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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 1802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후 레 왕조 [[찐씨 정권| 찐씨 정권 ]][[응우옌씨 정권| 응우옌씨 정권 ]] | 응우옌 왕조 | ||||
왕조 | Nhà Tây Sơn(家西山)[2] | ||||
위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 ||||
수도 | 꾸이년[3]→푸쑤언,꾸이년[4]→ 탕롱[5]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완(阮)[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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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문(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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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의 마지막 왕조로 베트남 중부 떠이썬[8]지방에서 일어난 떠이썬 3형제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르(阮文呂, Nguyễn Văn Lữ), 응우옌반후에가 세운 정권이다. 떠이선 농민 운동을 계기로 북쪽을 차지한 응우옌반냑이 칭제해 후여조가 건재한 1771년 건국되었다가 1788년 후여조의 마지막 황제 소통제가 청으로 도주해 남쪽의 황제위가 빈 것을 계기로 응우옌반후에가 칭제하자 두 서산조가 병존하게 되었다. 응우옌반후에가 생존했을 시기엔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의 20만 대군(청월전쟁)도 막아낼 만큼 강력함을 자랑했으나 그가 죽은 깐틴 시기엔 최남단으로 도피한 응우옌푹아인에게 반격당해 약 30여년만에 멸망하고 만다.성이 응우옌씨이지만 원래 성은 후(胡, 호)씨로써 남쪽 응우옌씨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 응우옌씨 3형제의 이 봉기가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인 떠이선 당(西山黨)의 난이다. 떠이선 형제는 평민 출신의 인물[9]로 그에 걸맞게 쯔놈을 공식문자로 지정하여 공문서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평민들과 재야의 선비들이 공직에 진출하고 땅없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부여되는 등 많은 개혁정책이 단행되었고, 외세의 침탈을 거뜬히 이겨낸 개혁의 시대이자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으나 중반에 응우옌반르가 죽으면서 잠깐동안 분열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마지막에 화해하기는 했지만 응우옌반후에와 응우옌반냑도 오래 살지는 못했으며 이로 인해 어리고 능력이 없는 후계자가 황위에 오른 뒤에 상층부들이 초심을 잃고 권력쟁탈전 등에 매달리며 통치력에 공백이 생기며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응우옌 왕조에게 멸망당하며 비슷하게 농민반란으로 나라가 세워진 중국의 한나라와 명나라와는 다르게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했다.[10]
2. 표기
한국어 문헌에서 'Tây Sơn'을 '떠이썬'으로 표기하는 경우와 '떠이선'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공존하고 있다. 베트남어 자음자 's'는 북부 하노이 발음 기준으로는 무성 치경 마찰음 /s/이고, 중부나 남부(호찌민시 등) 기준으로는 무성 권설 마찰음 /ʂ/이다. 한편 베트남어 자음자 'x'는 모든 지역에서 무성 치경 마찰음 /s/이다. 베트남어 외래어표기법에서는 이러한 's'와 'x'를 구별하여 전자를 'ㅅ', 후자를 'ㅆ'로 옮기도록 하므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떠이선'이 맞다.3. 역사
반란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고통받는 농민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밝힘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대거 끌어내고 참족과 중국인 등 소수민족들의 협조도 같이 얻었으며[11] 한편으로, 찐씨 정권에 복종하는 척 하면서 응우옌씨 정권을 먼저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1771년에 거병하면서 빠른 시간에 세력을 다지는데 성공했고 1773년, 옛 참파의 수도 꾸이년(비자야)을 손에 넣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으며, 1774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푸쑤언을 함락시켰다. 1777년에는 남부 자딘(Gia Định, 嘉定, 지금의 호찌민시)을 함락하면서 응우옌씨 정권의 일족을 모두 도륙했다. 이 때, 진주군 부사령관이 된 레귀돈이 저술한 「무변잡록」(撫邊雜錄)은 동시대 사료가 부족한 응우옌씨 정권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후 떠이선 정권은 응우옌반냑이 1778년 중부 지역의 황제를 선언한 다음, 막내 응우옌반후에가 중흥 레 왕조에 대해 북벌을 개시하여 1786년에는 찐씨 정권마저 몰아냈다. 남부의 응우옌씨 정권과 북부의 찐씨 정권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남북국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이때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하던 떠이선 왕조의 태조 응우옌반후에는 응에안에 있던 카이산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씨앙쿠앙에 침입하게 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떠이선 입공을 요구했다. 이에 열받은 위앙짠 왕국(라오스의 란쌍 왕조의 후예이자, 라오스 3왕국 시대의 하나, 한글판 위백의 비엔티안) 국왕 차오 난타센은 씨앙쿠앙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1788년에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산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차오 난타센은 씨앙꾸앙의 떠이선 입조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씨앙쿠앙은 위앙쨘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의 세력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위앙쨘 왕국이 멸망하면서 씨앙쿠앙은 시암 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에 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에 씨앙쿠앙은 통킹과 루앙프라방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양국 국경에 나뉘어져있는 동네다.
1788년, 떠이선의 세력을 두려워한 중흥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소통제(昭統帝)에 의해서 청나라 군이 들어오자 떠이썬 군은 청군 20만도 박살냈다. 일단 선봉군을 몰아낸 떠이선 정권은 청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베트남의 통치권을 확인받는다. 응우옌씨 3형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중흥 레 왕조마저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소통제는 청으로 도망갔고, 떠이선은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3.1. 응우옌푹아인의 역공
- 응우옌푹아인은 떠이선 정권이 중부로 물러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응우옌씨 정권 시절의 일부 영토를 수복하기도 하지만 다시 떠이선 정권에 밀려서 도주하게 된다. (1차 시도)
- 이후 시암 세력을 끌어들여 떠이선 군과 싸우게 하지만, 1785년 떠이선 군과 시암 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떠이선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실패한다. (2차 시도)
-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당시 선교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비엔((Pierre Pigneau de Behaine, 1741년 ~ 1799년)를 통하여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응우옌푹아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아드랑 주교는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대월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대월에 파견하여 도와주면, 대월은 다낭과 뿔로 꼰도르(지금의 꼰 다오)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 대월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정 자체를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3차 시도)
- 그러나 응우옌푹아인 못지 않게 근성인이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며, 대월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응우옌푹아인도 포르투갈과 영국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캄보디아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렸다.
3.2. 떠이선 왕조의 분열과 멸망
1787년 찐씨 정권 멸망 후, 떠이선 3형제는 전국을 나누었다.차례로 응우옌반냑(阮文岳, Nguyễn Văn Nhạc), 응우옌반르(阮文呂, Nguyễn Văn Lữ), 응우옌반후에(阮文惠, Nguyễn Văn Huệ)
- 구 광남의 영토는 첫째이자 황제인 응우옌반냑이 통치하며 중앙 황제를 칭했고,
- 가정성 일대는 동정왕(東定王) 응우옌반르에게,
- 구 찐씨 정권이 다스리던 북부는 북벌을 완수한 셋째 북평왕(北平王) 응우옌반후에가 접수했다.
그런데 첫째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후에가 서로의 영토를 요구하며 충돌, 응우옌반냑이 응우옌반후에의 처첩까지 간음하는 등, 인륜을 저버리자 응우옌반후에는 남벌을 감행했고 응우옌반냑의 기반지 귀인을 공격한다. 이후 평화협정을 맺어 정식 분할통치를 실시했으나 내분으로 잠시 혼란기에 빠지자 응우옌푹아인이 가정을 침공했고 둘째 응우옌반르는 가정을 빼앗기고 만다.
참고로 1787년 청이 침입하자 응우옌반후에는 황제를 칭했다. 이른바 푸쑤언 조정(富春朝廷, 부춘조정)의 등장이다. 남쪽의 중앙 황제의 조정은 꾸이년 조정(歸仁朝廷, 귀인조정)이라고 불렀다. 떠이썬 왕조에서 푸쑤언 조정이랑 꾸이년 조정이 공존했지만 푸쑤언 조정이 더 힘이 강했기에, 이후의 연호는 꾸이년 조정의 타이득(泰德, 태덕)에서 푸쑤언 조정의 꽝쭝(光中, Quang Trung, 광중)으로 옮겨가게 된다. 응우옌반후에는 전 베트남의 통일에서 더 나아가 옛 베트남의 고토인 광동, 광서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응우옌반후에
1788년, 남부의 요충지인 자딘이 도로 광남 응우옌씨에게 넘어가면서, 광중제 응우옌반후에는 응우옌푹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계획했지만, 1792년에 3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부춘조에선 광중의 뒤를 이어 응우옌꽝또안(Nguyễn Quang Toản, 阮光纉)이 뒤를 이었다. 응우옌꽝또안은 응우옌푹아인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처한 태덕제 응우옌반냑의 귀인조를 지원하는 척 하다 그 영토를 몰수했고 다시 서산을 통일했으나 힘을 잃은 뒤였으며 조카에게 배신당한 응우옌반냑 역시 이듬해(1793) 죽었다.
완주의 응우옌푹아인은 차례로 싸 덱, 빈 롱, 미 토, 사이공을 점령하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02년, 임시수도 탕롱이 떨어지면서 떠이썬 왕조는 멸망했다. (마지막 4차시도) 응우옌푹아인이 세운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 전국을 통일하여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북분열의 기나긴 역사가 끝이 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열리게 된다.
4. 역대 군주
꾸이년(귀인) 조정 | |||||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1 | - | - ,<중앙황제>(中央皇帝), | 응우옌반냑(阮文岳/완문악) | 태덕(泰德/타이득) 1778년 ~ 1788년 | 1778 ~ 1793 |
푸쑤언령 꾸이년(제후국)[12] | |||||
- | - | - ,<효공>(孝公), | 응우옌반바오(阮文寶/완문보) | - | 1793 ~ 1798 |
푸쑤언(부춘) 조정 | |||||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1 | 태조(太祖) | 무황제 (武皇帝) | 응우옌반후에(阮文惠/완문혜) | 꽝쭝(光中/광중) 1788년 ~ 1792년 | 1788 ~ 1792 |
2 | - | - | 응우옌꽝또안(阮光纉/완광찬) | 깐틴(景盛/경성) 1793년 ~ 1801년 바오흥(寶興/보흥) 1801년 ~ 1802년 | 1792 ~ 1802 |
5. 둘러보기
베트남의 역사 | ||||
대월 | → | 대월 멸망 →응우옌 왕조 | ||
후 레 왕조 | ← | 서산조 |
[1] 청색은 광중제의 푸쑤언 조정, 노란색은 태덕제의 꾸이년 조정이며 초록색은 광남 응우옌의 마지막 생존자 응우옌푹아인의 영역이다.[2] 한국어로는 서산조 / 서산 왕조 / 떠이선 왕조.[3] 1차수도이자 공식적인 수도.[4] 남북분열 시기[5] 응우옌 왕조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임시수도[6] 현지 발음으론 '응우옌'. 하지만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들어선 응우옌 왕조와는 관련이 없다.[7] 사실상의 외왕내제 체제. 중국에 조공할 때에는 스스로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8] 西山, 현재의 빈딘 성(平定省).[9] 단, 완전히 평민출신은 아니고 일정부분 기반은 있었다.[10] 사실 한나라도 한 고제 사후로 여후를 비롯한 여씨 일가가 한 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했었고, 명나라도 홍무제가 공신들을 너무 많이 숙청하는 바람에 건문제가 삼촌들을 견제, 숙청하려다가 역으로 영락제에 의해 정권이 뒤엎어지는 혼란상을 겪었지만 어쨌거나 황실내의 내분이었기 때문에 왕조는 유지된데 반해서 떠이선 왕조는 유지되지 못했다.[11] 다만 나중에 와서는 중국인들과 등을 들리는 모습을 보인다.[12] 푸쑤언의 제2대 경성제가 꾸이년을 점령하여 완문보를 제후로 임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