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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3:56:46

완안함보

시조(금)에서 넘어옴

금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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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추존 황제
완안함보 | 完顏函普
묘호 시조(始祖)
시호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完顏)
함보(函普)
생몰 기간 ? ~ ?
재위 기간 941년 ~ 960년(복간수 완안부 추장)

1. 개요2. 생애3. 기록4. 여담5.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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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톡토 테무르의 주도로 편찬된 정사(正史)인 《금사》(金史) 등에 등장하는 인물. 아우 보활리와 함께 9세기 통일신라 혹은 10세기 고려에서 살다 이주하여 복간수 유역의 완안부에 정착해 이후 일부 여진족 세력(완안부)의 추장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0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후손인 금 태조[1] 여진족 세력을 규합해 금나라를 세우자 이후 1136년 금의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고, 1142년에는 그의 묘가 광릉(光陵)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듬해인 1143년에는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

2. 생애

이름은 흔히 함보라고 알려져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사서마다 달라서 《대금국지》,《송막기문》[2]에는 감복(龕福), 《흠정만주원류고》에는 합부(哈富) 또는 함보(函普), 《신록기》에서는 긍포(掯浦)로 기술하고 있다. 성씨에 대해선 완안씨가 가장 정설이긴 한데, 《금사》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송막기문》에서는 완안씨, 《고려사》에서는 김(金)씨로 기록되어 있다.[3][4]

완안 함보가 여진 부족으로 넘어가기 전 국적에 관련된 기록은 신라고려, 이렇게 두 가지의 이설로 나뉘는데 사실 둘 다 한반도 지역에서 넘어왔다는 뜻으로 보자면 동일한 의미긴 하다. 일단 《금사》에서는 여진에 정착한 고려인, 《송막기문》에서는 성이 완안씨인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당시 여진어로 성은 모우무거(moumugə, 謀克)였고, 명대에는 무쿤(mukūn, 穆昆)으로 음이 변했다. 하라(hala)는 무쿤(mukūn)보다 넓은 씨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대청 제국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에서 '아이신'이 '무쿤'이었고, '기오로'가 '하라'였다.

이렇게 국적이 사서마다 신라 혹은 고려로 다른 이유는, 그가 신라-고려 교체기라고도 할 수 있는 후삼국시대에 가까운 시기의 인물이었는데 기록이 주로 고려 시대에 남았기 때문에 대충 한반도 출신임을 가리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함보가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9대조라면[5] 1세대 30년으로 추산하면 대략 800년대[6] 인물이 될 수 있고, 이때 한반도의 왕조는 통일신라였을테지만, 기록이 남은 시기는 특히 《금사》가 기록된 건 금나라 멸망 이후로 이때 한반도는 이미 고려였기 때문에 고려로 표기된 것일수도 있다. 애매한 부분.

함보가 한반도에서 여진으로 나아갈 때 이미 나이가 60살이었다고 한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 고려에 남았다.[7] 《금사》와 《고려사》는 기록이 조금씩 다르지만 금나라 시조 기록에서 불교, 승려 관련 기록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연계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함보는 동생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한반도를 떠나 완안부에 정착했는데, 《금사》에 의하면 당시 완안부는 총 태신특보수(泰神忒保水), 신은수(神隱水), 복간수(僕幹水), 야라로(耶懶路)의 4개의 소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함보는 복간수 완안부에, 보활리는 야라로 완안부에 정착했다고 한다.

여기서 함보는 당시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완안부에서 질서를 세우고 싸움중재추장이 되었고, 나이 60살이 되도록 아직 시집 가지 않은 여자[8]에게 장가들어 오로(烏魯)와 알로(斡魯)의 두 아들과 딸 주사판(注思版)을 낳아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보활리 역시 야라로 완안부의 추장이 되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3. 기록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처음 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 세에 이르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신봉했으며, 고려에 남아 따라오지 않았다. 아고내는 말하기를 “후세 자손이 유능하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것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직 아우 보활리(保活里)만이 시조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시조는 완안부의 복간수 물가에 거주했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했다. 그 뒤 호십문이 갈소관을 태조에게 바치며 귀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조상 세 분 형제가 서로 헤어져 떠나갔는데,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 금사 본기 제1 세기/ 국역 금사 1권 31~33쪽
“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
4년(1216년) 2월에 당시 상서성이 보고하였다.
“요동선무부사 완안해노가 말하기를,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 금나라)가 고신(高辛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 중국 한족의 전설적인 시조이자 신)의 후예라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유관부서에 물었고 장행신(張行信)은 보고하여 말하였다.
“시조실록(始祖實錄)을 살피건대 단지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일컬었을 뿐이고 고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왕회가 말한 것을 돌아보건대 다만 광망(매우 잘못된)한 언어일 뿐입니다.”
황제(금나라 선종宣宗)는 그(장행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 열전 제45 장행신/ 국역 금사 4권 214~215쪽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송막기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女眞)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平州)의 승려 김행(金幸)[9]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권14 사 <세가> 예종 10년(1115) 을미년

4. 여담

어떻게 보면 이성계 여진족설의 반대 버전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성계 여진족설은 관련 증거가 거의 전무해 뇌피셜로 취급되는 반면, 이쪽은 상기되어있듯 한국, 중국측 사서 모두에 그 내막이 적혀있다. 다만 금 시조가 고려계인 것과 별개로 여진족 신라인설도 정설이라고 보긴 어렵다.

5. 계보

완안부의 추장
(초임) 시조 경원제 완안함보 현덕제 완안오로

[1] 즉, 여진과 신라/고려 혼혈이라 볼 수 있다.[2] 남송 사람 홍호가 금나라에 억류되었던 시기를 기록한 당대 기록이다.[3] 다만 고려사에선 '혹왈'(或曰)이란 표현을 써서 편찬자조차도 함보의 성씨에 대한 정확성을 보증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고려사절요》에서도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혹은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이 함보와 동일인물로 나온다. 물론 이 내용도 혹왈이다.[4] 완안씨가 가장 정설인 이유는 후손들이 완안씨를 썼기 때문이며, 아무래도 《고려사》보단 편찬 시기가 빠른 《송막기문》에서도 완안이라 썼기 때문이다. 물론 함보가 완안부 추장이 되기 전엔 다른 성씨를 썼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지만, 사실 당대 삼국부터 남북국을 통틀어서 한반도계 국가에선 중앙귀족들을 제외하곤 성씨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함보 또한 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원래 성씨는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5] 6대조란 말도 있다.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이 필요한 부분.[6] 시대가 시대인 만큼 1세대 20년이 적당하다는 시각도 있다.[7] 관련해서 재미있는 내용이 금사에 전해진다. "호십문(胡十門)은 갈소관 사람으로 아버지 달불야는 요나라를 섬겨 태위가 되었다. (중략) 호십문은 족인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여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8] 《신록기》에서는 그녀의 성씨가 결도고단(結徒姑丹)씨로 60세가 아닌 40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9]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