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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4:11:42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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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 사건
[ruby(秋, ruby=あき)][ruby(葉, ruby=は)][ruby(原, ruby=ばら)][ruby(無, ruby=む)][ruby(差, ruby=さ)][ruby(別, ruby=べつ)][ruby(殺, ruby=さっ)][ruby(傷, ruby=しょう)][ruby(事, ruby=じ)][ruby(件, ruby=けん)]
[1]
Akihabara massacre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d0032858_484ba54a86930.jpg
▲ 당시 사진
시기 2008년 6월 8일
장소 일본 도쿄도 아키하바라
범인 카토 토모히로(남, 1982년생 / 당시 25세)
범행 차량 이스즈 엘프 5세대
1. 개요2. 범인3. 사건 정황
3.1. 사망자 명단 및 사인
3.1.1. 트럭 뺑소니3.1.2. 칼
4. 사건 이후5. 유사 사건
[clearfix]

1. 개요

2008년 6월 8일 일요일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평범한 시민이자 인력 파견업체 직원이었던 카토 토모히로(사건 당시 25세/남성)[2]'생활이 피곤해서', '삶에 지쳐서'라는 이유로 2톤 트럭으로 횡단보도에 그대로 돌진해 사람들을 친 뒤 서바이벌나이프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마구 찔러서 7명 사망, 10명 중경상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헤이세이 시대의 가장 악명 높은 도리마 사건으로 꼽힌다.

범인 카토 토모히로는 체포된 후 사형을 선고받고 14년간 미집행 상태로 복역하다가 2022년 7월 26일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은 기시다 내각 출범 이래 2번째 사형 집행이다.

2. 범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토 토모히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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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 정황


당시 아키하바라는 휴일이었고 보행자 천국 이벤트(歩行者天国)[3]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휴일의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2시 35분경 츄오도리(中央通り 중앙거리)에서 2톤 트럭이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5명을 그대로 덮쳤다.[4] 트럭 운전자는 맞은편 차선에서 오던 택시로 돌진해서 부딪친 후 차에서 내렸다.

경찰관과 행인들은 처음엔 단순 교통사고인 줄 알았고 트럭에 치인 사람들을 구하러 근처로 다가왔다. 이 때 범인은 준비해 둔 단검을 빼들어선 괴성을 마구 질러대며 눈 앞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다.[5] 테러범은 출동한 경찰관 오기노 히사시(荻野 尚)에 의해 붙잡혔다. 오기노는 맨 처음엔 진압봉으로 대응하다가 범인의 칼에 찔렸지만 방검복 덕분에 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이후 권총을 뽑아서 겨누자 범인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단검을 버리며 투항했다. 이는 불과 10여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최초 피해자 무토 마이는 교통사고라고 생각해서 도와주러 갔다가 살해당했고 거리에서 메이드 복장으로 아르바이트 중이던 여성, 핸드폰 가판대 아르바이트 등 근처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 또한 변을 당했다.

범인은 당시 25세였던 아오모리현 출신 카토 토모히로(加藤智大)로, 기후현의 단기대학을 졸업한 후 경비원·자동차 공장, 주택자재회사의 비정규직 직원, 트럭 운전기사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건 당시 사용한 트럭 또한 도요타의 하청 공장인 간토자동차공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중 렌트한 트럭이었다.

범인은 등산용 나이프 외 5개의 나이프를 더 소지하고 있었는데 사건 이틀 전 밀리터리 수입잡화점에서 구입한 걸로 밝혀졌다. 사건 자체는 2005년 센다이에서 일어난 트럭 폭주 사건에서 범행에 트럭이 이용된 점, 그리고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가나가와 마사히로가 츠치우라 연속살상사건(土浦連続 殺傷事件)을 저지르면서 트럭과 나이프를 이용한 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범인은 2ch(현 5ch)에 1,000건이 넘는 게시물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인터넷 활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갈수록 고립감을 느끼게 되자 결국 6월 8일 새벽 5시 21분에 "아키하바라에서 사람을 죽일 겁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차로 사람들을 치고, 차를 쓸 수 없게 되면 나이프를 사용할 겁니다. 모두 안녕"이라는 내용이었다. 범인이 작성한 스레드와 그와 관련된 2ch 스레드는 대부분 삭제됐지만 당시 다른 2ch 유저들은 범인을 향해 '낚시하지 마라', '할 용기도 없으면서',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식으로 자극했다.[6]

2010년 1월 8일에 1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 과정이 길고 긴 걸로 유명한 일본 법정의 관례로 봐선 이 사건의 재판도 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례적으로 5년 만에 끝났다. 범인은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24일,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

범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으로 미뤄 보아 항소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항소해서 2심 재판이 이어졌다. 국선변호인은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당연히 인정되지 않았고, 2012년 9월 12일 도쿄고등법원 재판부 역시 죄질이 너무 나쁘다는 이유로 그대로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동년 9월 25일 변호인이 상고했으나 2015년 2월 2일 최고재판소에서 상고를 기각하면서 3심까지 간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사형이 확정됐다. # 사실 이보다 피살자가 더 적은 사건의 경우라도 사형이 쉽게 내려지는 판이니 예상된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사법부는 정상참작의 사유가 없으면서 2명 이상을 살해한 자는 예외 없이 사형 판결을 내려 왔다. 또 범인의 죄목인 대량살인이 워낙 흉악하며 범인이 자신의 죄만 인정하지 반성하지도 않는 흉악범이라서 그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나가야마 기준)

결국 범인 카토 토모히로는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수감된 지 14년 만인 2022년 7월 26일 오전 사형이 집행되어 향년 39세로 사망했다. 워낙 죄가 흉악한 터라 그가 사형에 처해졌을 때 일본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다.
후루카와 요시히사 법무대신의 카토 토모히로 사형 집행 후 발표 (마이니치 신문)
사형 집행 관련 뉴스 (니혼 테레비)

3.1. 사망자 명단 및 사인

사망자들의 사인 및 뒷이야기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어)

3.1.1. 트럭 뺑소니

3.1.2.

4. 사건 이후

5. 유사 사건

파일:Hiki Toshiaki.jpg

[1] 혹은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 사건"([ruby(秋, ruby=あき)][ruby(葉, ruby=は)][ruby(原, ruby=ばら)][ruby(通, ruby=とお)]り[ruby(魔, ruby=ま)][ruby(事, ruby=じ)][ruby(件, ruby=けん)])이라고도 한다.[2] 사건 초기 언론에서 야쿠자라고 보도하기도 했지만 오보였다.[3] 한국의 '차 없는 거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4] 이로 인해 후지노 카즈노리, 카와구치 타카히로,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심하게 다쳐 사망하였다.[5] 코이와 카즈히로, 미야모토 나오키, 미츠이 미츠루는 척살당해 과다출혈로 인해 쇼크사했다.[6] 훗날 2015년 미국에서 일어난 움프콰 칼리지 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범인이 4chan에 예고글을 올리자 게시판 스레드에 있던 다른 이들 역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7] 일본어로 '저승'을 이르는 말. '메이드'와 발음이 같다.[후방주의] 해당 링크의 사이트에 여자의 유두까지 적나라하게 나오는 야한 광고가 있으므로 접속 시 주의할 것.[9] 그래서 범인이 이 사건도 의식했다는 설도 나왔다.[10] 실제 범행에 쓰인 차량은 이스즈 엘프였으나 재연에 등장하는 범행 차량은 기아 봉고로 각색되었다.[11] 흉기난동, 사이버 공간에서 자란다[12] 예일식 표기 기준으로 리치항, 한자 독음으로 이지형, 표준중국어로는 리즈헝. 1954년생으로 당시 중증 조현병(구 정신분열증)과 과대망상증 환자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부모로부터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전에도 1976년에 이웃 주민들과 난투극을 벌인 적이 있었다.[13] 일가족으로는 렁와이인(梁惠娟, 양혜연), 레이시우칸(李少芹, 이소근)의 2명. 유치원생 사망자는 로잉시(盧詠詩, 노영시), 풍킨꿕(馮建國, 풍건국), 따이카이남(戴啟南, 대계남), 꽌파이인(關沛恩, 관패은)으로 4명이다.[14] 사건 이후 현재는 석방되었고 홍콩의 어느 정신과 의원에서 치료 중이다.[15]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가 한국에선 군부독재, 군사정권 시기였으며 5개월 전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와 약 2달 전에 일어난 우순경 사건, 심지어 이 사건과 같은 날에 일어난 서대문 세 모녀 피살사건장영자 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묻혀서 신문에도 기사가 전무했으며 얼마 뒤 일어난 유리병 살인사건은 단신으로 보도되었다.[16] 이 과정에서 2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17] 범인은 4월에 해고됐다고 주장했지만 회사 측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도 출근할 예정이었다.[18] 신주쿠역 인근은 한국인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혐한 시위나 범죄의 표적이 된 적이 많다.[19] 성이 "조", 이름이 "선"이다. 외자 이름이다.[20] 실제로는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던 노인과도 마주쳤고 범인은 그 노인도 해칠까 고민하는 듯 가까운 곳에 서 있었으나 노인은 칼을 들고 있는 범인을 보고도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로 계속 걷던 방향으로 흡연하며 걸어갔다. 그러자 범인도 이내 포기했는지 그냥 그를 걸어가게 내버려 두다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기에 중노년 피해자는 없었다.[21] 셋 다 부상을 입었지만 사건 초기에는 그 중 피해자 한 명의 부상이 특히 심각한 수준이라 목숨이 위태롭다고 보도되었는데 며칠 뒤 뉴스에서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보도되었다. 생사의 기로는 아닌 상태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후에도 2주간 사망 보도가 없었기에 회복되어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22] 20대 때 술집에서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머리를 소주병으로 때려서 뇌진탕을 일으키고, 깨진 소주병을 휘두르다가 본인을 말리던 술집 직원도 병으로 찌른 혐의로 특수폭행죄가 성립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게 밝혀졌다. 당시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형생활을 안 했거나 잠시 구속되었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았으니 금방 풀려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험한 물건을 사용하는 특수폭행은 단순 폭행과 달리 초범도 징역이 나오기 쉬운 죄인데, 집행유예가 나온 걸로 보아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합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23] 칼을 2개나 준비했지만 터무니없게도 1개는 택시에 놓고 내려서 잃어버렸다는 게 밝혀졌다. 생각보다 면밀하지 못하고 멍청한 행동을 했던 것.[24] 아키하바라나 신림역 칼부림 사건과 달리 과거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은 이력이 확인되었고, 고등학교도 대인기피증으로 자퇴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시기 이후 검정고시와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 신분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25] 범행 후 하루 동안 사망자가 없었으나 응급수술 및 기타 모든 응급치료 후에도 의식저하 등의 심각한 증상을 보이며 생명이 계속 위독했던 피해자들은 흉기에 습격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동차로 습격당한 피해자들 중 2명이었고, 사건 수일 후 모두 사망했다. 그 중 한 명인 60대 여성 이희남씨는 뒤쪽에서 자동차로 습격당했기에 뇌손상 뿐만 아니라 등쪽 부상, 즉 척추부상으로 인한 척수손상이 추정되어 생명의 위험이 매우 심각해졌다고 보도되었고 뇌사가능성이 높게 판단되어(공식 뇌사 판정은 받지 않았다. 뇌사판정은 진료한 의사 외에도 많은 의료인들이 같이 판단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못하는 거라 시간이 꽤 걸리고, 그 기간동안 환자가 생존해야 하는데, 이 피해자는 그 정도 시간 전에 사망했기 때문.) 피해자의 남편이 언론과의 인터뷰도 하였고 피해자인 부인의 이름도 공식적으로 공개했는데, 사건 3일만에 사망하였다. 다른 한명인 20대 여성은 뇌사상태에 빠져 25일간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가 사망했다. 흉기 피해자들은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은 긴급 이송과 치료로 모두 넘겨서 생존했다. 아키하바라 사건은 차량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들과 흉기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둘 다 있었다. 범행 피해자 수는 유사하나 그 중 사망자 수는 아키하바라가 훨씬 많아 차이가 난다.[26] 첫번째 피해자는 상술된 차량 피해자인 60대 여성 이희남 씨였다. 남편과 산책하던 중 차량에 습격당했는데, 14명의 전체 피해자들 중 가장 먼저 습격당한 피해자(차량 습격사건 현장이 촬영된 근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이 뉴스에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사건 3일 뒤에 사망했는데, 사건 당일 밤에 사망했다는 오보가 뉴스에도 나온 적이 있었다. 사망한 피해자는 범인의 차량에 처음으로 치인 첫 피해자였는데, 범인의 차량에 등을 치어 수미터를 날아가 떨어진만큼 다른 부상과 차원이 다른 심각한 중상이었기도 해서 치료한 의사가 뇌사소견을 낸 것이, 정보전달이 잘못되어 그랬던 것이었다. 뇌와 척추를 모두 심각하게 다쳐 응급수술과 치료 후에도 영영 의식을 찾지 못하고 단 3일만에 사망한 것이다.[27] 두번째 피해자는 사건 25일만에 사망한 20대 여성 김혜빈 씨인데, 역시 차량 돌진의 피해자였고, 뇌사 상태에 있다가 사망했다. 미술 전공 대학생으로 당시 현장 근처의 한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근처에 음료를 사러 가던 중 차량에 습격당했다. 첫번째 피해자는 실질적으로는 뇌사 상태였지만 판정하기 짧은 시간인 3일만에 사망한 관계로 판정받을 시간이 부족하여 뇌사판정을 못 받았는데, 두번째 피해자는 3주 이상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뇌사판정을 받고 사망했다.[28] 이 중 10명이 중상으로 크게 다쳤다. 중상이 아닌 2명은 차량 피해자 1명, 흉기 피해자 1명인데, 차량피해자 1명은 경상이라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아 신원파악이 안 되었고(이 부분 때문에 사건 초기 보도에서 차량 피해자가 4명이라고 보도한 언론이 많았고 총 피해자도 13명으로 오보되기도 하였다. 한명만 병원 긴급이송을 안 했기 때문.), 흉기 피해자 1명은 병원 이송은 되었지만, 팔꿈치 쪽을 칼에 다쳤는데 깊게 찔린게 아니라고 진단되어 기초적인 처치로 치료가 끝나서 수술 같은 외과적 치료를 하지 않았다. 당시 기본적인 상처치료를 마치고 피해자 중 유일하게 당일 귀가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피해자들은 모두 외과적 치료와 입원을 했다.[29] 한 네티즌이 국무총리실에 범인의 글을 신고했었는데,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았다. 당시 범인은 장소나 특정 범행 대상에 대한 상세한 계획은 쓰지 않고 "회칼을 가지고 다닌다"는 글,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라는 글, "이세계로 갈 것이다"라는 글 등 파편적인 형태로 글을 썼었기에 계획성이 약했었기 때문. 하지만 막상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경찰검찰이 태도를 바꿨는데, 이런 식으로 대략적인 살인예고글을 쓰는 사람들도 인지만 하면 죄다 검거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실제로 한달간 200여명을 검거했다. 상세하지 않게 대충 쓴 사람들에게 적용한 혐의가 협박죄였지만, 상세하게 쓴 사람들은 (미성년자만 아니면) 검거 후 살인예비죄나 협박죄로 구속시키게 되어 구속된 사람도 20명이 넘을만큼 꽤 있었다.[30] 이 사건은 트럭(이스즈 엘프 5세대)이 범행에 이용되었고 서현역 칼부림 사건은 경차(기아 모닝 2세대)가 범행에 이용되었다.[31] 두 사건에서 범행에 사용된 차량 모두 범인 본인 소유의 차량이 아니라는 것도 같다. 일본 아키하바라는 범인의 회사 소유 트럭, 한국 서현역은 범인의 모친 소유 자동차였다.[32] 아키하바라 범인은 신림역 범인과 유사하게 정신병력 없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동기(이상동기)로 중범죄를 저질렀지만, 서현역 범인은 체포된 뒤의 조사에서 "온 세상 수많은 사람이 나를 감시하고 스토킹했기에 괴로움에 견딜 수 없어 내가 그 중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경찰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범행 동기를 밝혔고, 정신병원 치료경력이 있던 것이 밝혀졌다. 즉 범행동기가 "망상"이다.(아키하바라나 신림역 살인범의 범죄동기는 수사기관 용어로 "이상동기"라고 부른다.) 범인에게 평소 스토킹을 당한 방식이 뭐냐니까 전자파와 방사선 공격을 당했다는 희한한 진술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사이코패스 검사에서도 신림역 범인 조선과 달리 조사가 불가능한 상태(정신질환자라 못한 것)라서, 경찰 측에서 신림역 살인범과 서현역 살인범은 다른 범행동기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이코패스 검사는 △대인관계 △정서적 문제 △생활방식 △반사회성 등 총 4가지 항목을 프로파일러가 면담해서 결정하는데, 최원종은 이 중 대인관계와 정서적 문제에 대해 면담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라서 사이코패스 판정이 안된 것. 이에 대해 살해당한 피해자의 남편과 사위 같은 유족들은 "범인을 학력 컴플렉스의 피해자로 만들어주고 정신질환자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서사를 만들어주는 현재 사회분위기는 잘못되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이 한평생 착하게 살았던 내 아내(혹은 장모님)를 이유없이 살해한 악질적인 테러살인범일 뿐."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범죄전문가들도 단순히 정신질환에 의한 망상으로 끝나는 동기 외에, 신림역 살인사건에 대한 모방 충동이라는 범죄동기를 무시할 수 없다는 쪽인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에도 치료를 받다가, 코로나19가 전국에 발발한 뒤 3년간 치료를 받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