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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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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성 혐오 표현 에세이

1. 개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논란을 정리한 문서.

2. 여성 혐오 표현 에세이

몸집이 작고, 어깨가 좁고, 엉덩이가 넓고, 다리가 짧은 인종[1]에게 아름다운 성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적 충동에 의해 지성이 흐려진 남자뿐이다. 성의 아름다움 전체가 이 충동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부르는 대신에, 미적이지 않은 성으로서 여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훨씬 많다.
『소품과 부록』의 「여성에 대하여』 중에서.[2]
쇼펜하우어는 근대철학자 중에서도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판을 자주 받는 편인데, 『소품과 부록』[3]의 「여성에 대하여 (Über die Weiber)」 이라는 에세이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4] 그는 이 에세이에서 "여성은 유치하고, 천박하며, 근시안적이므로 어린 아이들 수준에 맞는 간호사선생의 역할에 딱 어울리"며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된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걸맞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자들은 마음속으로 돈을 버는 것은 남자의 일이고 그것을 쓰는 것은 자신의 일"이라는 믿음이 마음속 깊게 박혀 있고, "재능이 있을지는 몰라도 항상 주관적이고 감정에 휘말려 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이 요구되는 천재는 될 수가 없다"고 단정짓는다. 게다가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교활함과 거짓말이 타고났으며", 이런 까닭에 "여성의 근본적인 결점은 정의감이 없다"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5]

쇼펜하우어는 일부일처제도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것은 "남성의 권리는 절반으로 줄이면서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이 결혼하는 이유는 "성적 충동으로 남성의 지성이 흐려져서다."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도 좋지 못한데,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모든 여성이 부양을 받는 반면, 일부일처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결혼할 여성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 수많은 여성이 생계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양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 그나마 "상류층 여성은 노처녀로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하류층 여성들은 감당하기 힘든 중노동을 하며 살아가거나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또한 여성이 현실적 조건에 맞춰 결혼을 하더라도, 인간은 본성상 "자신에 대한 타인의 견해를 너무 지나치게 중시"하므로, 타인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현실에 여성은 불명예스럽고 서글픈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남성의 조건을 깐깐하게 따진다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은 남성과 억지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거나 평생 노처녀로 시들어 가다 죽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남성들간의 동성애를 옹호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세 번째 확장판(1859) 「성애의 형이상학」에 관한 장에 추가한 부록에서 쇼펜하우어는 "남성들간의 동성애(pederasty)가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이점이 있다"고 쓴다. 노년의 성욕이 동성애로 감으로써 고령 출산으로 인한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이 악덕[6]은 자연의 목적과 결과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관심사인 문제에서 보다 큰 악[7]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것은 실제로 바로 이 목적들에 기여한다"고 진술한다. 쇼펜하우어는 젊은 때의 동성애 보다 나이 들었을 때의 동성애가 많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

단, 그가 이러한 글을 썼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바로 친어머니와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돈과 명예만을 보고 결혼한 어머니[9]가 줄곧 병약했던 아버지를 돌보기는커녕 파티만 즐겼었다는 것[10]이 평소에 못마땅했었는데, 아버지의 자살 이후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사교계에서 활약을 시작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지면서 여성혐오적 성향이 그에게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참석한 여성들로부터 늘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받았던 것(쇼펜하우어도 파티장에서 어머니의 남친 등에게 시비를 걸어 파티를 망치는 일도 있었다)[11]과 어머니가 여동생 아델은 극진히 아끼면서 자신에게는 매정하게 대했던 것[12][13] 등 주변 여성들로부터 받은 여러 부정적인 경험들로 인해 그 혐오가 더욱 짙어지게 된 것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가 쇼펜하우어에게 시비를 걸고 화가난 쇼펜하우어가 그 여자를 밀치자 그 여자는 이를 법정에 고소하여 합의금을 타내기도 하는 등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쇼펜하우어가 연애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는데, 몇 명의 여자와 연애를 해보긴 했으며,[14] 50살에는 뜬금없이 10대의 어린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기도 했었다.[15] 그러나 그는 결혼은 평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독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도 유명해진 말년에 이르러선 조금 바뀌는데,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책에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여성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이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다. 사실, 자신의 욕망과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을 대할 때 그런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당시 여성들에게 묘한 위안을 가져다 주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그는 유명해짐에 따라 그를 보러온 여러 재능있는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면서 여성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편견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친구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성에 관한 저의 최종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여자가 대중을 멀리하거나 대중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 여자는 끝없이 성장해서 남자 이상이 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16]

[1] 여성을 가리킨다[2] It is only a man whose intellect is clouded by his sexual impulse that could give the name of the fair sex to that under-sized, narrow-shouldered, broad-hipped, and short-legged race; for the whole beauty of the sex is bound up with this impulse. Instead of calling them beautiful there would be more warrant for describing women as the unaesthetic sex.[3] 한국에서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으로 번역되어 있다.[4] Based on his essay "On Women" (Über die Weiber), Arthur Schopenhauer has been noted as a misogynist by many such as the philosopher, critic, and author Tom Grimwood. In a 2008 article published in the philosophical journal of Kritique, Grimwood argues that Schopenhauer's misogynistic works have largely escaped attention despite being more noticeable than those of other philosophers such as Nietzsche. (Thomas Grimwood, 『The Limits of Misogyny: Schopenhauer, "On Women"』)[5] 하지만 쇼펜하우어 자신도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그 이자로 평생을 살았으며, 타고난 불안증과 강박증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툴렀고, 연민의 사상을 펼쳤으나 가족과의 다툼과 시민혁명에 대해서는 연민을 억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고 노력했었으므로 정의감이 투철하다고도 볼 수 없다. 또한 카페에서 매번 감정적 토론을 펼치면서 객관적인 진리를 무시하고 인신공격과 논리적 오류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이기는 것을 즐기기도 했으며, 복종에 맞서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장했으나 자신의 어머니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했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여성에 대하여」 라는 에세이는 이를 연구하는 많은 비평가와 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Thomas Grimwood, 『The Limits of Misogyny: Schopenhauer, "On Women"』 참조)[6] 남성들간의 동성애, 즉 남색을 말한다.[7]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8] 한국에서 번역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는 「성애의 형이상학」 파트를 빼기도 하거나, 이 부분이 없는 제1판을 기준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확인하려면 원문을 보면 된다. 독일어 원문[9]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쇼펜하우어의 아버지)와의 결혼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그녀의 부모는 그와 결혼을 하라는 강요는 일체 하지 않았고,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자기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자발적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애초에 사랑이 아닌 돈과 명예를 보고 결혼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요구했던 열렬한 사랑을 주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10] 당시 그녀는 병환에 시달리던 남편을 돌보기는커녕 그의 재산을 가지고 파티를 즐기는 데에 주력했고, 집안에 종사하던 하인만이 그를 돌보았다.[11] 그렇다고 쇼펜하우어는 여성들을 험하게 대하거나 아예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아델만큼은 잘 대해줬으며 여성과 연애를 할 때도 상대방을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다.[12] 요한나는 자신의 아들과의 유일한 연락 방식이었던 편지를 통해 그의 비관주의적이고 오만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고 괴롭다는 내용을 담아 그에게 불만을 종종 표출했다. 심지어 그녀는 아들이 쓴 편지들을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었다.[13] 그러나 이 둘 사이의 편지도 머지않아 끊겼는데, 쇼펜하우어가 여동생 아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책임이 크다고 비난한 내용을 요한나가 읽어 완전히 아들과의 소통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요한나와 만나고자 몇 번 시도를 했으나 그녀 쪽에서 거절을 했고, 요한나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으로 그녀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요한나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이러한 갈등은 속절없이 지속되었고 요한나는 죽기 직전 자신의 딸 아델을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을 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아들을 싫어했다.[14] 전기에 따르면 많은 여자와 연애를 한 것이 아닌 소수의 여자와 연애를 했다. 근데 그 연애도 짝사랑에 가까운 연애.[15] 장난으로 한 프로포즈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꽤나 충동적인 프로포즈였던 것으로 보인다. 쇼펜하우어 전기 작가 뤼디거 자프란스키에 따르면, 프로포즈를 받은 10대의 여자는 옆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6] 뤼디거 자프란스키, 『쇼펜하우어 : 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2020, p.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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