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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33:52

상월원각대조사

대한불교천태종의 역대 종정
상월원각대조사
(1966-1974)
남대충 대종사
(1974-1993)
김도용 대종사
(1993-현재)
파일:상월원각대조사 존영.jpg
상월원각대조사진영(上月圓覺大祖師眞影)
1923년 1월 14일[1] ~ 1974년 6월 17일 (향년 52세)

1. 개요2. 생애
2.1. 천태종을 중창하기 전2.2. 구인사 창건2.3. 천태종을 중창하다2.4. 마지막 법문 그리고 사망
3. 출생년도와 속명 논란
3.1. 기존 자료에 따른 상월 조사의 생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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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고
묘법(妙法)은 무생(無生)이며
연화(蓮華)는 무염(無染)이다.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생(無生)에 안주(安住)하여
무염(無染)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리(無上菩提)요
무애해탈(無碍解脫)이며
무한생명(無限生命)의 자체구현(自體具現)이다.

일심(一心)이 상(常) 청정(淸淨)하면
처처(處處)에 연화(蓮華) 개(開)니라.
상월원각대조사 법어
대한민국승려. 속명은 박준동(朴準東)이라고 알려졌지만 최동순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박준각(朴準角)이다. 법명이 상월(上月)[2][3], 법호가 원각(圓覺)이다. 불교계에서는 보통은 법호를 앞에, 법명을 뒤에 넣어 호칭하므로 '원각 상월'이어야 자연스럽지만 천태종에서는 '상월 원각'이라고 부른다.

500년간 맥이 끊겨진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3대지표인 애국불교생활불교대중불교를 전개해 중생의 구제를 실천하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참선 수행을 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을 세웠다. 교리는 천태종의 법맥을 이었으나 주경야선 수행을 통하여 나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으로써의 역할을 더욱 중요시했다.

2. 생애

2.1. 천태종을 중창하기 전

파일:상월 대조사의 출생지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jpg
하늘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상월의 출생지 노곡면이다.

상월은 1923년 1월 24일[4],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現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에서 밀양 박씨 집안의 박영진(朴泳鎭) 거사와 모친 삼척 김씨 부부 사이에서 1남 5녀의 맏이로 출생했다.[5] 종교나 비결서(秘訣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향이 비결서들에서 말하는 길지 후보에 들어가기도 해서, 종종 마을 근처에 이런 '도인' 수련을 하는 이들이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1926년(3세) 무렵에 '반체'라는 순회식 서당에 들어가 한학 공부를 하였다. 글공부를 가르칠 훈장이 어떤 지역에 들어와 일정기간 가르치면 떠나고, 다른 지역에서 또 임시 서당을 개설하여 가르치다 떠나는 식이었다. 상월이 한학 공부를 한 기간은 대략 10여 년으로 추측되지만, 이렇게 띄엄띄엄 공부했기 때문에 실제 공부기간은 훨씬 짧을 것이다. 상월의 고향 마을에 들어와 반체를 개설한 이들은 도참설이나 도술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상월은 이들에게서 종교적 영향도 일부 받은 듯하다.

한학 공부 중이던 1930년(7세)에 상월의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죽음은 상월이 종교적 성향을 키우는 한 계기가 되었다.

1936년에 마읍 골짜기에 2년제 간이학교가 들어섰다.[6] 상월은 이듬해(에 마읍 간이학교에 입학하여 2년제 과정을 마쳤다.

1939년(16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그해에 상월은 노곡리 심상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원래대로라면 3학년에 편입해야 했지만, 공부를 잘했다고 월반한 듯하다. 심상소학교에 들어간 뒤 상월은 매일 40리 길을 걸어다니며 등하교하였다.

1941년에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심상소학교 6학년 재학 중에 중퇴하였다. 비록 중퇴했지만, 어린 시절에 한학을 공부하고 현대식 학교도 다녔기 때문에 고향 산골마을 기준으로는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학교를 중퇴한 뒤 상월은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부득불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였다. 상월은 2대 독자였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할 만한 삼촌들도 없었다. 고향 마을의 집도 잃고 상마읍의 이곳 저곳을 온 가족들이 떠돌아다니는 판이라, 친지의 소개로 삼척읍 정하리에 있는 협동유지회사에 취직하였다.

한편 상월의 여동생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상월은 오노다(小野田) 시멘트[7] 삼척공장[8]에 입사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오빠를 뒷바라지하고자 함께 삼척으로 내려왔는데, 오빠가 아침마다 시멘트 공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42년에 직장을 바꾼 듯하다. 아무튼 상월이 취직하여 번 돈으로 상마읍 원터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원터는 고향 봉촌에서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약 450 m 떨어진 곳이었다.

1943년(20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는 조선인 징병령을 내린다. 그해 8월, 상월도 징병되어 일본군으로 배속, 평양을 거처 북쪽으로 간다. 일설에는 만주에서 관동군에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상월 자신도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함께 지냈던 이의 증언도 없으므로, 상월의 군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만 했을 뿐이다.

1945년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고 1년 뒤 1946년(23세)에 상월이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돌아왔을 때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한다. 돌아온 뒤 약 1년간 평범하게 농삿일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 기준으로는 많이 공부한 아들이 평범하게 농사꾼으로 삶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농삿일을 줄이고 다른 일을 찾도록 권유하였다.

1947년(24세)에 '오 선생'이라는 사람이 상마읍리에 찾아왔다. 이른바 '도인'이라고 불리는 부류였는데, 주문을 외우고 흙을 발라주며 기치료를 하여 환자를 낫우는 힘이 있다고 하여 오 선생을 찾아 인근의 병자들이 찾아왔다. 이 모습은 상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루는 상월이 오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자기도 당신처럼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 선생은 "도를 닦으라." 하면서, "천수경을 줄 테니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암기하고, 그 다음에는 천수경 전체를 큰 소리로 읽어라."라고 알려주었다.

상월은 오 선생이 말한 대로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하여 하루 만에 다하였다. 그 다음에는 ≪천수경≫을 외우는데, 절반쯤 암기했을 무렵 오 선생이 오더니 상월에게 목숨을 걸고 산기도를 해보라고 하였다.

상월은 자기와 비슷하게 도 닦는 일에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과 함께 산기도에 나서기로 하였다. 저마다 다라니를 적은 종이를 나눠주고, 마을 근처 산 어딘가에 저마다 자리를 잡은 뒤, 길일을 잡아 입산하여 백일간 수행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 선생이 정해준 6월의 어느 길일에 저마다 기도처를 찾아 산에 올라갔다.

상월은 고향 뒷산 삼태산(三台山)과 두리봉 근처 움푹 파인 지형을 찾아들어갔다. 과거 마을의 반체 훈장 노릇을 하던 이들이 도인 수련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상월은 그 자리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수도하다가, 근처에 쓰러진 나무에 앉아 수도하였다. 그 나무는 소(沼) 위에 걸쳐져 있어, 그 위에 앉아 다라니를 외우다가 졸면 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칼을 챙겨 졸면 몸을 찌르기도 하고, 여치가 손가락을 깨무는데도 참고 넘어갔다고 한다.[9] 여치에게 물린 흉터는 평생 남았다.

상월은 좁쌀과 고추장을 챙겨갔으나, 점차 먹는 양을 줄이며 수도하였다. 처음엔 하루에 한 끼였다가 이틀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렇게 용맹정진한 결과 축지법이나 차력술 같은 기묘한 신통력을 얻었다고 한다.

6월 초에 입산하여 백일기도를 마치고 9월에 내려와보니 마을에 오 선생이 없었다. 오 선생이 마을의 노부인 한 명을 치료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죽게 한 탓이었다. 한여름에 열병이 닥치자 오 선생이 부인을 살리겠다고 예의 황토를 몸에 바르고 주문을 외우며 이불을 덮었는데 그대로 노부인이 숨을 거두었다. 아들들이 분노하여 오 선생을 때려 죽일 기세가 되었으므로, 상월이 내려오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도피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오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상월은 자신이 오 선생보다 더 높은 경지에 들었다고 확신했으므로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또한 같이 입산한 다른 친구들도 먼저 내려와 있었는데, 그들은 입산한 지 얼마 안 되어 포기하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이후 상월은 본가에 머무르면서 ≪정감록≫ 등 비결서와 불경을 읽었고, ≪정감록≫에 나오는 이른바 십승지들도 찾아다녔다. 또한 고향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인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와중에 다시 오 선생과 만나 축지법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상월은 꾸준히 오 선생과 소식을 주고 받았다.

1948년(25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9월에 상월은 가족들에게 출가하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섰다. 비록 '출가'란 말을 썼지만,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계를 받아 비구승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종교인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출가하겠다고 선언한 뒤 집을 나와 원덕읍에 있는 외가를 찾아가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이 상월에게 행랑채를 빌려주니 거기에 머무르며 주술치료를 시작하였다. 과거 오 선생이 마읍에서 했듯이 황토를 발라주고 주문을 외우며 병자들을 낫우었다. 마을에 용한 선생이 찾아왔다고 하여 소문이 나 점차 병자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상월은 외가에서 보름쯤 머무르다가 떠났다. 그렇게 49년(26세) 봄까지 강원도 삼척시태백시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점차 명성을 얻어 '신원(神元) 선생'이라고 불렸다.

상월은 강원도 산골의 토속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자신도 도인 수련을 한 적이 있었지만, 민간신앙에 대해서는 명백히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환자의 집에서 전통적인 가택신앙을 하지 못하게 막고 가택신들을 모시는 단지 등도 모두 부숴버렸다. 그런 귀신이 사람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활동하는 와중에 상월은 민경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민경덕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였지만, 차력술 등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로 수련하는 이였다. 상월이 차력을 보여주자 여기에 감복하여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추종자들이 모여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빨치산들이나 가담자들이 지역의 지주였던 민경덕을 핍박했다. 민경덕은 상월에게 십승지로 떠나자고 했고, 상월은 공주시 마곡사 근처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49년(26세) 4월 무렵 상월은 민경덕과 다른 추종자들을 이끌고 충남 공주시 유구읍 구계리로 들어갔다. 바로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손꼽았던 그 지역이었다.[10] 과거에 비결서를 읽고 십승지를 찾아다녔던 경험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략 1년간 구계리에서 ≪천수경≫을 낭송하고 차력술을 연마하였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은 민경덕이 대었다.

1950년(27세) 봄에 인근에 있는 태화산(泰華山) 부용암(芙蓉庵)[11]으로 수련장소를 옮겼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일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산속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상월 공동체를 매의 눈으로 주시했고, 상월은 결국 이런 위험에 밀려 공동체를 해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상월을 따라 이주하다가 점차 떨어져나갔고, 상월을 돕던 민경덕 일가도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상월은 51년(28세)에 (충북 단양군 영춘면) 소백산 여의생문봉 아래 여의생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역시 ≪천수경≫을 낭송하며 병자를 낫우는 활동을 하여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후일 천태종의 2대 종정이 된 남대충도 이때 상월에게 길을 안내해준 인연으로 제자가 되었다 한다.

여의생문봉 옆에 있는 뒤시랭이문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작은 산줄기를 상월은 눈여겨보았다. 그 산줄기가 마지막에 맺은 작은 봉우리가 영주봉(수리봉)이다. 상월은 영주봉 아래 있는 골짜기를 연화지(蓮華地)라 불렀는데, 아마도 ≪묘법연화경≫(법화경)에서 따온 듯하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대상으로 한 주요한 경전에는 ≪천수경≫뿐만이 아니라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약칭 '관음경')도 있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법화경≫에 주목했을 것이다.

2.2. 구인사 창건

파일:초기의 구인사 사진.jpg
초기 구인사의 사진.

1951년(28세) 단옷날 연화지에 초가집을 몇 채 지어 구인사를 창건했다. 물론 건물들은 그 전부터 지었지만 단오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고 보고 창건기념일로 삼았다. 구인사에서는 지금도 단오를 특별히 보낸다.[12]

한편 상월은 구인사에서 계속 수도하다가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그 날짜도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종단이 1987년에 발간한 ≪상월원각대조사오도기략≫(이하 '오도기략')에서는 51년 음력 12월 28일[13]이었다고 설명하고, 최동순도 ≪처처에 백련 피우리라≫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천태종 승려 세운은 2016년 발표한 논문 <상월원각의 연구>에서 '오도기략 집필에 참여한 승려 여문성[14]이 구술하는 과정에서 착각했다.'고 주장했다. 여문성이 나중에 증언을 수정하기를, 상월이 대각을 얻은 날짜는 1956년(33세) 음력 1월 18일[15]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상월원각의 연구>에 따르면 여문성은 상월이 51년에 한 번 깨달음을 얻고, 56년에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논문 저자 세운은 상월이 51년에 초각을 얻고 56년에 대각을 얻었다고 해석하였다.

51년인지 56년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구인사에서 수도하던 50년대의 어느 날 새벽 3시, 상월은 갑자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고 외치며 일어서더니 벼락 같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를 보라. 동천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일월이 머리 위에 있으니 천지가 크게 밝도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내가 탄생했다.”

천태종에서는 이때 상월이 대각(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명한다.[16]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상월은 대중들을 불러 모아 3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설법하였고, 설법이 끝난 뒤에도 계속 정진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행법들로 대중들을 지도했다. 예를 들면 ≪천수경≫ 독송이나 천수다라니 주송, 불보살의 명호나 ≪대방광불화엄경≫과 같은 불경의 제목, 옴 마니 반메 훔 같은 진언, ≪정감록≫에 나온 '궁궁강강' 같은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1953년에는 전쟁 휴전 협정, 1960년에는 4.19 혁명, 그리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구인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대략 1960년 즈음부터인 듯하다. 67년 언론보도[17]에서는 보도 시점에서 7년 전(1960년)부터 구인사에 '인삼주'라고 불리는 약수가 좋다고 소문이 나, 강원도나 경북 일대에서 정신병환자나 중풍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설명했다.[18] 기사에서는 "절이라기보다 요양소가 된 구인사와 박씨."라고 설명하고, 상월을 카리스마적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에 가깝게 묘사했다. 아마도 60년대 구인사는 병자들을 위한 요양소에 가까웠고, 상월과 추종자들이 낮에는 약초를 재배하여 요양소를 지었으며, 밤에는 환자들과 별개로 주술적인/종교적인 수련을 행한 듯하다. 이러는 와중에 점차 불교 신자들도 모여들어 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시작할 여력이 생겼을 것이다.

파일:구인사 수련대회_1965년 8월 23일.jpg
1965년(42세) 2월, 소백산을 나와 영주 봉래사[19]를 찾아 처음으로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7일 동안 법회를 열어 설법하였다. 그 외에도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설법하여 영주뿐만 아니라 서울ㆍ대구ㆍ부산 등 전국 각지에 신자들이 점차 생겼다. 또한 구인사에서 3일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돌아 숱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2.3. 천태종을 중창하다

파일:상월 대조사 천태종.jpg
1966년(43세) 8월 30일, 구인사를 창건한 지 15년 만에 상월은 대한불교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중창[20]하기로 결심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ㆍ삼제삼관(三諦三觀) 등 종지를 계승하여 종헌과 종법을 마련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이듬해 67년(44세) 1월 24일에는 허가를 받긴 했는데, 당시에는 정부가 조계종 이외의 불교종단을 따로 인정하지 않아서 '천태종대각불교포교원(天台宗大覺佛敎布敎院)'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대각(大覺)이란 단어는 11세기 고려 승려로 해동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서 땄다.

1960년대는 불교계가 크게 비구승과 대처승(아내 있는 승려) 무리로 나뉘어 분열이 격화되던 때였다. 그래서 정부는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한 뒤, 비구승과 대처승들을 통합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이란 이름으로 등록해주고 기타의 종단 허가 신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계종에 정식으로 등록된 사찰이나 암자를 제외하고도 넘쳐나는 절과 암자들을 관리하고자 '포교원'이란 이름으로 불교단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조금 숨통을 열어주었는데, 천태종단은 이때를 타서 신청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천태종단 이외에도 포교원 형식으로 불교단체들이 여럿 정부에 등록하였다.

한편 자기 뜻과 관계없이 조계종에 들어가게 된 대처승들은 자신들의 종단을 따로 인정해달라고 법정투쟁을 하였고, 결국 1970년에 태고종으로 따로 분리를 인정받았다. 이런 법정투쟁 때문인지, 태고종이 정식 종단으로 인정받기 전에도 정부에서도 점차 과거보다 종단 허가를 쉽게 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결국 60년대 말에는 이른바 '포교원'으로 등록된 불교단체들이 대거 '종단'으로 허가받았는데, 천태종도 종명변경신청을 하여 1969년(46세)에 정식으로 '대한불교천태종'이 되었다.

이렇게 정식 종단으로 허가받고자 애쓰는 동안, 상월은 종단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건축불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자동차 도로를 지어 심각한 교통문제를 해결하였고, 초가집을 헐고 총무원ㆍ설선당ㆍ광명당ㆍ판도암 등 많은 건물들을 새로 지었으며, 신도조직과 포교생활을 확충하고, 각종 제도를 수립하는 등 종단조직을 확립하는 데 힘을 썼다.

67년 언론보도[21]에서는 상월이 구인사에서 약초를 재배하며 번 돈 60만 원으로 64년과 66년에 각각 요양소 한 채씩을 지었는데, 돈을 받지 않아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다고 하였다. 개중에는 너무 가난해서 도리어 상월이 여비를 보태준 사람도 있었다고... 그 외에도 66년에는 단양 영춘면에서 (구인사가 있는) 백자리까지 6 km 산길을 자비 70만 원을 들여 도로를 내서 군수에게 표창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한편 69년에는 당국에서 문제성 여부를 검토하는 1백여 개 신흥종교 명단에 천태종도 이름을 올렸다는 보도도 나왔다.[22]

6-70년대까지만 해도 국토에 민둥산이 넘쳐났으므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사업을 국가적 시책으로 실시하였다. 산림청을 만들고 새마을운동과 녹화사업을 연계하며 도벌(불법 벌목)을 강경하게 단속했다. 그 무렵 천태종단은 구인사 경내를 넓히고자 인근 국유지를 불하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로부터 조림( 만들기)을 한다는 조건으로 67년에 약 180헥타르, 70년에 약 260헥타르 넓이 국유지 임야를 대부받자, 종단은 약속대로 조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1973년 4월까지 나무 2백만 그루를 심었고, 농림부 장관 명의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종단이 성공적으로 산림녹화를 했기 때문에 해당 토지를 정식으로 불하받았음은 물론이었다.

2.4. 마지막 법문 그리고 사망

파일:상월원각대조사 탄신 63주년.jpg
1973년(50세) 생일(음 11월 28일)[23] 오전10시, 상월은 광명당에 대중 4천 명이 모인 가운데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 이것이 상월의 마지막 법문이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 멸할 때에 만법이 꺼지는 것이다. 만법이 비었으니 나도 장차 가리로다. 사회의 모든 사람이 탐착하며 바라는 부귀와 영화는 한조각 구름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몽환과 같느니라. 죽음에 임하여 허망함을 개탄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적에 무엇이 가장 존귀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영원히 빛나고 보람있고 길이 남는 일이 어떠한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느니라. 불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마음이 근본이 되어 맑고, 바르고, 어질고,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니, 부처님의 바른 법을 잘 알고 잘 보호하며 실천하여 한없는 세상에 영원한 안락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여라.

생명이 있는 자는 누구나 죽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일체의 존재는 생겨서는 멸하는 것이니, 이 도리를 모르고 백년 동안 사는 것보다는 이 도리를 알고서 하루를 사는 편이 낫다. 농부가 보습ㆍ삽ㆍ괭이를 들고 밭을 갈아 종자를 심어 열심히 가꾸어 수확을 얻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계율을 지키고 퇴전함이 없이 수행하면 최고의 종마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을 쓰러뜨리는 방법으로써는 행복에 답할 수가 없다. 자비의 마음, 선업에 힘쓰는 것만이 사람의 운명을 진실로 행복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남과 사회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많을수록 정복의 사회, 평화의 사회로 실현되는 것이다. 사람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면 정신없이 기뻐하는데 두 가지가 잘못된 것이다. 행운을 만나는 것은 만날 업이 과거에 쌓인 것으로, 즉 선업의 저금이 쌓이어서 언제라도 쓰이게 되어있는 것을 꺼내어 쓴 것과 같은 것이다. 재난을 만나는 것은 재난을 만나게 될 과거에 악업이 쌓인 결과이다. 이 세계는 일심의 세계이며 인생은 업이 짜서 만든 무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업을 맑게 하고자 하는 반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나의 설법을 직접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주간이 특히 중하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또 내가 먼 곳으로 떠나가서 있더라도 퇴굴심을 내지 말고, 스스로 항상 반성하며 마음자리를 바로잡을 것이며, 지금은 말법시대이므로 믿음이 엷은 사람은 좋은 인연을 놓칠 것이요. 믿음이 굳고 여일한 사람은 좋은 결실을 볼 것이다.”

상월은 이후 병이 들어 점차 병세가 깊어지자,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제불불출세(諸佛不出世)
역무유열반(亦無有涅槃)
사생본공적(死生本空寂)
영허일월륜(盈虛一月輪)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또한 열반에 들지도 않았네
나고 죽는 것이 본래 없으니
찼다가 빈 것이 한 바퀴 달이로세.

74년 4월 무렵부터 상월은 병을 앓았는데, 낫지는 않고 점차 병세가 심해졌다.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 지 8년째 되는 1974년 6월 17일(음력 윤 4월 27일)[24] 오전 8시 30분, 세수 만 51세[25] 사망했다.[26]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 같은달 23일에 불교식 다비장(화장)이 아니라 매장으로 하였고, 장지는 상월이 생전에 말했던 대로 구인사를 품은 소백산 수리봉(영주봉) 정상[27]으로 정했다. 천태종단은 상월의 묘를 적멸궁(寂滅宮)이라고 부른다.[28]

구인사 대조사전에서 수리봉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죽령으로부터 구인사까지 소백산을 종주하는 길목[29]이기 때문에 구인사 신도뿐만 아니라 숱한 등산객들이 그 길을 오간다.

3. 출생년도와 속명 논란

천태종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상월은 1911년 음력 11월 28일에 태어났지만, 동국대 최동순의 연구와 고증한 바에 따르면 정확한 생년은 1922년이다. 따라서 1922년의 음력 11월 2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23년 1월 14일이므로, 위 개요에서는 생년월일을 그렇게 표기하였다. 또한 속명도 기존에는 박준동(朴準東)이라고 알려졌지만 고증에 따르면 박준각(朴準角)이라고 하였다.

최동순은 생년을 실제보다 위로 끌어올린 것은 상월 본인의 의사였으리라 추측하였다.[30] 지나치게 젊었기 때문에 일부러 나이가 들었다고 한 듯한데, 상월의 실제 생년을 아는 천태종 관계자들도 그런 뜻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는 것. 상월의 생년이 1911년으로 나타난 최초의 문헌자료는 1970년에 천태종단이 발행한 ≪천태종약전≫인데, ≪천태종약전≫과 이후 종단의 자료를 비교하면 연대기가 서로 맞지 않는다. 최동순은 억지로 상월의 생년을 11년 끌어올리다 보니 생긴 혼란이었다고 본다.

1967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 3면, '양지 제72화, 중풍환자 요양'이라는 기사에 몇 가지 주목할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상월의 나이를 57세라고 보도했는데, 상월의 생년을 1911년으로 보고 세는나이로 계산했다는 뜻이다. 또한 보도에서는 상월의 속명을 박준동(朴準東)이라고 했다. 만약 상월의 초명이 정말로 '준각'이라면, '준동'이라는 이름은 대각을 얻었다는 때부터, 어쩌면 출가를 했을 때부터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상월은 공문서 등에서 속명을 쓸 때에는 '준동'이라 하였다. 더구나 보도에서는 구인사 창건을 42년 전이라고 설명했다. 1967년에서 42년 전이라면 1925년, 상월이 1911년생이라고 하더라도 고작 15세일 때이다. 이 보도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구인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이때부터 혼란이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본 항목에서는 최동순의 주장에 근거하여 상월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나, 천태종단이나 다른 학자들은 최동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 항목과 내용이 다른 자료를 접한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 바란다.

3.1. 기존 자료에 따른 상월 조사의 생애 연표

최동순 저서 ≪처처에 백련 피우리라≫(2009, 도서출판 운주사)는 그동안 천태종단에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이런 자료들에 근거하여 발표된 다른 학자들의 주장과 내용이 매우 다르다. 따라서 기존 자료에 따른 상월의 생애를 연표를 참고 삼아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기존 자료'들이 상월의 연대기를 상당히 다르게 주장한다는 점이다.

흔히 참고하는 자료는 바로 ≪상월원각대조사오도기략≫(이하 '오도기략')이다. 당시 천태종 2대 종정 남대충이 주로 구술하고 여문성 등도 구술하였으며, 그 내용을 조명기 박사가 정리한 간략한 기록이다.[31] 집필은 1982년에 있었지만 출판은 87년에 하였다. 오도기략은 한국 천태종을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도 상월의 생애를 서술한 중요한 자료로 인정한다.

오도기략 이외에도 ≪천태종성전≫(1971), ≪상월조사와 천태종≫(1981), ≪천태종통기≫(1983), ≪불멸의 등명≫(2000) 등 천태종이 발간한 서적들이 저마다 상월의 생애를 설명하지만, 놀랍게도 상월의 구체적인 생애가 제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상월이 중국에 다녀왔다는 시기나 대각을 얻었다고 하는 연도가 1~2년도 아니고 10여 년씩이나 널뛰기를 하는 판. 심지어 천태종성전은 아직 상월이 입적하기 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상월의 고향이 강원도 삼척이 아니라 구인사가 있는 소백산 근처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최동순이 아니더라도, '천태종이 상월의 생애를 제대로 서술한 정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하 연표는 주로 오도기략에 따라 서술하였다.
연도 나이 행적
1912 0세 1월 16일[32], 박준동(朴準東)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에서 탄생.
1915 3세 할아버지가 동네 서당에 입학시켰다. 1923년(11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 7세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고, 상월은 충격을 받았다.
1924 12세 삼척에 있는 유지공장에 취직.
1925 13세 좁쌀과 고추장, 칼 등을 챙기고 고향 삼태산에 들어가 백일기도.
1926 14세 집을 나와 태백산금강산 등 명산대찰을 5년간 두루 돌아다님.
1930 18세 중국에 들어가 오대산[33] 문수도량이나 보타산[34] 관음도량 등을 순례하고, 티베트몽골 지방까지 돌아보았다,
1936 24세 귀국하여 강원도와 소백산 일대에서 9년 동안 종교활동, 수도생활을 함. 인근지역에서 영험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 시기에 태백산의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수도하기도 했다는) 어느 굴[35]에서 2년간 수도했는데, 42년 어느 날 홀연히 저 멀리 소백산의 현 구인사 터에 흰 연꽃이 만개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36]
1945 33세 술객이 모인 8장사(壯士) 집에서 차력을 보여주고 민경덕/민원홍 등 제자를 받았다. 무리를 데리고 소백산 근처(충북 단양군 백자리栢子里, 현 구인사 일대)에 들어가 마을 사람의 집에 거처. (태백산 수도 중에 목격했다는) 구인사 터에 들어가 제자들과 함께 손수 초가집을 짓고 단옷날에 남자 제자 8명이 들어감으로써 구인사(求仁寺)가 시작.
1950 38세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공주 마곡사로 6개월간 피신했다가 구인사로 돌아와, 엉망이 된 구인사를 재건하고 수도생활을 계속했다.
1952 40세 1월 24일[37] 새벽 3시에 대각을 얻었다.
이후의 행적은 최동순이나 다른 이들의 차이가 없으므로 생략함.
1974 63세 구인사에서 입적. 향년 62세[38].

최동순의 저서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다르다. 상월의 생년뿐만이 아니라 구인사 창건년도도 다르다. 최동순은 1951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광복 직전인) 1945년이라고 한다. 마곡사 일대로 간 시기나 이유도 서로 완전히 다르게 설명한다. 최동순은 1949년에 민경덕이 좌익 세력들에게 핍박받으므로 상월이 근거지를 마곡사 십승지 터로 옮겼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서는 1950년에 6.25 전쟁 때문에 구인사에서 마곡사로 '잠시 피난'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최동순은 상월 조사가 정감록 등 비결서,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도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부분이 없고, 명산대찰을 순례하거나 중국 불교성지를 다녔다고 설명하는 등 좀 더 불교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1] 1911년생이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923년생이다.[2] 아마도 상월(上月)이란 이름을 사용함도 출가 직후, 또는 그 이후였을 것이다. ≪천태종약전≫이나 ≪불멸의 등명≫ 등 일부 문헌에 따르면, 상월이 1925년에 충북 제천 영암사(靈岩寺)에서 김순관(金順寬)이라는 승려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또는 승려로서 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26년) 우리나라의 명산대찰과 선지식들을 두루 만나러 다녔는데, 금강산에서 법은(法隱)이라는 승려를 만나 수계하여 상월(上月)이란 법명을 얻었다고 한다. 종단은 상월이 1911년에 태어났다고 하므로 각각 15, 16세 때 일이다. 그러나 상월이 1923년생이라면, 당연히 24년에 순관을 만나고 25년에 수계했을 리가 없다. 또한 제천 영암사가 어디를 말하는지 불확실하다. 적어도 2018년 기준으로 제천시에 '영암사'라는 절은 없다. 영동군에도 영암사가 있지만, 1938년에 창건되었다 하므로 상월이 찾아갔다는 그 사찰은 확실히 아니다. 제천 영암사가 대각사(大覺寺)로 이름을 바꿨다는 글도 있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제천 대각사란 아마도 천남동에 있는 대각사를 말하는 듯.[3] 상월 1911년생설을 따르는 승려 세운은 2016년에 발표한 논문 <상월원각의 연구>에서, 상월이 순관을 만났다느니 법은을 만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최동순이나 세운이 저서 등에서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상월'이라는 법명은 누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한 듯하고, 따로 특정한 승려를 은사(恩師)로 받들어 가르침을 받거나 수계하지는 않은 것 같다.[4] 음력으로는 1922년 11월 28일.[5] 상월이 태어나기 전, 모친은 하늘에서 용을 타고 내려온 선인으로부터 불덩어리를 받고 가슴에 안긴 채 방으로 들어간 태몽을 꾸었다. 같은 시기에는 상월의 조부 박재식(朴載植)옹도 손이 귀한 집안이었기에 조부모가 밤에 후손을 보게 해달라고 오랫동안 칠성 기도를 올렸다가 선인이 나타나 하늘을 향해 손을 가리키며 저곳을 보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엄청난 빛에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천신과 신장들이 앞마당에 모시고 온 가마를 열자 조부는 두 손으로 동자를 받들어 집안으로 모시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이후 산모가 임신 중 만삭이 되자 며칠 전부터 마을 주위가 무지개빛 서기로 감싸진 데다 마을 사람들도 상서로운 기운을 보며 무언가 좋은 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고, 마당에서 들린 이상한 기척에 방 문을 열고 나온 가족들도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마당에 쓰러진 산모와 아기를 방으로 옮기자 뒷산에서 무지개빛 서광(瑞光)이 나타나 마을까지 이어진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했다.[6] 이 간이학교는 후에 근덕초등학교 마읍분교가 되었다가 2016년에 폐교되었다.[7] 일제강점기 유명했던 시멘트 공장회사. 일제강점기 한반도 여러 곳에 이 회사 공장들이 있었다. '오노다'(小野田)는 기업이 처음 시작한 야마구치현의 지명이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1998년 10월 1일에 지치부오노다(秩父小野田)가 일본시멘트(日本セメント)와 합병하면서 사명을 '타이헤이요(태평양|太平洋) 시멘트'로 바꾸었다.[8] 삼척에 있던 공장은 광복 이후 동양시멘트가 인수하였으며 2017년에 삼표시멘트로 상호를 변경했다.[9] 여치는 턱이 발달해서 물리면 매우 아프다.[10]정감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충남)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두 물줄기 사이 주변 1백 리 땅은 살육을 피할 수 있다."(公州, 維麻, 兩水之間, 周圍百里, 可免殺戮.) 지도에서 찾아보면 유구천과 마곡천이 산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흐르다 만나, 마치 반도 같은 형상을 이룬다.[11] 마곡사에 딸린 작은 암자이다.[12] 종단 자료에서는 1945년 33세 나이로 민경덕 등과 함께 소백산에 찾아와 구인사를 지었다고 설명한다.[13] 양력으로는 52년 1월 24일.[14] 여학봉(呂鶴鳳)의 딸로, 오도기략에는 '임이(任伊) 행자'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상월원각의 연구>에 따르면 여문성은 본인은 '임이'도 나중에 상월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증언하였다. 아무튼 여문성은 상월이 소백산 찾아왔을 때 아버지 학봉과 함께 상월을 따르다가 천태종 승려가 되었고, 후일 비구니 상임지도법사 및 종의회의원을 맡았다.[15] 양력 2월 29일.[16] 최동순은 상월원각대조사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오 선생 말을 듣고 삼태산 인근에서 백일기도를 했을 때라고 본다.[17] 출처: 1967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 3면, '양지 제72화, 중풍환자 요양'[18] 해당 언론기사를 찾아보면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아래 '출생년도 논란' 부분 참조.[19] 당시 천태종단에서 처음으로 등록된 사찰이다. 현재는 성화사로 변경.[20] 중국의 천태종을 받아 의천이 개창한 해동 천태종을 계승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종단은 '중창'이라고 표현하지만,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무원장을 역임한 승려 정산도 설법에서도 나오듯이 "창종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창종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 천태종을 개승하는것에 더해 오늘날 현실에 맞는 관음정진 염불수행과 삼대지표 삼대강령이 그러하다.[21] 출처: 1967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 3면, '양지 제72화, 중풍환자 요양'[22] 1969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5면[23] 양력으로는 73년 12월 12일. 상월 1911년생설을 따랐으므로 사진 속에는 '제63회 대조사 탄신'이라고 씌었다. 만약 정말로 상월이 1922년생이라면, 최동순의 주장대로 상월 자신이 나이를 끌어올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나이를 10여 년이나 틀리고도 상월이 그냥 있었을 리 없으니.[24] 일부 자료에서는 음력 윤4월 27일이 아니라 평달 4월 27일이라고 쓰기도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1974년 6월 19일자 기사에서 "대한불교 천태종 종정인 박상월 원각대조사가 지난 17일 오전 8시 30분에 구인사에서 사망했다."라고 보도하였다. 74년 6월 17일 사망이 확실하므로, 음력으로 환산하면 윤 4월 27일이 맞다.[25] 한국나이 52세.[26] 죽기 전, 부처님오신날을 마치고 열흘 만에 고향인 삼척을 방문해 어머니의 생신까지 축하해주면서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한 달 뒤에 사망했다.[27] 사람들이 부르는 지명이 뒤죽박죽이다. 묘소가 있는 산봉우리를 구인사 등에서는 영주봉이나 수리봉으로 부르는가 하면, 산악인들은 까칠봉/가칠봉이나 709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709봉이란 명칭은 정상이 해발 709 m라는 것이다.[28] 본래는 부처사리 또는 법체를 안치한 곳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29] 죽령구인사를 오가는 길이라고, 산악인들은 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행을 '죽구종주'라고 부른다.[30] 출처: 최동순, <응용불교 : 상월조사 행장 발굴과 연보 정정>, 한국불교학 54권, 2009[31] 그래서 책 제목의 끝이 '오도기략(悟道記略)'이다. 깨달음을 얻은(오도) 간략한 기록(기략)이란 뜻.[32] 음력으로는 1911년 11월 28일[33]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영산. 문수보살이 머무는 산이라 하여, 중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가 모두 신령하게 여기는 성지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도 이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34] 절강성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성지.[35]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설악산 금강굴ㆍ천성산 적멸굴ㆍ여수 향일암 등등 원효가 수도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동굴이나 암자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 태백산에 있는 것은 없다.[36] 오도기략에는 석굴에서 수도하다 구인사 터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목격했다는 내용은 없고, 9년간 수도생활을 했다고만 설명한다.[37] 음력으로는 51년 12월 28일.[38] 한국나이 6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