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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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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outh–North_Water_Transfer_Project_Central_route_starting_point_taocha.jpg
'현대판 대운하' 공사의 결과라 하는 타오차 운하 (陶岔渠)
파일:Hnxcxys_(3).jpg
중국 선종 임제종의 주요 사찰이자 당선종이 은거하던 고찰인 향엄사 (香严寺)의 산문. 최근에 불탄 것을 재건했다.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근세2.4. 근현대
2.4.1. 완서연방2.4.2. 동란기
2.5. 격동의 현대사
3. 기타

1. 개요

淅川
영어 Xichuan

허난성 난양시의 현. 난양 서쪽 100km 지점 한수의 지류인 라오관 강 (淅川, 석천)동안의 분지에 위치하고, 인구는 약 54만명이다. 중국의 최대 저수호 중 하나인 단장커우 호에 접허며, 화베이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타오차 운하 (陶岔渠)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옛 지명은 상밀 (商密), 순양 (順陽), 석양 (析陽), 석주 (淅州) 등이고 남쪽의 수몰지에 초나라의 첫 수도인 단양 (丹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무렵 현 지명이 정해졌으나 종종 북쪽의 시샤현에 병합되다가 15세기에 산서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현이 재설치되었다.

19세기 들어 염군, 태평천국의 공격에도 경제적으로 발전하였고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중화민국 초기 비적들의 공격으로 쇠퇴하다 자치 지역인 완서연방 (宛西联防)의 일부로써 빠른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했고, 중일전쟁 말엽에는 항일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남수북조 (南水北调)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도 면적에 달하는 2천 km2가 수몰되고 30만의 이재민이 나오는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1945년 일본군의 침공, 60년대의 문화대혁명과 1973년의 지진 등 격동의 현대사를 보냈다. 최근인 2011년에도 단장커우 호의 수위 상승으로 16만의 실향민이 나왔다. 이러한 시촨이민 (淅川移民)은 싼먼샤 댐을 초월하는 중원 지역 최대 규모 실향민 사태이다.

중국의 주요 고추 생산지 중 하나인 정도로 농업이 주를 이루나 풍부한 광물을 바탕으로 한 광공업도 발달하였고, 호수에는 민물고기가 풍부하다. 범려, 범운, 범엽, 범왕 등을 배출한 순양범씨의 원적지로 범려공원이 있다. 현대의 출신 인물로는 대만의 시인 주몽접 등이 있다. 옛 현성 일대가 수몰되었기에 볼거리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다. 관할지 내에 샤스고분군 등 초나라 시기 유적이 꽤 있고, 서쪽 50km 지점의 청나라 시기 상업촌인 징즈관진 (荆紫关镇), 남쪽 40km 지점 단장커우호 서안의 자젠 협곡 (坐禅谷) 및 당대의 고찰인 향엄사 (香严寺) 등이 있다. 험난한 지형과 호수 때문에 현재에는 철도 교통이 없지만, 역이 있는 단장커우시 및 시샤현을 이어주는 단시철도가 건설 중이다.

2. 역사

파일:王子午升鼎_20160924.jpg파일:Bronze_jin_from_Henan.jpg
샤스고분군에서 출토된 초나라 시기 유물들

인근 산지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요순시대 요의 아들 단주가, 서주 시기 초나라의 초대 국군인 웅역이 일대에 봉해졌다. 따라서 초나라의 첫 수도인 단양 (丹陽)은 남쪽 20~30km 지점의 단장커우 호의 수몰지에 있었다가 후일 영 (징저우시)으로 옮겨졌다. 한편, 서쪽 40km 지점의 단장 (단수) 강변에는 약 (鄀)나라의 수도 상밀 (商密)이 있었다. 초, 진 양국에 시달리던 약나라는 남쪽의 상약 (현 이청시)으로 천도했다가 결국 초나라에 병합되었다.[1]

전국시대에 단양 일대는 진나라와 초나라의 국경지대였고, 상오 (商於)라 불렸다. 기원전 312년 진의 책사 장의는 초나라에 제와의 동맹을 끊는다면 상오 6백리의 땅을 돌려주겠다 하였고, 이에 초회왕이 응했으나 6리의 땅만을 준다 하자 노하여 출병하였다. 이로써 벌어진 단양-남전 전투는 진의 대승으로 끝났고, 이후 초회왕은 진나라가 협상하자며 초청하자 그에 응했다가 사로잡혀 객사한다.

2.1. 고대

진나라의 통일 후 일대에는 단수현 (丹水縣)이 설치되었고, 그 치소는 상밀에 있었다. 전한 시기 단수현은 형주 남양군 하에 있었고, 남쪽 40km 지점의 현 창팡진[2]에는 순양현 (顺陽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31년 한경제의 5대손 유공[3]이 순양을 영지로 하여 순양후에 봉해졌다가 신나라 건국과 함께 폐지되었다. 비슷한 시기 재상 공광이 박산간열후에 봉해지며 순양현은 박산현 (博山縣)으로 개칭되었다.

후한 말엽인 208년,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후 남양군의 서부를 분리해 남향군 (南鄕郡)을 신설하자 순양 & 단양현도 그에 속하였다. 서진 시기인 289년, 사마의의 손자 사마창이 순양왕으로 봉해지며 남향군은 순양국 (順陽國)으로 바뀌었다. 한편 순양현에서는 사마망이 순양후 (264~265년), 단양현에서는 사마목이 단양현후를 지냈다.(277~280년) 둘다 사마의의 조카들이었다. 동진 시기에는 순양군 (顺陽郡)이었고, 유송시기에 남향군으로 돌아갔다가 남제 시기 종양군 (從陽郡)으로 개칭되었다.

2.2. 중세

파일:24496398.png
당대 남양 혜충이 세운 향엄사의 주요부
파일:Hnxcxys_(10).jpg
840 ~ 846년간 당선종이 숨어있던 향엄사의 옛 벽화

이후 북위가 정복하여 재차 순양군이 되었다가 석양군 (析陽郡)으로 개편되었고, 이때 동남쪽 20km 지점의 현 마덩진에 동석양현 (東析陽縣)이 설치되었다. 서위 시기 석양군과 함께 석주 (析州)가 설치되었고, 서석양현 (西析陽縣)을 내향현 (内乡縣)으로 개칭했다. 이때 동석양현이 석천현 (淅川縣)으로 개칭되어 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북주 시기 석주는 석주 (淅州)로 개칭되었고, 내향현에 치소를 두며 동석양현을 그에 병합시켰다. 수나라 건국 직후인 581년, 석양군이 폐지되었다 605년 복구되었다. 다만 당나라 시기인 620년, 석양군은 완전히 폐지되어 석주만이 남았다. 이때 석천현이 재설치되어 단수, 순양현과 함께 석주를 구성하였다. 634년 석주가 폐지되자 일대는 산남동도 (山南東道) 등주 (登州)에 소속되었다. 이후 5세기 가량 유지되었고, 금나라 시기 석천현은 재차 내향현에 병합되었다.

2.3. 근세

파일:Jzgz_(12).jpg파일:Jzgz_(7).jpg
징즈관진 (형자관진)의 옛 누각과 섬서 상인 회관

1428년, 산서성에 기근이 들자 10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남양 일대로 이주하며 석천에도 다수가 유입되었다. 1465년 3월, 하남 서화 출신의 유통이 석천 일대의 유랑민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난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명 조정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1470년 봄 우부도어사 원걸이 순무사로 파견되었다. 빈민을 구제하고 일대를 시찰한 원걸은 내향현의 관할지가 너무 넓어서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 유랑민들의 관리를 위해 석천현의 재설치를 건의하였다. 이는 수용되어 같은해 남양부 (南阳府) 등주 (邓州) 소속의 석천현이 설치되었다. 석천현성은 옛날처럼 마덩진에 있었으나 1471년, 북서쪽의 현 라오청진으로 이전되었다. 동시에 문묘가 건립되었다. 1476년 석천현은 운양무치도찰원 (鄖阳抚治都察院) 관할에 놓였다. 유민들의 땅답게 1633년 10월, 석천은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처음으로 점령한 현 중에 하나가 되었다.

청나라 시기인 1680년, 무양무치도찰원이 폐지되었고 남양부 동지 (同知)가 석천에 배치되었다. 18세기 들어 현 시가지의 서북쪽 50km 지점의 단수 강변에 위치한 형자관진 (징즈관진)이 관중과 형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써 상업적으로 발전하였기에, 1802년 부장 (副将) 및 도사 (都司) 등이 설치되었다. 1827년, 형자관진에는 천총 (千总)이 추가 배치되었고 남쪽에는 토성도 세워졌다. 석천현 남쪽의 이관교진 (옛 순양현, 현 수몰지)에도 천총이 배치되었다. 명대에 음양학, 의학교 설립된 것이 이어 청나라 시기 석천현에는 3개 서원과 여러 개의 기타 사립 학교들이 있었다. 1832년 석천현은 석천청 (淅川廳)으로 승격되었고 하남여광석도 (河南汝光淅道)에 속하였다.

1857년 염군 수령 강태림이 이관교진을 공격해 부자를 죽이고 빈자를 구휼하였다. 1862년 3월에는 태평천국군이 내향에서 남하하여 석천현성을 포위했으나, 며칠 간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대신 형자관진을 점령하였다. 1864년 3월에는 이관교진에서 염군과 태평천국군이 군세를 합치자, 일대 주민들이 적극 합류하여 10만에 달했다. 하지만 태평-염군은 1868년까지 모두 진압된다. 1905년, 신임 하남순무사는 내향-석천 일대에 교회가 많은 것을 확인하고 통제 강화가 필요하다 여겨 석천청을 석천직예청 (淅川直隷廳)으로 승격시켰다. 한편 현승 (縣丞)은 형자관에 배치되었고, 하남승선포정사사 (河南承宣布政使司)에 소속되었다. 이 무렵 일대의 서당들은 근대 학교들로 전환되었다.[4]

2.4. 근현대

파일:Jzgz_(13).jpg
청대 마을이 그대로 보존된 징즈관진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2월에 전자걸 (全子杰), 금로초 (金橹樵), 송연방 (宋莲舫) 등 현지 인사들이 혁명에 동조하며 석천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듬해 석천청은 석천현으로 환원되었고, 1915년 현지 청년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만국 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3년 말, 보봉토비 노양인 (장경)이 이관교진을 점령하고 4천여 주민을 학살하였다.

2.4.1. 완서연방

1929년 9월, 남양분지 서부의 석천-내향-진평-등현이 완서연방 (宛西联防) 혹은 완서자치 (宛西自治)를 결성해 공동 방비에 나섰다. 우선 민병대 창설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 수준의 안보 확보한 후, 완서연방 지도부는 삼자주의 (자위, 자치, 자부)에 입각한 개혁에 나섰다. 학교 및 저수지 등 기간 시설 건설, 토지세 정비, 저금리 사업자 대출 등으로 완서연방 지역은 경제 및 교육적으로 중국의 선진 지역이 되었다. 광서, 산서 군벌도 롤모델로 삼기 위해 시찰할 정도로 발전하던 완서연방은 주도 인사인 팽우정, 별정방이 지주 혹은 국민당에게 암살당한 후 구심점을 잃고 1943년에 중화민국 직할 지배가 부활하였다.

2.4.2. 동란기

중일전쟁 말엽, 석천은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 1940년 5월, 일본군이 석천현성을 폭격했으나 침공은 없었다. 1944년 6월에는 대륙타통작전으로 하남성이 초토화되자 카이펑의 하남대학이 형자관진에 임시로 피신해오기도 했다. 1945년 봄, 일본군은 석천에 공세를 가하여 4월 초에 현성 (라오청진)을 장악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중화민국군은 인근에서 강력히 저항했고, 4월 말엽 미군 P-15 전투기의 지원 하에 현성 서쪽의 응조산 (잉자오산)에서 3일간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 4천 전사자를 안겼다. 일본군은 8월 17일에야 석천을 떠났다. 국공내전기인 1947년 겨울, 국민당 장군 첸중화는 만여 농민을 모아 공산군에 대항할 성을 쌓았다. 그럼에도 1948년 5월, 공산군이 일대를 점령하고 남양지구행정공서 소속 석천현인민민주정부를 설립하였다.

2.5. 격동의 현대사

파일:W020191216623456432096.jpg
남중국의 풍부한 물을 건조한 북중국에 대는 남수북조 공정도

1959년 대약진운동 준 남수북조 (南水北调) 사업의 일환으로 단장커우 저수지 (丹江口水库)의 건설이 추진되자 기존의 현성은 단수 (단장)의 범람으로 인한 수몰지에 걸치게 되었다. 따라서 8곳의 새 현성 후보지를 물색한 결과, 동북쪽 40km 지점 라오관 (석천) 강변의 상지진 (上集镇)으로 결정되었다. 1960년 8월, 저수지가 완공되자 55만 에이커의 농지가 수몰되었다. 이로써 시촨현은 7억 위안의 경제적 손실을 봤으나, 중앙정부의 보상액은 1억 위안에 그쳤다. 20만의 실향민 중 2만여명은 칭장고원으로 이주되었다가 수천이 사망한 끝에 돌아왔고, 대부분은 중샹시의 습지를 개간하여 정착하였다.

1966년 6월에는 현지 고등학생들이 휴학에 나서며 문화대혁명에 동참했고, 8월부터 홍위병들이 일대의 문화재를 파괴하며 혼란을 가져왔다. 1968년 5월에는 시촨현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72년에는 덩현에 속했던 573개의 생산대가 시촨으로 이전되었다. 이듬해 11월, 규모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주택 300여 채가 붕괴하는 등 300만 위안의 피해가 발생했다. 1978년부터는 징즈관 공사와 후베이성 윈현양시 공사 간에 물 관리를 두고 수차례 분쟁이 벌어졌다. 일련의 고초를 겪으며 시촨의 경제는 쇠퇴했고, 1944년 허난의 주요 대학들이 피신할 정도로 발전했던 교육 역시 침체되었다.

3. 기타

파일:Hnxcxys_(5).jpg
자젠 협곡의 폭포

종종 쓰촨 (사천) 지명과 혼동되는데, 심지어 그 다른 이름인 씨촨 (서천)과는 발음이 유사하여 주의해야 한다.
시촨 주민들은 베이징 시민들이 식수를 마음껏 쓰는 것은 30만 시촨인들의 피눈물에 의한 것이라며, 화베이 인들은 시촨의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촨현 박물관의 설립에는 현대 중국의 유명한 학자 겸 소설가 궈모뤄가 가담했다.


[1] 기원전 506년, 오나라에게 영을 파괴당한 초나라는 상약으로 임시 천도하고 북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2] 정확히는 수몰된 리관차오진 (이관교진)[3] 한경제-유기-유현-유통평-유음-유공[4] 지금도 시내, 징즈관 고등학교들의 연혁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