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56B2F><colcolor=#ffffff> 바덴 대공국 카를의 대공비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 Stéphanie de Beauharnais | ||
이름 | 프랑스어 | 스테파니 루이즈 아드리엔 드 보아르네 (Stéphanie Louise Adrienne de Beauharnais) |
독일어 | 슈테파니 루이제 아드리네 (Stephanie Louise Adrienne) | |
출생 | 1789년 8월 28일 |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 ||
사망 | 1860년 1월 29일 (향년 70세) |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니차 | ||
배우자 | 바덴 대공 카를 (1806년 결혼 / 1818년 사망) | |
자녀 | 루이제, 요제피네, 알렉산더, 마리 아멜리 | |
아버지 | 클로드 드보아르네 | |
어머니 | 아드리엔 드레자마르네지아 | |
형제 | 알베릭 쥘 알베르 |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제1제국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첫번째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수양딸이자[1] 바덴 대공 카를의 대공비다.현 벨기에 왕가, 전 루마니아 왕가, 전 이탈리아 왕가, 현 룩셈부르크 대공가, 현 모나코 공가의 조상이다.
2. 생애
1789년 2대 로슈-바리토 백작[2]의 딸로 태어나 2년 뒤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이민을 가면서 스테파니를 대모인 레이디 바스에게 맡겼고, 스테파니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가 수녀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청소년기까지 프랑스 남부에서 수녀들에 의해 양육되었다.1802년 스테파니의 존재를 알게 된 나폴레옹은 스테파니를 거두기로 결심하고 1803년 1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스테파니는 조제핀과 오르탕스의 보호 아래 튈르리 궁전에서 거주한다. 이즈음 프랑스로 돌아온 아버지가 재혼하고 이복동생이 태어난다. 스테파니는 교육을 마치기 위해 캄팡 부인의 생제르맹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1806년 결혼동맹을 추진하던 나폴레옹에 의해 바덴 대공국의 후계자인 카를 공자[3]와 약혼이 이루어진다. 생제르맹에서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돌아온 스테파니를 나폴레옹은 친딸과 같이 환대했다. 궁정에서 스테파니는 나폴레옹의 누이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았는데, 특히 카롤린 보나파르트의[4] 견제가 심했다. 1806년 3월 정식으로 나폴레옹과 조제핀에게 입양되고, 프랑스의 공주 칭호를 받은 스테파니는 공주들 중에서 으뜸가는 서열이 된다.
1달 후 16세의 스테파니는 파리에서 3세 연상의 카를과 결혼식을 올렸다. 스테파니는 며칠 동안 남편을 거부했고 궁정 내 가십이 되었다. 카를루스에에 도착한 스테파니는 궁정에서, 특히 시어머니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5]의 적대감을 맞닥뜨리고 신혼부부는 따로 떨어져 지낸다. 다행히 부부는 점차 가까워져 1811년 첫딸 루이즈가 태어나고 그해에 카를이 대공위를 승계하면서 대공비가 된다.
1820년대의 스테파니
카를은 나폴레옹의 몰락 후 가족의 압력에도 스테파니와 헤어지기를 거부한다. 두 사람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고 3명의 딸이 성인으로 성장한다.
29세에 미망인이 된 스테파니는 세 딸들을 데리고 뮌헨의 궁전으로 은퇴한다. 카를이 사망한지 10년 후 카스파 하우저 사건이 터진다. 카스파 하우저가 암살되고 스테파니는 아들을 2번 잃었다는 상실감 속에 산다.
세 딸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였고 교육과 결혼에 무척 신경을 썼다. 처음에는 적대적이었던 시어머니 아말리에도 흠 잡을 데없는 과부인 스테파니를 좋아하게 된다. 프랑스 제국의 재건을 보고 루이나폴레옹의 세례식에도 참석한 후 스테파니는 1860년 프랑스 니스에서 70세로 사망한다.
비록 두 아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딸들을 통해 현재 루마니아 왕가, 벨기에 왕가, 이탈리아 왕가, 룩셈부르크 대공가[6], 모나코 공가[7]가 모두 스테파니의 후손이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바사 공비 로비사 (Louise, Princess of Vasa) | 1811년 6월 5일 | 1854년 7월 19일 | 슬하 1남 1녀[9] |
2녀 | 호엔촐레른 공비 요제피네 (Josephine, Princess of Hohenzollern) | 1813년 10월 21일 | 1900년 6월 19일 | 호엔촐레른 공 카를 안톤[10] 슬하 4남 2녀[11] |
1남 |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 1816년 5월 1일 | 1816년 5월 8일 | |
3녀 | 해밀턴 공작부인 마리 아멜리 (Marie Amelie, Duchess of Hamilton and Brandon) | 1818년 10월 11일 | 1888년 10월 17일 | 제11대 해밀턴 공작 윌리엄 해밀턴[12] 슬하 2남 1녀 |
[1] 그와 동시에 조제핀에겐 시당조카(첫번째 남편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사촌의 딸)이기도 하다.[2]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첫 남편의 사촌[3] 원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와 약혼했으나, 나폴레옹이 양아들 외젠과 아우구스테를 결혼시키고 카를의 신붓감으로 스테파니를 추천했다. 이후 아우구스테 공주는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다.[4] 조아킴 뮈라의 아내.[5] 나폴레옹을 싫어한데다 스테파니의 낮은 신분도 못마땅했기 때문이다.[6] 루마니아, 벨기에,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모두 차녀 요제피네의 후손이다.[7] 막내딸 마리 아멜리의 후손이다.[8] 1830년 결혼 / 1843년 이혼.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리데리케의 장남.[9] 작센의 왕비 카롤라 등[10]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뮈라가 조아킴 뮈라의 조카다.[11] 포르투갈의 왕비 이스테파니아, 카롤 1세 등[12] 제8대 브랜든 공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