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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21:25:20

시모 해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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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리스토 뤼티 우르호 케코넨 아돌프 에른로트 타르야 할로넨
6위7위8위9위10위
아르보 윌푀 미카엘 아그리콜라 장 시벨리우스 알렉시스 키비 엘리아스 뢴로트
11위 ~ 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마티 뉘캐넨 배이뇌 밀뤼린네 빌레 발로 랄리 배이뇌 린나
16위17위18위19위20위
리누스 토르발스 스페데 팔사넨 펜티 린콜라 토베 얀손 베이코 후르스티
21위22위23위24위25위
파보 누르미 민나 칸트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요한 빌헬름 스넬만 헤르타 쿠시넨
26위27위28위29위30위
아르토 사리 미나 실란페 베이뇌 탄네르 루키나 하그만 크리스트프리드 가난데르
31위32위33위34위35위
미카 발타리 미카 해키넨 알바 알토 에우겐 샤우만 타피오 라우타바라
36위37위38위39위40위
에이노 레이노 야코 푀위리 오토 빌레 쿠시넨 유이케 레스키넨 안데르스 쉬데니우스
41위42위43위44위45위
우노 퀴그나에우스 야리 리트마넨 카트리 헬레나 칼라오야 파니 루코넨 안넬리 예텐메키
46위47위48위49위50위
카를 파체르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마우노 코이비스토 헬레네 셰르프베크 레이노 헬리스마
51위52위53위54위55위
요르마 올릴라 라우리 퇴르니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라이트 아른트 페쿠리넨 타우노 팔로
56위57위58위59위60위
악셀리 갈렌칼렐라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 퀴외스티 칼리오 파보 루오찰라이넨 라르스 레비 라에스타디우스
61위62위63위64위65위
라세 비렌 헬비 시필래 위리외 칼리넨 아르투리 일마리 비르타넨 날스아슬락 발케아패
66위67위68위69위70위
아르미 쿠셀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아키 카우리스매키 칼레 패탈로 파보 리포넨
71위72위73위74위75위
아우로라 카람친 사카리 토펠리우스 알리 바이티넨쿠이카 시모 해위해 야코 일카
76위77위78위79위80위
아르토 야바나이넨 레나 팔로티에 카리타 마틸라 베이코 하쿨리넨 헬레 카닐라
81위82위83위84위85위
올라비 비르타 하누 살라마 어윈 굿맨 라일라 키누넨 아르비 린드
86위87위88위89위90위
키르스티 파카넨 라린 파라스케 마틸다 브레데 에르노 파실리나 안티 투이스쿠
91위92위93위94위95위
아니키 태흐티 엘리사베트 레흔 에사 사리넨 마이유 게브하르드 칼레비 소르사
96위97위98위99위100위
악셀 아이로 라우리 윌뢰넨 라이모 헬미넨 아르미 라티아 베이코 시니살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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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 해위해
Simo Häyhä
파일:Simo Häyhä.jpg
출생 1905년 12월 17일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비푸리주
라우티애르비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비보르크)
사망 2002년 4월 1일 (향년 96세)
핀란드 퀴멘락소 하미나
묘소 루오콜라티 교회 묘지
복무 핀란드 육군
1925년 ~ 1926년
1939년 ~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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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580><colcolor=#fff> 별명 백사병, 하얀 사신, 백색 죽음(Valkoinen kuolema / Viko döden)
신체 152cm 또는 160cm[1]
부모 아버지 유호 해위해 (Juho Häyhä)
어머니 카트리나 해위해 (Katriina Häyhä)
최종 계급 소위 (핀란드 육군)
소속 백위대
제34보병연대
제2자전거대대
제1자전거대대
주요 참전 겨울전쟁
콜라 전투
주요 서훈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겨울전쟁의 신화2.3. 전후
3. 매체

[clearfix]

1. 개요

핀란드의 전직 군인. 20세기 핀란드와 소련이 치른 겨울전쟁에 참전한 저격병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저격수이다.

겨울전쟁 100일간 약소국인 핀란드 진영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534명의 병사를 사살하였으며 보다 은밀한 저격을 위해 망원조준경을 사용하지 않았고 총에 기본으로 달려있는 아이언사이트를 사용하였다.[2] 그를 상대하는 소련군백사병(白死病, Белая Смерть/볠라야 스몌르트)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3]

핀란드어 Simo Häyhä의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simɔ 'hæy̯hæ]이며 국립국어원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에 따른 표기는 '시모 해위해'이나, 관용적으로 '시모 하이하'로 표기하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핀란드 대공국의 소도시 라우티애르비(Rautjärvi)에서 태어났다. 본업은 농부사냥꾼이었으며 20세에 백위대(Suojeluskunta)라는 민병대에 가입했다.

전문적인 저격 교육을 수료한 적은 없으나 입대 이전부터 사냥으로 다져진 독자적인 사격술을 갖고 있어[4] 다수의 사격대회 수상을 하였고 1925년에 핀란드 육군에 징병되어 15개월 간의 의무 군복무를 마친 후 상병으로 전역했다. 이후 본업에 종사하던 중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으로 전쟁에 소집되었다.

당시 해위해가 속했던 중대의 직속상관인 아르네 유틸라이넨 중위는 해위해의 사격실력에 주목해 해위해에게 어떤 소대에도 귀속되지 않는 특수 저격병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2.2. 겨울전쟁의 신화

그가 참전한 콜라 전투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핀란드군 포병이 일일 1,000발의 포탄 밖에 발사할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소련군은 일일 40,000발에 달하는 포탄을 발사하였다. 병사의 수 또한 큰 차이가 났는데, 콜라 전투 초기였던 1939년 겨울, 시모 해위해가 속했던 부대는 31명의 병사들로 4,000명에 달하는 소련군 1개 연대를 막아야만 했다.#

해위해는 이러한 특수한 환경에서 1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무려 542명[5]을 사살하였다. 이는 단일 저격수 역사상 최다 사살 기록으로, 당시 소련군에게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악몽이자 움직이는 재앙으로 작용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핀란드의 설원에서 위장과 방한을 위해 항상 눈처럼 흰 전투복을 입고 나타나는 그에게 '백사병(Белая Смерт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소련군은 오직 시모 해위해를 저격하기 위한 저격수 부대를 1개 소대 규모로 조직했고 그 밖에도 교란 및 사살을 목적으로 포대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를 사살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Forgotten Weapons와 9-Hole Reviews의 시모 해위해의 M91 및 M28 리뷰 영상

그는 모신나강의 핀란드 생산품인 M28 소총을 사용하여 저격수로서 대부분의 전과를 올렸다. 또한 수오미 기관단총으로도 200명을 사살하였으며 기록을 보면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기를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진급과 훈장을 수훈한 것에 더불어 1940년 2월 17일 스웨덴 사업가 유겐 요한슨이 해위해를 위해 특수 제작한 M28 특수 모델을 선물 받았다.

시모 해위해는 핀란드군 통계 기준 총 259명을 저격으로 사살했으며, 이와 비슷한 수의 적을 기관단총과 기관총을 사용해 사살하였다. 그가 가장 많은 적을 저격해 사살한 날은 1939년 12월 21일로 해위해는 그 날 하루 동안 25명을 저격했다.
파일:external/yuuut.com/simo-hayha.jpg
전장에서의 시모 해위해 [6]
1939년 12월 22일: 138명 저격 사살 (22일 간 138 명)
1940년 1월 26일: 누계 199명 저격 사살 (35일 간 61명)
1940년 2월 17일: 누계 219 명 저격 사살 (22일 간 20명)
1940년 3월 7일 (시모 해위해가 중상을 입었을 때) 총 259명의 저격 사망자가 발생(18일 동안 40명)

다른 유명한 저격수들과 차별화된 특징은 그가 전투 중 스코프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저격에 사용한 소총에 조준경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총에 기본적으로 달린 기계식 가늠좌와 가늠쇠를 이용하여 맨눈 시력만으로 조준하였다. 본인이 옛날 사냥꾼의 방식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초인적인 저격 실력과 정신력, 그리고 우수한 근거리 전투 능력 덕분이었다.

해위해 본인이 주장한 스코프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해위해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도 스코프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했다.
  1. 스코프의 렌즈에 의한 반사광 때문에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7]
  2. 영하 20도에서 영하 40도에 달하는 당시 혹독한 설원 환경에서는 스코프에 성에와 눈이 끼어 관리가 어렵다.[8]
  3. 스코프를 사용할 경우 반드시 머리를 내밀어 눈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포착되기 쉽다.[9]

언급한 내용처럼 당시의 저조한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조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코프에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우선 스코프 없이 장거리에서 수월한 목표물 처치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조건을 감안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맨눈 저격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250m~300m 정도가 한계이며 그것도 어디까지나 명중 유무의 영역이지 정밀한 저격은[10]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저격수에게 있어 스코프는 제2의 눈이나 다름이 없는데, 해위해는 이 도구를 포기하고 오로지 맨눈으로 수백 명의 적들을 저격했다.

물론 시모 해위해가 다른 저격수들보다 초인적인 시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해위해는 스코프를 쓰지 않았던 만큼 저격 거리가 다른 저격수들보다 짧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그의 가장 긴 저격 거리는 450m의 거리[11]에서 소련군 저격수를 역저격한 사례인데, 이마저도 저격하지 않으면 안 돼서 한 특수한 경우로, 보통 100~150m의 거리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그의 전투방식은 저격수로서 대단히 불리한 단점인 짧은 사격범위를 빠르고 정확한 실력으로 커버하는 식이었다.

시모 해위해가 200m도 안되는 교전거리에서 전과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소련군 보병들도 일반적인 교전거리 안에서 해위해와 맞상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아예 가시거리 밖에서 저격이 들어오는 일반적인 저격수가 아니라, 보병들이 충분히 대응사격이 가능한 거리였음에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여 철저하게 은폐하는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해위해의 관련 일화를 보면 저격을 할 때 주변에 쌓인 눈을 입에 물고서 입김이 새어 나와 포착되는 것을 막거나, 총구 근처의 눈을 단단하게 눌러 두고서 총이 발사될 때 눈이 흩날리지 않게 하는 기술도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또한 해위해가 그만큼 저격 거리가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통 저격수들이 저격하는 거리 격차로는 '입김'이 포착될 일은 거의 없다. 입김이 적에게 포착될 우려가 있을 정도로 지척이었다는 뜻이다.

눈 위에서는 접근하면서 생기는 자기 발자국과 의탁했던 자세의 흔적과 일부러 만들었던 엄폐물을 일일이 치우는 것도 고역이다. 실제로 위의 사살 전과를 보면 알겠지만 해위해는 기관단총으로도 저격 못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다시 말해 저격 이후 발각되어 소련군과 근거리 교전을 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저격수가 위치가 발각된 것도 모자라 적과 기관단총으로 교전을 벌인 적도 수차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부상은 입었지만 어쨌든 생환을 수차례 했다는걸 보면, 해위해의 담대함과 전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해위해가 해온 저격 스타일에 해당하는 지정사수라는 보직이 군대에 존재한다. 다만 지정사수는 분대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시모 해위해처럼 단독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근거리에서 저격하는 지정사수도 사격술과 완벽할 정도의 위장술은 필요하지만 저격 이후 거의 무조건 발각되며, 이후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사살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고 위험부담도 크다. 따라서 지정사수는 호위 분대를 붙이거나 아예 분대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해위해는 그걸 혼자서 해낸 것이다.

키가 160cm에 불과한 이 조그마한 전사[12]는 영하 20도에서 영하 40도까지 달하는 극한의 날씨 속에서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보급도 미비한 핀란드 측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500여 명 사살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전과를 세웠다. 그러나 1940년 3월 6일, 저격 중 소련군이 시모를 사살하려고 지근거리에서 쏘아서 폭발한 유탄의 파편이 그의 턱에 명중하였다. 이로 인해 시모는 뼈가 깨지고 얼굴의 절반을 잃는다.
파일:attachment/Simo_hayha_second_lieutenant_1940.png
재건 수술 후의 모습[13]

수술 이후 외모가 상당히 망가져버렸지만, 그 당시 성형수술 수준을 감안해보면 저만큼 복원해낸 것도 무척 성공적인 셈이다. 게다가 얼굴의 반이 날아간 그의 모습을 본 모두가 살아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대수술을 거친 후 1주일 만에 깨어났다.[14] 그리고 그가 깨어난 그 날은 바로 핀란드의 겨울전쟁이 끝나던 날이었다. 원래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문서의 맨 위에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면 된다.

2.3. 전후

파일:20240613_131842.jpg

은퇴 후의 노년의 모습. #

그는 핀란드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에게 훈장과 소위 진급의 영예를 얻었다. 진급 전 계급은 상병이었고, 이는 5계급 특진으로 핀란드군 역사상 이 정도로 급격한 진급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신경계 손상으로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명예로운 퇴역을 하게 되었고 무스 사냥이나 사육 등의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전쟁영웅이었지만 핀란드에서는 그가 수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자라며 비난하는 여론도 소수 있었다.[15] 종전 이후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잦은 살해협박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때문에 알려진 거주지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가족들과 살기도 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무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해당 분야에 대해서 매우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매우 장수했는데 2002년 4월 1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래는 1998년과 2001년도 인터뷰 내용이다. 이 인터뷰중 그는 명사수가 되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연습뿐이라고 답했으며 2001년도 인터뷰에서는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한다.[16]
1998년
Q: 어떻게 그런 명사수가 되셨습니까?
A: 연습했습니다.
2001년
Q: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것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까?
A: 명령 받은 것을 최대한 실행했을 뿐입니다. 만약 나와 다른 병사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면, 핀란드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다만 얼굴의 상처가 그에게 있어 큰 부담이 되어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직계 자손은 없다.

3. 매체

워낙 전설적인 업적을 이룩한 저격수이니만큼 모티브를 따와 만든 캐릭터가 많은데 직접적으로 모티브를 따온 것 이외에도, "스코프를 쓰지 않는 저격수"라는 컨셉이 붙은 캐릭터라면 대부분 이 시모 해위해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이다. 다만, 어째 이런 경우에는 "다른 저격수에 비해 짧은 저격거리"라는 특징은 빼는 경우가 많다. 퍼스널 컬러가 하얀색인 저격수 캐릭터 역시 대부분 시모 해위해를 모티브로 하는 경우인데 "하얀 사신" 이라는 별명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곤 한다. 여체화되거나 여성 캐릭터가 그를 모티브로 한다면 별명인 하얀 사신이 하얀 마녀로 주로 바뀐다.

가나다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하얀 사신의 전쟁 키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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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에는 160cm로 등재되어 있으나, 다른 문헌에는 152cm로 기록되어 있는 등 정확한 자료가 없다.[2] 왜냐면, 햇빛이 스코프에 비치면 그 빛이 반사되어 위치가 노출되기 때문이다. 후술할 이유 또한 있다.[3] 문자적으로는 '하얀 죽음(White death)'이 되고, "결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러시아어로 흑사병을 'Чёрная смерть(쵸르나야 스몌르트)'로 표현하기 때문에, 'Белая Смерть'도 이와 유사하게 의역할 수 있다. 한국어에서도 병이 질병(病)과 병사(兵)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백사병(白死兵)'이라고 하면 말이 된다, 한국에서는 주로 하얀 사신 등으로 불리는 편.[4] 어릴때부터 총기와 사냥을 접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소련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나 미국의 해병 카를로스 헤스콕과 같은 유명한 저격수들과 함께 공통적으로 가진 성장배경이다.[5] 자료에 따라서는 최저 505명이다. 다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평균적으로 하루에 5명을 사살한 셈이다.[6]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은 눈으로 뒤덮인 핀란드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위장력과 함께 얼굴에 방한기능을 제공했다, 시모 해위해만 이것을 쓴 것은 아니고 핀란드의 몇몇 저격수 역시 사용했으며 소련군도 사용했다.[7] 현대의 스코프는 반사광이 적에게 노출되는 대참사를 막기 위해 스코프의 렌즈에 특수 코팅을 하거나 아니면 킬플래쉬라는 철망 모양의 도구를 달아 반사광을 방지하지만, 2차대전 시기에는 아직 그런 보조 도구가 발명되지 않았다.[8] 혹한지에서의 저격은 이 문제도 매우 컸다. 어쨌든 스코프도 유리인 만큼 추운 곳에서는 성에가 끼여 잘 보이지 않거나 심하면 서리가 끼어 시야를 가려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의 스코프는 성에 방지 코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이 또한 이 당시에는 발명되지 않았다.[9] 현대의 스코프들은 스코프를 고정하는 마운트 링을 낮은 것으로 사용하여 높이를 낮춰 쓸 수 있지만, 2차대전 당시의 스코프들은 개 마운트 부분이 길며 특히 기계식 조준기도 겸용으로 쓸 수 있도록 설계한 경우가 드물지 않아서 높은 편인데, 이 때문에 조준시 머리의 높이가 높아져 더 눈에 띄게 된다. 또한 이 당시 소총은 대부분 광학 장비 사용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운트 높이를 지나치게 낮추면 탄피 배출과 차탄 장전이 불편해져서 내부 탄창이 있는 소총조차 단발식 소총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10] 특정 부위만 맞혀서 무력화 시키는 등.[11] 21세기에 나오는 소총탄의 최대 유효사거리 정도다.[12] 사실 저격수는 키가 크면 불리하다. 체격이 커지면 아무 데나 숨기도 어렵고, 피격당하기 쉽고 눈에도 잘 띄기 때문이다.[13] 사진을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일부러 일그러뜨린 것이 아닌 원본 사진이다.[14] 한 핀란드 언론은 죽었다고 오보를 때리는 바람에 그가 깨어나고 나서 정정보도를 요청했다고 한다.[15] 겨울전쟁계속전쟁에서 소련에 패한 핀란드는 국체를 지켜내기는 했으나, 냉전기에는 핀란드화라 하여 소련에 어느 정도 굽히고 들어가는 외교정책을 취했다. 이 시기 핀란드는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소련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다. 이로 인해 소수의 친소련 정치 세력이 실제 유권자의 지지도에 비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들은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의 참전용사들을 전쟁광이라 비난했고, 대다수 핀란드인은 그런 주장에 수긍하지 않았으나 소련과의 전쟁이 두려워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참전용사들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자신의 무훈을 부각하기를 꺼렸다. 시모 해위해에 대한 비난도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16] 여담으로 해당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의 태도가 굉장히 무례하다. 군인이 하는 일을 '사람을 죽이는 것(=살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불문하고 각자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모든 군인을 무시하는 행위인데, 한술 더 떠서 그것을 후회하냐고 묻는 것은 '당신이 한 행동이 그릇된 행위임을 자각하느냐'고 확인사살하는 개념없는 몰지각한 짓인 동시에 호국영웅에게 엄청난 결례다. 전쟁 회의론이 가장 횡행하던 시기라 할지라도 국가의 명령과 국가의 위기의 상황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군인에게 할 질문과 태도가 아니란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17] 적과 가까울수록 강해지는 것은 실제 해위해의 근접저격을 모티브로 따왔고, 조준하는 오른쪽 눈은 십자 조준선 형태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오드아이로, 개조된 안구이다.[18] 사단 손실 +20% 등 정도라 별로 크지 않아 보이지만 게임상으로는 매우 심한 페널티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