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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0:27:20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73호 74호 75호
탑골공원 팔각정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지장사 철불좌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順興安氏 良度公派 墓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126-1번지
시대 조선 시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수량 / 면적 분묘 5基, 석물 32基, 토지 2,247.1㎡
지정연도 1990년 6월 18일
관리자
(관리단체)
순흥 안씨 양도공파 종회
파일: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1).jpg
파일: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jpg
<colbgcolor=#C00D45>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1]

1. 개요2. 상세3. 인물
3.1. 안경공3.2. 안순3.3. 안숭선3.4. 안숭신3.5. 안숭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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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흥 안씨 양도공파의 파조인 양도공 안경공과 그 후손들의 묘역.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

2. 상세

이 문서에서 다루는 묘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묘 5기의 영역이다. 양도공 안경공(良度公 安景恭)과 그의 아들 정숙공 안순(靖肅公 安純), 그리고 안순의 세 아들인 문숙공 안숭선(文肅公 安崇善), 소윤공 안숭신(小尹公 安崇信), 안천공 안숭효(安川公 安崇孝)의 묘이다.

15세기에 조성한 묘역으로, 당대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 6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받았다. 원래는 안경공과 안순, 안숭선의 묘만 문화재로 관리받았으나 2017년 2월 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안숭신, 안숭효의 묘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지정했다. 안숭신, 안숭효의 묘 역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처음부터 같이 지정하시지 그러셨어요

석물은 총 32기이다. 묘비, 혼유석, 상석 등 묘에 필요한 기본적인 석물은 묘마다 각각 1기 씩 있다. 장명등의 개수는 3기(안경공, 안순, 안숭효)이며, 신도비는 2기(안순, 안숭선)가 있다. 문, 무인석은 묘마다 있는데, 안숭선의 묘에는 4기가 있고 다른 묘에는 각각 2기 씩 있다.
파일:흥녕부원군부조묘.jpg
<colbgcolor=#C00D45>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에 있는 사당 흥녕부원군부조묘[2]
서향을 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현대식 재실이 있고[3] 재실 위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 이름은 '흥녕부원군부조묘(興寧府院君不兆廟)'이다.

사당을 기준으로 왼쪽에 안순과 안숭신, 안숭효의 묘가 있고, 오른쪽에 안경공과 안숭선의 묘가 있다.

3. 인물

3.1. 안경공

안경공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는 손보(遜甫)이다. 1347년(충목왕 3년)에 경상도 순흥부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때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우왕 시절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상도 안렴사를 지낼 때 사노비들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고, 공양왕 때는 정몽주를 몰아내려다가 도리어 좌천당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이성계 측의 일원이 된 듯 하다.

조선 건국 당시 좌대언으로서 아버지 안종원과 함께 참여했다. 그 공으로 중추원 도승지 직을 제수받고 다음 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지역 행정 업무를 주로 맡아 전라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수도 한성의 최고 책임자인 판한성부사와 옛 수도 개성을 책임지는 판개성부사를 역임했다. 개성부사를 지내던 중에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당한 정도전남은의 죄를 줄여줄 것을 태종에게 간언했다가 대간에서 탄핵을 받았다.

1416년(태종 16년)에는 집현전 대제학이 되면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격상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75세[4]로 사망했고 시호 '양도(良度)'를 받았다.

3.2. 안순

안경공의 아들로, 는 현지(顯之)이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태어나 세종 시기에 호조참판 자격으로 명나라사신으로 다녀왔고, 이후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세종 중반에는 판중추원사와 호조사 및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고 1437년(세종 19년)에는 기근이 일어난 충청도로 내려가 백성들을 구휼했다.

앞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주로 나라 살림과 관련있는 일을 많이 맡아서 했으며, 재정을 다루는 책임자였던 만큼 매사에 엄격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1440년(세종 2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시호 '정숙(靖肅)'을 받았다.

3.3. 안숭선

안순의 차남으로, 는 중지(仲止)이다. 처음에는 음서관직을 지냈다가 1420년(세종 2년)에 문과에 급제[5]한 후 사헌부 지평으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조전랑, 대사헌, 공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고위직을 주로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병조판서 역임 중에 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받았으나 병으로 몇 달 못가 사직했다. 이후 예문관대제학 직을 맡았으며 의정부 좌참찬으로 있던 1452년(문종 2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3.4. 안숭신

안순의 3남이다. 1395년(태조 4년)에 금천에서 태어나 오위도총부 사직과 형조 정랑 직을 맡았다. 함길도 도사를 역임하던 중 구휼 실패로 파면당했고, 파면 한 달 후에 황희의 천거로 경기좌도 찰방이 되었다가 세종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1441년(세종 23년)에 사망했다.

3.5. 안숭효

안순의 4남으로, 는 계충(季忠)이다.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호조 참의와 지사간원사를 역임했다. 단종이 왕이 된 후에는 경기도관찰사와 덕녕부윤 직을 맡으면서 수양대군의 즉위에 협력했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에는 대사헌과 공조 및 호조 참판으로 일했고, 1459년(세조 5년)에는 동지중추원사 겸 충청도관찰사로 제수받아 충청도로 갔는데, 이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들을 엄벌하여 백성들의 인망을 얻었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일했던지 재직 중에 중병에 걸려 이듬해에 충청감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사진 출처 - 디지털구로문화대전.[3] 단,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4]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5] 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