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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7:36:25

안재구

파일:안재구.jpg

安在求, Ahn Jae Goo
1933년 10월 24일 ~ 2020년 7월 8일 (향년 86세)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사건사고
3.1. 구국전위 사건3.2. 2012년 국가보안법위반 사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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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1].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여러 차례 처벌 받은 바 있다. 좌파, 진보 시민사회에서는 '공안탄압 사건의 피해자, 통일운동가'로 지칭한다.

2. 생애

1933년 10월 24일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응암리 매방마을에 있는 외가에서 사진 기사였던 아버지 소천(素天) 안의환(安義煥, 1912. 5. 17 ~ ?)[2]과 어머니 서흥 김씨 김태숙(金兌淑, 1914 ~ ?)[3]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군(現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4]로 돌아와 조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1890 ~ 1953. 12. 11)[5]와 조모 상산 김씨(1890 ~ 1971. 1. 26)[6]의 슬하에서 자랐다.

1940년 4월 밀양제2심상소학교(現 밀성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1월 아버지를 따라 경주 계림심상소학교(現 경주 계림초등학교)로 전학했다. 1943년 9월 밀양제2심상소학교에서 개칭된 밀성국민학교로 돌아와 1946년 8월 졸업했다. 같은 해 9월 밀양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47년 5월 노동절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에 퇴학 처분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정치범으로 구속되었지만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면서 석방되었다.

1948년 2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주도한 2.7 총파업에 참여했고, 이후 남조선로동당 밀양군당 조직 연락원 및 농민위원회 조직지도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 4월 8일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외가로 피신했고, 1949년 6월 초등학교 교원 채용 준교사 시험에 합격해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달성군 구지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51년 9월 영남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 수료 학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고, 1952년 3월 졸업 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52학번)에 입학했다. 1956년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강사로 출강했으며, 1961년 2월까지 모교인 영남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58년 3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59년 10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제20보병사단에서 교직보유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에 부임해 부교수, 교수 등으로 재직했다. 1970년 8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群空間(군공간)에 關(관)한 硏究(연구)」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으로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부터 경북대학교에서 교직에 있으면서 6.3 항쟁, 3선 개헌 반대 투쟁, 교련 강화 반대 투쟁, 유신체제 반대 투쟁 등을 지원했다. 이에 1976년 2월 '국가관 미확립' 및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1976년 9월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 교수대우 강사로 임용되었다. 이 시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에 가입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및 교양선전 선동부 책임 겸 통일전선부 책임 등으로 있으면서 좌익 활동을 지속했다. 1977년 3월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임명되었고, 1979년 9월 숙명여자대학교 이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979년 10월 9일 발표된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곧 검거되었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세계 수학자들의 항의 및 진정 등으로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8년 12월 가석방되었다.

출소 이후 1990년 1학기 서강대학교에서 '과학과 사람'이라는 강좌를 강의했고, 1991년 3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 등지에서 교양학부 강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994년 6월 14일 후술할 구국전위 조직 사건의 총책으로 다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9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를 받아 형집행정지석방되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 등에서 고문을 역임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기고하였다. 2005년에는 당시 남북 평화 분위기에 따라 실시된 '평양 문화유적 참관'행사에 참여해 북한을 방문했다.

201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내용 참조.

2020년 7월 8일 오전 4시 30분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새소망요양원에서 심정지사망했다. 한겨레신문 등은 그의 활동을 '통일활동'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

3. 논란 및 사건사고

3.1. 구국전위 사건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당시 경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4학년으로 총학생회장이던 차남 안영민(安英民, 1969 ~ )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본인은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3.2. 2012년 국가보안법위반 사건

201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압수목록이 교부되지 않아 형사소송법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1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3년 형과 자격정지 3년 형에 쳐해졌다. 일부는 증거능력 문제로 무죄판결을 받았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4. 7. 31. 선고 2012고합1828 판결)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판단을 받았는데, 공소사실을 보면 국가보안법의 여러 죄책을 저질렀다.
국가보안법위반(간첩)의 점 무죄
별지 범죄일람표 1 순번 1, 5, 6 기재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등)의 점 무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의 구성등)의 점 유죄
국가보안법위반(자진지원 금품수수)의 점 유죄
그 외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등)의 점 유죄

2심에서 항소기각되고, 3심에서 상고기각되어 1심대로 형이 확정되었다.(대법원 2017. 9. 7. 선고 2015도10648 판결)

4. 여담


[1] 디지털밀양문화대전. 중랑장후(中郞將后) 사맹공파(司猛公派) 40세 재(在) 항렬.[2] 자는 성집(聖集).[3] 김굉필의 후손으로, 김식(金埴)의 딸이다.[4] 광주 안씨 중랑장(中郞將)후(后)-사맹공파(司猛公派) 집성촌이다.[5] 자는 창서(昌序).[6] 김상현(金相現)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