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1:07:17

수루츠

파일:터키 수루츠.jpg
수루츠 시청사

1. 개요2. 역사

1. 개요

튀르키예어 Suruç
쿠르드어 Pirsûs
아랍어 سروج
시리아어 ܣܪܘܓ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 샨르우르파에서 서남쪽으로 30km, 하란에서 서쪽으로 40km, 비레직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국경 도시는 아니지만 튀르키예-시리아 국경과 불과 7km 떨어져 있으며, 서남쪽의 시리아 도시 코바니와 마주하고 있다. 인근 하란, 우르파, 카르카므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수루츠 역시 유서 깊은 도시이다. 고대에는 바트나이 혹은 세루그라 불렸고, 비단 생산으로 유명했다.

중세 십자군 전쟁기에는 에데사 백국장기 왕조가 각축을 벌였고, 13세기 중반 맘루크 왕조일 칸국 간의 전쟁 시에 파괴되었다. 근대 들어 쿠르드 인들이 정착하였고, 다른 쿠르드 도시들처럼 민주적으로 선출된 시장이 튀르키예 당국에 의해 구금당하는 등 정부와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 역사에도 무색하게 남아있는 유적은 찾기 힘들다. 2010년대 시리아 내전과 함께 남쪽 코바니 등지에서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2009년 ~ 2014년에 걸쳐 튀르키예 최대 규모의 지하 수로인 17km 거리의 수루츠 수로를 통해 아타튀르크 댐의 물을 끌어오기에 일대의 농지는 비옥한 편이다.

2. 역사

수메르 시대부터 마을이 있었고, 고전기에는 비단 산업의 거점이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대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5세기의 현지 주교 야콥 (모르 야쿱)은 시리아 정교회의 교부 중 하나로써 찬송가 여러 저작과 번역서를 남겼다. 363년 율리아누스사산 제국 원정군이 지나간 것 외에 정치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던 도시는 639년 이슬람 제국군에 항복하였고, 아랍식인 사루즈라 불리게 되었다. 1098년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1세는 동맹이던 사모사타의 아미르 발두크의 난을 진압하고 사루즈를 병합하였다. 1102년 마르딘 태수이자 아르투크 왕조의 창건자 소크만이 도시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에게 격퇴되었다. 그 무렵 사루즈의 영주는 기사 파간이었다.

1111년 샤이자르 전투 당시 파간 역시 십자군 연합군에 합류하여 무슬림 연합군의 철수를 이끌어내었다. 다만 에데사 함락 직후인 1145년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사루즈 역시 점령하였고, 1152년 에데사 백국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후 사루즈는 장기 왕조에 속하다가 1183년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한 알레포의 아미르 마우두드 (장기 2세)가 아이유브 왕조의 봉신으로서 사루즈, 라카, 신자르, 누사이빈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1201년에는 알 아딜이 조카 알 아프달에게 마야파리킨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루즈, 라스 알 아인을 하사받았다. 1252년 봄 마야파리킨을 포위한 몽골 제국의 분견대가 일대를 습격하였고, 1272년 말에는 비라 (비레직) 전투에서 승리한 맘루크 왕조의 장군 바이사리가 몽골군 패잔병을 사루즈까지 추격하였다. 다만 반세기간 이어진 맘루크-일칸국 전쟁으로 사루즈는 파괴되었고, 오스만 제국기에 쿠르드 인들이 정착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기에는 1918년 영국군에 이어 1919년 프랑스 군이 장악했으나 가지안테프, 카라만마라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하였다. 2010년대 시리아 내전, 특히 국경 건너편에서 벌어진 코바니 전투와 함께 수루츠는 혼란을 겪었다. 2014년 10월, 코바니 전투를 취재하던 레바논계 미국인 기자 세레나 쉼이 석연치 않은 교통 사고로 사망하였다. 2015년 7월에는 다에시 튀르키예 지부의 자살 폭탄 테러로 34명이 사망, 10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2018년 6월 튀르키예 총선을 앞두고는 정의개발당 후보의 유세 도중 4명이 살해되었다. 2019년 지방 선거 결과 쿠르드계 하티제 체비크가 시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녀는 불과 7개월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감금되었고, 튀르크계 카이마캄 (중국의 지방 당서기와 유사) 케난 아크타쉬가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바트만, 디야르바크르, 지즈레, 누사이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