등 공상 속의 수많은 비대칭 전력을 현실화 시킬 수 있었다. 야기-우다 안테나는 전후 민간용으로 불하된 레이더 기술이 TV 수신기로 쓰이면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기에 대중에게도 친숙한 안테나가 되었지만 군용으로는 용도가 애매했다.
4. 여담
- TV 보급률이 낮았던 옛날에 이 안테나가 있는 집은 동네 최고의 부잣집이란 뜻이었고, 도둑들이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1]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야기 히데츠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2004년 8월 1일자 서프라이즈 120회에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