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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10 12:55:12

송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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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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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16대 국군
장공
莊公
자(子)
송(宋)
빙(馮)
아버지 송목공(宋穆公) 자화(子和)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750년 ~ 기원전 692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09년 ~ 기원전 692년

1. 개요2. 생애
2.1. 탈법적인 즉위2.2. 즉위 후2.3. 정나라와의 갈등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제15대 군주. 송목공(宋穆公)의 아들. 송민공, 송공유, 송환공의 아버지. 송양지인(宋襄之仁)으로 유명한 송양공(宋襄公)의 할아버지. 그는 아버지 송 목공의 유언으로 정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2. 생애

2.1. 탈법적인 즉위

송 상공 10년(기원전 710년),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송상공을 시해하고 그를 맞아들이니 그가 바로 송 장공이다.

2.2. 즉위 후

송 장공 원년(기원전 709년), 화독은 고(郜)나라에서 보낸 큰 솥을 노환공에게 주고 제(齊)나라, 진(陳)나라, 정나라에 예물을 보내고 화독은 송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

2.3. 정나라와의 갈등

송 장공 9년(기원전 701년) 봄에 송장공은 제나라, 위(衛)나라, 정나라와 회맹했다. 여름에 정장공이 죽자 제중은 세자 홀을 정백으로 모시니 그가 바로 정소공이다. 정소공의 아우 공자 돌이 송나라 여자 옹씨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송 장공은 정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신으로 온 제족[2]을 협박해 공자 돌을 세우라고 했다. 제족은 어쩔 수 없어서 공자 돌을 세워줬다. 그가 바로 정여공이다. 정 여공은 자신이 정나라의 백작이 되면 송장공에게 성과 예물을 주기로 약속했던 바가 있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나서는 입을 쓱 닦았다.

송 장공 10년(기원전 700년) 여름, 노환공이 송나라와 정나라의 강화를 돕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가을에 그것을 실행했으나 송 장공은 그것을 역정을 내며 씹었다. 겨울에 구 땅에서 회맹했으나 송 장공은 약속한 물건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노 환공은 정 여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송 장공 11년(기원전 699년), 송 장공은 약속한 물건을 주지 않는 정나라노나라 연합군에 맞서고자 제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함께 정나라와 싸웠으나 탈탈 털렸다.

송 장공 12년(기원전 698년) 겨울, 송 장공은 그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제나라, 채나라, 위(衛)나라, 진(陳)나라 등 4개 국과 연합해 정나라를 쳐 정나라의 동문에 이르러 그 문을 불사르고 신정성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쪽 교외를 쳐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정나라 궁전의 서까래를 약탈하는 굴욕관광 플레이을 안겨주었다.[3] 정나라는 한번의 거한 패배로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린 것이다.

송 장공 13년(기원전 697년) 겨울, 송 장공, 노 환공, 위혜공, 진장공(陳莊公)이 이 땅에서 정나라를 치려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각기 회군했다.

송 장공 14년(기원전 696년) 정월, 송 장공은 노 환공, 채 환후, 위 혜공과 조나라에서 만나 회맹하여, 함께 정나라를 칠 것을 맹세했다. 4월에 송나라, 노나라, 위나라, 진(陳)나라, 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송 장공 15년(기원전 695년), 송장공이 위나라와 함께 주(邾)나라를 쳤다.

송 장공 19년(기원전 692년) 12월 을유일, 송장공이 죽고 그 아들 자첩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 민공이다.[4]

[1] 특히 정나라에서는 신세진 것에 대한 화답을 위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2] 채중과 동일 인물[3] 그 서까래는 송나라의 노문이라는 성문을 장식하는데 썼다고 전해진다.[4] 송 후민공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