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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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55년 9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자유도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1]와 슈말칼덴 동맹에 속한 개신교 제후들 사이에 체결된 종교 협약. 이를 통하여 개신교인 루터교회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종교전쟁이 잠정적으로 종식되어 평화가 찾아왔다.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명의로 공표되었으나, 실제로 카를 5세 본인은 이 화의를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카를 5세의 권위와 실권이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카를 5세는 화의 체결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카를 5세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카를 5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는 오류를 범하는 역사 서적들이 많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의 진정한 공로자는 페르디난트 1세였다.
2. 체결 과정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종교를 일원화한다는 명목으로 개신교를 강경하게 탄압했다. 이에 분개한 루터파 개신교 제후들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를 중심으로 1531년, 황제가 약속을 뒤집고 개신교를 탄압하는 데 항의하고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고, 남부의 가톨릭 제후들은 안할트 동맹을 맺어 양측 간의 전운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계속되었고, 카를 5세가 해외에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1530년대 동안 제국 내에서 신구교 간 직접적인 군사 대결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제국의 종교적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1540년대 초에 군사적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그동안 해외에서 전쟁을 하느라 제국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던 카를 5세는 1540년대 중반에 해외의 전쟁이 모두 종식되자 1546년, 대규모 다국적 군대를 동원하여 루터파 제후들에게 군사적 공격을 감행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카를 5세는 개신교 제후들을 모조리 굴복시키고 종교일원화를 선언하여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550년,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같은 자신의 영지에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내려 모든 개신교도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가혹한 개신교 탄압 정책이 이어지자 개신교 제후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 슈말칼덴 전쟁의 승리로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된 카를 5세가 기고만장해져서 신성 로마 제국법과 자신이 제후들에게 내건 약속들을 함부로 무시하자 개신교 측은 물론 가톨릭 제후들까지 불만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를 5세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황제를 물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깨고 아들 펠리페 2세를 황제로 앉히려고 시도했다.[2] 이에 형제간의 굳건했던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제후들은 스페인 출신의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이 사실상 스페인의 속국이 될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다. 1531년에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차기 제위를 보장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형과 달리 원만한 성격을 지닌 실리주의자로 종교 문제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3] 그는 적대 세력인 개신교 제후들과도 친분을 유지했고, 카를 5세의 가혹한 개신교 탄압 정책을 완화하며 제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1529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을 물리쳐 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보호한 공로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은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페르디난트 1세를 차기 황제로 지지했다.
이렇게 제국에서 황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1552년, 작센 선제후 모리츠[4]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결집시키는 한편 샹보르 조약으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까지 끌어들어 들인 후 카를 5세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모리츠의 군대는 남서부 독일을 장악했고 이어 황제가 있는 인스브루크를 급습했다. 카를 5세는 사로잡힐 뻔 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소수의 측근만을 대동한 채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최남단에 있는 국경지대인 필라흐(Villach)로 피신했다. 필라흐에서 카를 5세는 가톨릭 제후들에게 연락하여 병력을 모아 보복전을 치르고자 했으나 페르디난트 1세와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 등 가톨릭 제후들은 모조리 황제의 명을 씹고 카를 5세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카를 5세는 제국에서 모든 개신교도들이 죽임을 당할 때까지 싸우길 원했으나 제국의 영방 제후들은 이미 신구교할 것 없이 소모적인 종교전쟁에 지쳤고 평화적인 화의를 맺길 원하고 있었다. 이에 페르디난트 1세가 직접 신구교 제후들 사이에서 협상을 주도하여 1552년, 파사우 화의가 체결되었고 종교전쟁은 잠정적으로 종식되었다.
스페인으로 도망간 황제 카를 5세는 비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실권이 사실상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음을 깨달은 카를 5세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1553년, 카를 5세는 펠리페 2세를 황제선거에 출마시키지 않겠다고 선언[5]하고, 이어 자신이 그동안 씹었던 제후들의 약속을 뒤늦게 이행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카를 5세는 겉으로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척했지만, 내심 제국에서 다시 실권을 되찾기 위해 은밀히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적 대결(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를 5세는 벨라토르(Bellator)[6]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Albrecht II. Alcibiades von Brandenburg-Kulmbach 1522~1557)[7]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배후에서 이를 지원했다. 알브레히트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와 작센 선제후 모리츠를 포함하여 신구교 제후들이 연합하여 토벌군을 구성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은 알브레히트 2세는 제국 연합군을 크게 무찔렀고 작센 선제후 모리츠까지 전사시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은 1554년, 제국의회를 열어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제국추방령을 선고하였다. 제국의회에서 추방령을 당한 알브레히트 2세는 기세가 크게 꺾여 프랑스로 도망쳤다.
파사우 화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소동을 겪자 제후들은 제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파사우 화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고 공고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파사우 화의을 발전시킨 합의안이 비준되었다. 파사우 화의와 마찬가지로 협상 대상자는 카를 5세가 아니라 페르디난트 1세가 진행했다. 스페인에 있던 카를 5세는 루터파를 공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나 황제는 제국에서 어떠한 실권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화의 체결에 강한 의지를 지닌 페르디난트 1세는 결국 황제의 이름으로 화의를 체결하여 공포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자 극도의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 카를 5세는 이듬해 자진해서 퇴위를 선언하였다.
3. 내용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Cuius regio, eius religio이다. 직역하자면 '그의 왕국에, 그의 종교를'이라는 뜻의 이 라틴어 경구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제후들에게 가톨릭과 루터교 가운데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모든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해당 지역의 제후가 가톨릭과 루터파 신앙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신민들은 이를 군말없이 따라야만 했다.[8] 덧붙여서 브레멘, 도나우뵈르트를 비롯한 다수 제국자유도시에서는 가톨릭과 루터교의 공존이 인정되었다.[9] 다만 60여 개 제국 도시 중에 50여 개는 완전히 개신교로 기울고 레겐스부르크를 포함한 2개 도시만이 가톨릭 우세로 남았기에 가톨릭에 유리한 합의였다.또 Corpus catholicorum 과 corpus evangelicorum의 생성으로 종교법이 분립되면서 가톨릭 교황청은 교리 입법권자로써 위상과 권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에 반해, 자유도시와 국가의 권력은 상승하였으며, 제국 전체 인구의 90%가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10] 마지막 조항은 카를 5세의 퇴위를 약정한다.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카를 5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11], 제위는 결국 1556년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로 돌아갔다.
문제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루터파 뿐이었으며, 이 당시 한창 유럽에서 세를 확장해나가고 있던 칼뱅파는 여전히 그 존재를 부인당했다. 결국 칼뱅파에 대한 어정쩡한 처리가 빌미가 되어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고, 16~17세기 유럽을 점철한 피비린내 나는 종교 갈등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끝났다.[12]
4. 관련 문서
[1] 당시 황제 카를 5세는 슈말칼덴 동맹에 쫓겨 스페인으로 도망간 데다가 화의를 거부했다.[2] 각종 반란과 외침 등 안팎으로 수많은 위협에 시달리던 카를 5세는 혼자서 도저히 여러 영지를 동시에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통치에 필요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주면서 제국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처리하게 하였고 1530년, 페르디난트 1세의 독일왕 선출을 지지하여 동생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페르디난트 1세는 30년간 형에게 충성하며 형을 대리해서 제국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국내외의 적들을 모두 제압하자 약속을 물리고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시도했다.[3] 다만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 종교 문제에 관대했던 건 어디까지나 헝가리 왕국을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에서 개신교 제후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페르디난트 1세도 가톨릭으로 종교가 유지되어야한다는 기본 원칙은 고수했고, 나중에 주변이 안정되자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에 예수회를 초빙해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했다.[4] 전직 작센 공작이자 마이센 변경백으로 슈말칼덴 전쟁 후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5] 카를 5세가 이미 차기 황제로 내정된 페르디난트 1세를 내치기 위해 어떻게든 새로 선거를 치르게 된다 하더라도 선제후들이 펠리페 2세를 황제로 뽑을 가능성은 없었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카를 5세가 스스로 이런 선언을 하게 된 것.[6]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뜻[7]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 방계로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의 6촌이자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조카였다.[8] 제후의 종교가 부족의 종교를 결정하는 것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갈 무렵 기독교로 개종하던 게르만 족장 시대부터의 전통이었다. 제후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주할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이주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 또한 인정되었다.[9] 당시, 이미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종교가 한 도시에 공존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는데, 이러한 우려는 1606년에 벌어진 도나우뵈르트 사건이 발발함으로써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10] 가톨릭 인구가 1/3까지 회복한건 강제력과 신교도 지역에 가톨릭 제후 복귀로 인한 30년 전쟁 이후이다.[11] 신성 로마 제국은 선출제라는 것을 기억하자. 황제는 3명의 성속제후인 마인츠·트리어·쾰른 대주교와 4명의 세속제후인 작센·팔츠·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및 보헤미아 왕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심지어 보헤미아 왕은 페르디난트 1세였다.[12] 사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도 온전한 끝은 아니었다. 특히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할아버지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위그노들에게 무지막지한 탄압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