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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1:25:45

서풍 (배우)

<colbgcolor=#595959><colcolor=#fff> 서풍
徐楓 | Hsu Feng
파일:hsufeng1.jpg
본명 서풍 (徐楓 | Hsu Feng)
출생 1950년 12월 4일 ([age(1950-12-04)]세)
대만 타이베이시
국적
[[대만|]][[틀:국기|]][[틀:국기|]]
자녀 2남
데뷔 1967년 무협 영화 용문객잔
1. 개요2. 배우 활동3. 영화 제작4. 그 외 활동5. 여담6. 필모그래피
6.1. 출연작6.2. 영화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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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풍은 대만의 前 배우이자 영화 프로듀서, 기업인이다.
주로 1970년대 홍콩과 대만의 영화, 드라마 등 10년 전후의 기간에 약 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사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에 나왔으나 특히 무협 영화로 기억되고 있고 지금은 전설이 된 호금전 감독의 무협 영화에 거의 페르소나 급으로 여러 번 출연하였다.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1]이 무협 영화에 아주 잘 어울렸다.

2. 배우 활동

파일:hsufeng3.jpg
협녀 출연 당시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 푸젠성 출신으로 가족이 대만으로 이주 후 그녀가 6살 때 사망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재혼했다. 허나 양아버지는 가난했고 성격도 안좋아 서풍을 하녀처럼 부려먹었으며,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린 서풍은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 등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66년 16세 무렵 육달(育达, YU-DA) 상업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을 때 양아버지는 학교 따위는 그만두고 돈이나 벌어와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태라며 계속 채근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는데 당시 공장과 영화사 두 곳에 면접을 보았다. 그 영화사가 마침 호금전이 활동지를 대만으로 옮겨와서 설립한 Union Film Company 영화사였다. 당시에 지원자가 거의 1천 명이 넘었다는데 그 중에 12명만 선발하는 경쟁률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렇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되자 “ 한 여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한 전남친의 결혼사진을 봤을 때, 그 여자의 감정을 연기해보라 “ 라는 과제를 받았다. 당연히 연기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요구를 받으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빤히 사진을 보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왠지 자신의 힘들었던 삶이 생각나서 비참한 마음에 어느샌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로 별다른 소식이 없었고 먼저 면접을 봤던 공장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극적으로 영화사 쪽에서 공장보다 딱 하루 먼저 합격통지서가 도착했고 그 즉시 6년 계약에 서명했다. 양아버지는 영화 일은 근무시간만 길고 급여는 형편없다며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서풍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호금전의 대만에서의 첫 제작 영화였던 용문객잔(1967) 에서 드디어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첫 배역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충신의 딸 역할이었는데 그냥 유배가는 사람 A 수준으로 거의 대사도 없는 말 그대로 엑스트라 수준이었다. 반대로 본인과 똑같이 용문객잔으로 데뷔한 또다른 여배우 상관영봉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주연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의외로 기회는 빠르게 찾아 왔는데, 두 번째 출연작이 바로 무협영화의 전설적 작품으로 회자되는 호금전의 협녀였다. 포송령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실린 단편 <협녀>를 원작으로 각색한 이 영화에서 억울하게 가문이 몰락하고 그 복수를 위해 조정의 추적을 피해 숨어사는 여협객 여주인공 양혜정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68년부터 촬영을 시작하여 3년 여에 가까운 시간을 들인, 본래 상영시간만 4시간 가까이 되는 호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대작이었다. 덕분에 단번에 주목받는 배우가 될 수 있었고 이후로 서풍은 호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 그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게 되어 그를 스승처럼 따르며 그의 작품에 여러번 출연한다.

협녀는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1975년 28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칸 영화제 기술 대상을 수상한 이후 재조명 되어 현재는 무협영화 역사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당대에 개봉이 되지 않았고 2001년에서야 부천영화제를 통해서야 상영될 정도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협녀의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편집 작업 등으로 촬영이 없을 때는 쉬지 않고 몇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였는데 그 중 용성십일 (한국명 용성대혈투, 1969) 에서 역시 여검객 주연으로 출연하여 이때의 연기로 1971년 9회 금마장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 후로 순조롭게 배우로 활동하며 여러 작품에 출연했으며 팔백장사 (1976) 로 1976년 2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특별 연기상을 받았고, 같은 해 자객 (1976) 으로 1976년 13회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100년 전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삶을 그린 역사 대작 (근)원 (源, 1980) 에서의 열연으로 두 번째로 17회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명배우로 발돋움했다.

호금전 감독과의 인연도 계속되어 영춘각의 풍파 (1973), 충렬도 (1975), 공산영우 (1979), 산중전기 (1979)에 출연했으며, 이 중 산중전기에서의 연기로 금마장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중 공산영우나 산중전기는 한국에서 촬영되었는데 촬영차 한국에 1년 반 가까이 체류하기도 했다.

3. 영화 제작

파일:hsufeng4.jpg
노년의 모습
사실 서풍은 16세 때 양아버지의 강요로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했었는데 이 전남편이란 작자는 그 양아버지보다 더한 인간으로 흥행에 성공한 용문객잔 영화에 서풍이 출연했단 걸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서풍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며 투자를 유도해 막대한 돈을 끌어모은 후 그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당시 서풍은 법적으로 채무 변제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양아버지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그 빚을 갚기로 했다. 이후로 빚을 갚기위해 수많은 영화에 미친 듯이 출연했지만 당시 수입으로도 혼자서 모두 갚기에는 불가능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탕군년(汤君年)은 중국 상하이 푸둥 출신의 사업가로 훗날의 홍콩의 투자사 톰슨 그룹(탕천 그룹)의 창업자인데 당시에는 대만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었고 서풍의 전남편에게 많은 돈을 투자한 최대 채권자였다. 그는 당연히 서풍에게 빚을 독촉했는데 놀랍게도 서풍은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기죽지 않고 `빚은 반드시 갚을테니 기다려달라` 며 큰소리를 치며 도리어 그를 다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탕군년은 서풍의 이런 적반하장 격인 태도에도 도리어 그녀를 강하고 용감한 여자라 느끼게되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껴 구애를 시작해 차차 연인 사이가 되었고 서풍도 그를 사랑하게 되어 둘은 결혼을 하려 하였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고지식한 탕씨 집안에서는 결사 반대하였고 결국 서풍에게 배우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허락하여 두 사람은 1980년 결혼하게 된다.

결국 이듬해 영웅대영웅 (1981) 의 출연을 마지막으로 배우로써는 조기 은퇴를 하게 되고 남편의 사업을 돕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식을 줄을 몰랐고 결국 남편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1983년 Tomson Films 영화사를 설립했고 이번엔 제작자로 영화 산업에 복귀하여 여러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호소자 시리즈 같은 흥행작도 만들었지만 주로 예술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 중 곤곤홍진 (한국명 붉은사랑, 1990) 으로 제27회 금마장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엄호), 여우주연상(임청하), 여우조연상(장만옥), 촬영상, 의상상, 미술상, 영화음악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1년 제10회 홍콩 금상장에서는 8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그 외에도 천카이거패왕별희 (1993) 에도 투자 및 제작에 여러 가지로 관여하였고, 이 영화는 4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1993) 외에도 58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1993), 47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1994), 19회 LA 비평가 협회상(1994), 5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1994), 15회 청룡영화상(1994), 15회 런던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4)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과 세자르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도 올랐다.

본인도 1998년 51회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프로듀서 상을 수상하며 영화제작자로서도 성공을 거뒀다.

4. 그 외 활동

1992년부터 남편과 함께 18년 이상을 상하이 푸둥 개발에 투자해 톰슨 그룹의 성장에 기여했으며 그 결과 상하이 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상하이 최고의 럭셔리 아파트인 탕천이핀(汤臣一品) 도 그녀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2004년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남편의 경영권을 물려받았고 현재는 톰슨 그룹의 회장으로 사업가로써도 순항하고 있다.

1994년 제44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와 2004년 제6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2012년 제6회 중국 FIRST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1년, 모나코 왕실로부터 상하이 주재 모나코 명예영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상하이에 모나코 명예영사관이 설립되었다.

2017년에는 대만 영화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54회 금마장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2018년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올해의 영화인 3인으로 초청받아 패왕별희, 영춘각의 풍파 상영회 및 핸드프린팅 제작 행사를 가졌다.

5. 여담

원래 서풍은 영화 제작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대단치 않은 일로 여겼다는데 칸 영화제에 호감독과 함께 수상을 위해 참석하면서 영화의 예술적인 가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여동생인 서걸도 배우로 활동했으며 담가명 감독의 2014년 영화 명검 및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화 촬영장에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으려고 온 불량배들과 대적해 쫓아낸 적이 있다고 한다.

출연작 중 산중전기(1979)는 본래 191분짜리 길이였지만 극장에는 92분 짜리 편집본으로 개봉되었고 그 후 발매된 영상매체들도 전부 편집본이었는데 원본은 대만에서도 네가가 분실되어 로스트 미디어 취급이었으나 극적으로 발견되자 매우 기뻐하여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6. 필모그래피

6.1. 출연작

6.2. 영화제작


[1] 파일:Hsufeng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