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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4:07:18

사할린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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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할린 부대.png
박시백, 『35년 2 - 1916-1920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비아북, 2018), pp.216-217.[원본은컬러]
파일:박시백 35년 3.png
박시백, 『35년 3 -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비아북, 2018), p.146.[원본은컬러]
<colbgcolor=#fff> 사할린 부대
Сахалинского отряда
창설일 1919년
해체일 1921년
별칭 니항 부대 尼港部隊
박일리아 부대
지도자 박일리아
성향 극좌, 볼셰비키, 아나키즘, 상해파
참전 러시아 내전
1. 개요2. 부대명에 대한 오해방지3. 악행
3.1. 반볼셰비키 민간인 학살3.2. 박 바실리(박병길) 살해3.3. 홍범도와 이청천에 대한 위협3.4. 마자노프에서의 폭력 및 약탈 사태3.5. 홍범도 폭행 및 살인미수 사건

1. 개요

사할린 부대(Сахалинского отряда)는 박일리아가 1919년에 설립한 사할린 대대를 시작으로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존재했던 볼셰비키, 아나키즘 등의 극좌 성향의 군사단체, 준군사조직이자 볼셰비키소비에트 공화국의 편에서 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테러조직이였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비호 아래에서 민간인 학살약탈, 고문 등의 숱한 범죄를 일으켰다.[3][4][5][6]

자유시 참변으로 1921년에 해체됐지만 1923년엔 사할린부대 출신의 김창수와 김오남이 홍범도를 피습하여 폭행하여 이를 부러트리는 폭행 사건을 일으켰다. 가해자들은 홍범도에게 현장에서 즉시 모두 사살되었다.[7]

국가보훈처에선 원래 독립유공자 부대로 취급하지 않았다가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에 박일리아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를 통해 "사할린 대대"와 "니콜라예프스크 해방전투"를 언급하며 사할린 대대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으나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선 사할린 대대와 니콜라옙스크 사건에 대한 행적을 삭제하면서 재평가 시도는 3년만에 수포로 돌아갔다.[8][9] 이명박 정부가 지원한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의 번역 성과를 통해 이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10] 그러나 2021년 8월 중순 홍범도 유해 봉환 무렵부터 뉴라이트와 진명행의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 민족주의가 감춘 우리 영웅들의 화려한 흑역사』에서 홍범도를 독립군 학살자 또는 책임자로 누명씌우기 위해 사할린 부대를 피해자로 미화하기 시작한 데 이어[11] 2023년에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으로 절정을 이루면서 극우, 뉴라이트, 일부 친윤을 필두로 사할린 부대는 홍범도의 배신으로 희생된 피해자들로 미화되고 있다.

2024년 4월 27일에도 홍범도에 대한 허위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덧글 참조 이들에게 반론으로 사할린 부대의 실체를 제시하도록 하자.

한국 독립운동의 주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게 왜 행운인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독립운동의 주류가 임시정부가 아니라 상해파였다면 한국 독립운동은 하마스처럼 됐을지도 모른다. 김립 피살 사건 의문의 재평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김구와 대립했던 상하이파에 비하면 김구파는 온건하고 인도적이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파타하마스의 차이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며 김구반공주의에도 참작할 점이 있다고 고려할 수 있다.

2. 부대명에 대한 오해방지

부대 이름에 사할린이 들어가지만 부대원의 상당수는 사할린 한인이 아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 문서에 서술된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의 2015년 논문에 의하면 이들은 사할린 외부아무르 강 지역에서 모집된 한인 부대였다.

실제로 사할린 한인 중에 사할린부대의 후손은 없다. 애꿏은 사할린 한인의 이름만 팔아먹은 부대일 뿐이다.

3. 악행

3.1. 반볼셰비키 민간인 학살

사할린부대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에서 반볼셰비키 민간인에 대한 숱한 잔혹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이정식[12],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A.G. 테플랴코프[13],「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14]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그해 5월 일본 구원 부대가 니콜라옙스크를 공격하자 러시아 적군과 박일리야의 독립군이 일본인 포로와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살해하고 후퇴한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사건, 尼港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사할린의용대는 아무르주 마자노프(Мазанов)로 이동하였다.
오세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고명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에선 이정식, 반병률, 오세호의 서적을 제외하면 러시아인 학살에 대한 서술을 생략하는 편이다.

3.2. 박 바실리(박병길) 살해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시기와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러시아 극동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명은 박 바실리 페트로비치(Пак Василий Петрович)이다.
(중략)
트랴피친은 해빙 후 일본군이 복수할 것을 우려하여 니콜라예프스크를 전소시키고 떠났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니항사변(尼港事變)’이라고 부르는 잔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트랴피친의 잔혹한 처사는 빨치산부대 내에서도 트랴피친에 반대하는 봉기를 야기하여, 트랴피친을 비롯한 지도자 7명이 체포되어 사할린주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트랴피친의 처형을 놓고 두 진영으로 분열되어, 이전 니항부대는 ‘고려청년동맹’ 출신들과 함께 트랴피친의 처형에 찬성하였으나, 니항부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박 일리야는 반대입장에 서 있었다. 동료들의 비난에 견딜 수 없게 되자, 김낙현·안기석·채재현 등과 함께 니항부대를 이탈하여 아무르주의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自由市))에 주둔 중이던 자유대대를 찾아갔다. 여기서 간부로 등용되어, 사령관 오하묵(吳夏黙)의 비서가 되었다.

1920년 10월 중순경 니항부대가 자유시에 도착하였고, 이후 자유대대와 니항부대의 대립 과정에서 1921년 1월 28일 밤 니항부대원들에게 희생되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박병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3.3. 홍범도와 이청천에 대한 위협

이들은 일본군의 학살에서 생존하기 위해 피난 온 홍범도이청천을 위협했고, 견디지 못한 홍범도와 이청천은 자유대대로 탈출하게 만들었다.
자유시참변에 원인
독립군들은 청산리전쟁 이후 만주에는 접촉할 곳이 없다. 왜들은 만주를 자유로 출몰하는 판이지라 동포들을 무분별 학살, 온갖 만행을 하는 판이라 어찌할 수 없이 러시아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동영현에 집결한 독립군을 통합하여 독립군 총사령부를 설정하고 홍범도 씨를 총사령관으로, 이청천 씨를 부사령관으로 선출하여 독립군을 통솔하였다.(중략)각 단체의 수령들은 배척을 당하고 군인들은 자유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박일리야는 홍범도, 이청천도 배제하려고 한다. 홍범도 씨와 이청천 씨는 책임상 자유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홍범도, 이청천은 탈출하여 오하묵 부대가 있는 자유시로 갔다.(중략)박일리야는 합하는 날이 되면 온 세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럼으로 합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으나 1천여 명 군대에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하니 농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농민의 원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농촌도 양식이 다 떨어진 형편이다.
"청산리대첩 참가자 이우석 친필 수기", 48-51면(51-54), 독립기념관 (자료번호 1-014724-000) #
뉴라이트는 이 증언을 외면하는 편이다. 하지만 홍범도에겐 이런 위협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3.4. 마자노프에서의 폭력 및 약탈 사태

위의 이우석 친필수기와도 교차검증되지만 사할린부대는 마자노프에서 숱한 폭력과 약탈을 일삼고 주민들의 식량을 모조리 쓸어가서 증오의 대상이 됐다. 사할린부대의 주둔지역은 지역농민과 충돌하기 직전이었고 현지인들은 사할린 부대의 추방을 청원했다.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년 3월 11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15]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박일리야는 합하는 날이 되면 온 세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럼으로 합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으나 1천여 명 군대에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하니 농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농민의 원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농촌도 양식이 다 떨어진 형편이다.
"청산리대첩 참가자 이우석 친필 수기", 48-51면(51-54), 독립기념관 (자료번호 1-014724-000) #
치타.
1921년 4월 23일 20시
전보
이르쿠츠크.
제5군 혁명군사호의 위원 슈먀츠키 귀하.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의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제369호

총사령관 에이헤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77쪽
원본 번역본 사진
당집회 위원들의 총사령관에의 청원

1921년 5월 13일
총사령관 귀하

부탁이 있습니다. 즉각 [판독불가]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에 3,000명이 있는데 3개월간 주둔하고 있습니다. 면 주민들은 가난하며, 이들이 새로 정주한 병사 3,000명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향후 그들이 계속 주둔한다면 들판에 뿌릴 종자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부대는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체포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는 무장충돌의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귀하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당집회 위원 안친페로프, 데예야토프, 프로야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9
원본과 번역본 사진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블라고베센스크 제01928호
1921년 5월 14일
전보
치타. 총사령관 귀하.

창립회의 아무르 위원들이 마자노보에서 타전합니다. 마자노보 지역에서 숙영하고 있는 한인부대가 주민들에 대해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대해 근거 없는 체포 및 폭력을 자행하고 지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저녁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여 그럼으로써 현재 아주 늦게 끝나는 농민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지시를 어기고 한인부대는 주민들에게서 계속 식량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창립회의 위원들은 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대립이 극단적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알리면서 한인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위한 실제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본인에게 타전하시기 바랍니다. 제178호.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8)
원본과 번역본 사진
독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배치된 곳의 지역주민들은 부대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대 철수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 및 내부적 성격의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인부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합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악화되면 농민과 한인부대 간의 전면적 투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 652호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참모장 시코미
암호해독: [판독불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66
원본과 번역본 사진
치타. 1921년 5월 14일.
제2군 사령관 귀하.
사본은 제12여단 정치위원에게.

특별사할린부대 한인 빨치산들이 일반 주민들에 자행하는 난동과 강압에 대한 불평등이 또다시 본인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은 생존을 위한 정상적 조건 보장이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내는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하에게 직접 이 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부과합니다. 동시에 혁명 질서의 유지와 감독을 위해 부대에 대리인을 파견하십시오. 귀하의 조치들로 인해 본인이 부대에 대한 불평을 듣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A. 라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5
원본과 번역본 사진

3.5. 홍범도 폭행 및 살인미수 사건

전술한 것처럼 홍범도는 상해파를 배신한 게 아니라 박일리아가 먼저 위협을 가해서 탈출한 것이지만 사할린부대원은 적반하장으로 왜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았냐는 궤변을 일삼으며 홍범도를 피습하고 폭행하여 이를 부러뜨려 홍범도의 목숨을 위협했다. 이에 홍범도는 정당방위로 사할린 부대원을 즉각 사살했다.
1922년 정월 초 6일 떠나 21일 만에 이르쿠츠크 나와 유하다가 1923년 4월 3일에 치타 나와서 사·오 삭 유하다가 8월 초 일일 블라고베셴스크 나와 수일 유하다가 배에 앉아 하바로프스크 나와 내린 즉 14일에 삭클니[16] 아른닷때에 있던 김창수·김오남 이놈들이 합동 군대 까란다시 군대와 쌈할 때에 나를 쌈하지 않았다고 나를 죽이자고 불시로 피짱으로 나를 치니까 두대 부러지므로 레닌이 체급 준 싸창으로 그 두 놈을 죽이고 칠일 주르만[тюрьма][17]에 갓기웠다가 레닌께서 회의 나온 일이 있소.
“홍범도의 일지”, ≪독립운동가자료이인섭수기류 1-007057-000≫ (독립기념관 소장) #
상대에게 홍범도 살해 목적이 없었다고 해도 명백히 미필적 고의에 해당하며, 홍범도는 이가 부러지는 폭행 과정에서 총을 사용한 것이므로 정당방위로 인정받은 것이다.
[원본은컬러] [원본은컬러] [3]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4]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p.166, 177, 195, 198-199.[5]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원어: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pp.47~51.[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고명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7] 반병률,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 ≪한국근현대사연구 ≫ 67, 2013, 631쪽.[8] 國家報勳處 編,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7卷, 2006-2007年度 褒賞者』, 2009, PP.331-332.[9] 박일리야의 공훈록(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공적개요( 「독립유공자 공적조서」)[10]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가 역사관 논란을 일으킬 때 자유시 참변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1] 이게 어떤 꼴이냐면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쿤밍역 칼부림 테러의 범인들을 체첸/위구르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12]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수상 이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평가됨.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선 국내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 연구의 1세대 권위자. #[13]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편집위원회(소련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회) 위원이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푸틴의 독재정부, 소련에 대한 미화, 러시아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공산주의, 반서방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성향.[14]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15]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16] 사할린[17] 쮸리마.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