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락태자 사련 谢怜 | |
<colcolor=#636363> 이름 | 사련(谢怜) |
호칭 | 선락태자(仙乐太子) 태자열신(太子悦神)[1] 화관무신(花冠武神)[2] 넝마선인(破烂仙人)[3] - |
키 | 178cm[6] |
생일 | 양력 7월 15일[7] |
소속 | 천계 |
성우 | 장광타오[애니메이션](1기)[9] 덩유시[애니메이션](2기) 쑤상칭[오디오드라마] 카미야 히로시[애니메이션] 박요한[애니메이션] 김예림[애니메이션][유년기] 하워드 웡[애니메이션] 몰리 장[애니메이션][유년기] |
배우 | 적소문[길성고조] 금서택[길성고조][유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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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를 위해 살아가렴. |
본편 기준 8백년 전 멸망한 선락국의 태자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다. 이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등선하여 사명경(四名景) 중 하나인 태자열신(太子悦神)이 되었다. 한 손에는 검을 들고 한 손에는 꽃을 든다고 하여[22] 화관무신(花冠武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80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는 두 번의 폄적을 겪고 넝마신, 고물신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일명 고물신선.
태자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인품도 좋기는 했으나 너무 귀하게 자란 탓에 세상 물정을 모르고 다소 황소고집이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행동이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23]
세 번째로 등선했을 때의 여파로 종이 떨어지고 다른 신관들의 궁이 무너지는 등 사고 친 것을 보상하기 위해 공덕[24]을 쌓으려고 천계의 임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여군산 임무가 끝난 뒤에는 신앙과 공덕을 모으기 위해서 어느 시골 보제마을의 쓰러져가는 집에 자리 잡아 보제관이라고 이름 지은 후 신도를 모은다. 다만 이름도 안 알려진
가진 법력이 없어 인간계에선 간단한 통령도 일일이 법력을 빌려야 하고, 법보도 사용할 수 없지만 예외로 흰 비단 약야만은 다루는 게 가능하다. 3권 이후부터는 자신의 패검이었던 방심을 돌려받아 검술을 펼치기도 한다.
2. 모습
애니메이션 | |
웹툰 | 오디오 드라마 |
그러나 폄적 후엔 주로 흰 도포에 머리카락의 일부는 흰 끈으로 올림머리를 묶고, 나머지는 풀고 있다. 주가를 가리기 위해 손목과 발목, 목까지 흰 비단으로 칭칭 감고 다니는데 그 비단 중 하나는 그의 법보인 약야이다. 또한 늘 삿갓을 메고 다니며 더울 땐 쓰기도 한다.
- [스포일러]
- 사실 약야는 비단에 혼이 깃들어 생겨난 정괴이다. 백무상이 법력을 불어넣었고, 사련의 피가 묻고, 그의 부모가 비단으로 숨을 끊으면서 원기와 사기가 묻어 변화한 것. 삿갓 또한 들고 다니게 된 사연이 있는데, 이는 후술 참고.
화성과 만난 이후로는 화성이 준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닌다. 가늘고 가벼운 은사슬에 걸려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고 한다.
- [스포일러]
- 이 반지의 정체는 화성의 유골이다. 화성은 사련이 없어지면 자신도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유골을 바쳤다. [26]
외모의 경우 원작에서는 긴 눈썹과 아름다운 눈에 온몸에는 영광이 흘러 제대로 바라볼 엄두도 나질 않는 모습으로,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고 한다. 여인의 골격은 아니지만 뒷모습만 보면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의 몸선을 가지고 있으며 땀을 흘릴수록 피부가 옥처럼 희고 매끄러워지는 체질을 가졌다.
원작에서는 흑발로 언급되어 있지만 애니메이션, 오디오 드라마 등의 미디어 믹스에서는 갈발에 금안(혹은 갈안)으로 묘사된다.
3. 작중 행적
3.1. 과거
3.1.1. 유년 시절 일화
선락 태자는 선경에 오르기 전 수행에만 전념했는데, 다음은 그중 세간에 널리 퍼진 두 가지 일화이다.첫 번째 일화는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선락국의 성대한 정월 제사 의식을 치르는 '열신무자'[27]로 선택되었을 때의 일이다. 백성들은 그가 훌륭한 열신무를 완성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의식 도중 그가 황성을 세 바퀴째 돌던 무렵에 한 아이가 성루에서 떨어졌고, 태자자는 허공으로 도약해 아이를 받아 땅에 착지했다. 이때 황금 가면이 떨어져 내려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젊고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반면 국사들은 행사가 중단되었다는 불길함에 태자에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라 했고[28], 태자는 사람을 구한 게 나쁜 일은 아니라며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 일화도 마찬가지로 그가 열일곱이던 해에 겪은 일이다. 한 귀신이 황하 남쪽에 있는 '일념교'라는 다리 위를 배회하다 행인을 가로 막고 세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틀린 대답을 내놓으면 잡아 먹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태자는 일념교를 찾아가 귀신과 싸웠고, 전투는 귀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귀신이 사라지자 태자는 다리 어귀에 꽃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때 지나가던 도인이 이곳에 심은 이유를 묻자 "몸은 무간에 있어도, 마음은 도원에 있길 바라서요."[29]라는 대답을 내놓았는데, 이 말을 들은 도인이 바로 신무대제였던 것이다. 그날 밤 선락 태자는 선경에 올랐다. 선경에 오르면 천계가 크게 흔들리는데, 그가 하늘에 오르니 천계가 세 번이나 뒤흔들렸다고 한다.
이 두 일화는 이후 신을 기쁘게 했다고 하여 그의 미담인 태자열신(太子悦神)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3.1.2. 두 번의 폄적
과거 선락 태자였던 시절, 가뭄에 시달리던 영안을 구하기 위해 천계의 법을 어기고 땅으로 내려온다. 그는 우사의 법보를 빌리는 등 애를 썼으나, 영안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락 병사들과 함께 싸운다. 전쟁 도중 백무상이 선락국에 인면역을 퍼뜨리고 이를 막으려 했지만 환부를 잘라내도 퍼지는 병세와, 거기에 덮친 자연재해 탓에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전쟁에서도 패하게 된다.[30]이후 주가[31]를 찬 채로 폄적당하고 부모님, 풍신, 모정과 함께 숨어 지낸다. 하지만 궁핍한 상황에서 모정과 마찰을 빚게 되고, 모정이 떠난 후 수련을 위해 산을 찾았지만 해당 산에서 수련하러 온 신관들에게 견제당하는 것으로 모자라 신으로 등선한 모정마저 자신을 외면하자 수련도 포기한다.[32] 이때 백무상을 만나 폭행당하고 앞으로도 네 곁에 머물 사람이 남아있겠냐는 말에 정신이 흔들린다. 이후 미친듯이 은신처로 도망쳤고 식량을 전해주러 온 모정을 마주치자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휴식을 취하는 중에도 백무상의 환영을 보는 등 정신이 불안정해진다.
결국 어머니와 싸우고 태자묘로 달려가 쉬고 있었으나 백무상이 태자묘로 몇백의 사람들을 유인해 들여보내고 인면역이 퍼진 환자들을 주위에 등장시켜 위협하자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면 인면역에 걸리지 않는다'는 백무상의 간계로 사람들에게 제압당해 산 채로 수 백번 칼에 찔리는 고난을 겪는다.[33][34]
피폐해진 몰골로 돌아온 사련은 이후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이를 때려눕히거나 '천것'이라고 욕하고, 망설임없이 도둑질을 하는 등 서서히 인격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결국 풍신과 싸워 그마저 곁을 떠나버리고, 다음 날 자신의 부모가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35]한 광경을 목도해 똑같이 목을 매려하지만 죽지 못하는 몸이라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고 누가 날 좀 죽여달라며 울부짖는다.
이때 영안국의 낙성을 축하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흑화해 희비면을 쓰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영안국 국주를 살해하러 떠난다. 하지만 도착한 황궁의 낭영은 이미 죽어가는 신세였기에[36] 영안에 똑같이 인면역을 퍼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인면역을 퍼뜨리기 전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가 있는지 한차례 더 시험한다. 칼을 뽑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37] 이 칼은 백무상이 뽑아줬지만 비가 오던 날 자신에게 삿갓을 건네준 사내에게 감화되어 백무상에게서 다시 돌아서고 사람들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미 인면역은 창궐하기 시작했고 사련은 위에 일어났던 상황과는 반대로 자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자신을 찌르라고 한다. 그렇게 백무상이 했던 방법 그대로 다시 사련은 칼에 찔리나 싶었지만 물장수의 말을 시작으로 행인들이 반대하며 거부한다. 이에 인면역을 막기 위해 직접 몸으로 원령을 받아내려 했으나 자신을 보필해주던 소년 무명이 이를 대신 받아내고 소멸한다.[38]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두 번째로 선경에 올랐으나[39] 사련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참회하고자 군오에게 직접 자신을 폄적시켜달라 요구한다. 더불어 잘못을 범했는데 다른 이가 대신 벌을 받았으니 주가를 두 개[40] 내려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마땅한 사유가 없으면 폄적시킬 수 없다는 군오의 말에 사련은 자신과 직접 겨루자고 제안해 이를 빌미로 다시 폄적된다.
3.1.3. 중원의 국사와 장군
세상을 떠돌던 사련은 우연히 영안국의 태자 낭천추를 구한 것을 계기로 영안의 국사로 추대된다.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며 방심 국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사련은 돌연 영안 황족 대다수를 무참히 살해한 죄로 심장에 복숭아나무로 깎은 대못이 박힌 채 관 속에 매장되고 만다.[41] 이후 사련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부장품으로 넣은 은제 가면을 붉게 물들였다. 은 정괴의 요기가 피를 보존한 덕분에 사련은 피가 죄 빠져나간 몸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그리고 사련은 방심 국사라는 이름으로 영안 황실의 류금연[42]을 피로 물들인 이 행적 때문에 요도 쌍사에 들게 되었다.
사실 류금연 사건 자체는 청귀척용과 안락왕이 꾸민 일이었으나, 훗날 영안과 선락의 갈등으로 이어질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세 사람의 목숨(영안의 국주, 안락왕, 방심 국사)과 몇 세대의 평안을 맞바꾼 사련의 계책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자의 부친과 선락 황실의 마지막 후손을 제 손으로 죽인 것에 괴로움을 느꼈는지 다시는 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그의 검 방심은 낭천추의 손에 보관된다.
한편 중원에서 화사(花谢)라는 이름을 쓰며 교위직을 맡았던 적도 있다. 걸핏하면 전장에서의 학살에 훼방을 놓는 탓에 좌천을 거듭하는 신세였으나, 이에 신세를 진 사람들이 그를 장군으로 호칭하였고 주로 화 장군이라 불렸다. 당시 가까이 교류하던 인물로는 반월국의 소녀 반월과 또 다른 소년이 있었으며, 교전 도중 언제나처럼 전투에 끼어든 사련은 그대로 분노한 양국 병사들에게 마구 짓밟히고 난도질당해 화사로서의 삶을 비참하게 끝마친다. 애써 죽은 척해 강에 떠내려가 그곳을 벗어났지만 4년 남짓을 요양해야 했다고 한다.
요도 쌍사인 방심 국사와 반월 국사 사이에 적어도 백 년은 시간차가 존재하며, 사련이 반월국에서 지낼 적이 이백 년 전이라고만 알 수 있을 뿐 어느 시기가 우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43]
3.2. 현재
사련은 세 번째로 비승하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신관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공덕을 쌓으려고 천계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영문은 사련에게 공덕을 빠르게 쌓을 방법이 있다며 신부를 납치하는 여군산의 요괴 퇴치를 맡긴다.그렇게 사련은 자발적으로 돕겠다고 내려 온 남풍과 부요 두 명의 소신관과 함께 여군산의 요괴를 잡으러 가게 된다. 결혼을 위해 가마를 타고 가는 신부가 계속해서 사라진다는 소문을 들은 사련은 귀신랑을 유인하기 위해 소형의 도움을 받아 새색시로 분장한 채 그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후 나타난 귀신랑은 그를 공격하기는 커녕 사건 장소로 안전하게 인도해 준 후 나비로 변해 사라진다.
여군산 임무가 끝난 뒤에는 신앙과 공덕을 모으기 위해서 어느 시골 보제마을의 보제관을 새 거처로 마련하기로 결심한 채 고물을 줍고 돌아오는 길 소달구지에서 정체불명의 소년 삼랑을 만난다. 그는 삼랑과 함께 반월관 사건을 겪으며 이 소년의 정체가 사대해 중 하나인 혈우탐화 화성이라는 것을 간파하지만, 이후로도 둘은 친분을 유지하며 관계를 발전시켜간다.[44]
동로산에 새로운 '절' 등급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다 군오의 부름을 받고 선계로 올라간 사련은, 그곳에서 매념경에 의해 백무상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 탓에 다른 신관들과 상천정에 감금당했으나 화성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뒤 동로산에서 화성과 함께 백무상을 쓰러뜨린다.
그러나 화성은 사련에게 내내 법력을 빌려 준 데다가 주가를 풀기 위해 더욱 방대한 법력을 내어줬기에[45]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이별하면서 사련은 마침내 자신의 과거와 엮인 화성의 비밀을 깨닫는다.[46] 사련은 돌아오겠다는 화성의 약속을 믿으며 이후 1년 동안 상천정을 재건하고 태창산에서 홀로 생활을 이어나가다 정월 대보름날 돌아온 화성과 재회하며 본편은 끝이 난다.
4. 여담
- 17세에 세상을 구하고자 신념을 품었으나 참담하게 실패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전작 《마도조사》의 효성진과 비슷하다. 차이라면 후에 사련은 어떤 계기로 그 절망을 이겨냈지만 효성진은 끝내 무너져 일어서지 못했다.[47]
- 묵향동후 작품의 주인수(受)들이 그렇듯, 사련 또한 매우 비범한 요리 솜씨를 지녔다. 그가 만든 '백년호합탕', '옥결빙청환', '전란도봉' 등의
무기요리들은 보통 인간들은 물론이고 신관이나 웬만한 귀신도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위력을 자랑한다. 매번 등장할 때마다 암살 무기 취급이고, 음식을 먹은 자는 보통 구역질과 혼절, 경우에 따라 환각이나 정신착란이 발생하거나, 몇 권에 걸쳐서 말에 쉼표를 제대로 찍지 못하거나, 재료로 넣은 뱀이 정괴로 변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현재까지로서는 사련의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인물은 화성이 유일하다.
- 사련이 자신의 요리에 화려한 이름을 짓는 버릇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걸로 보인다. 다만 사련이 태자 시절에 만든 음식은 맛이 좋았는데, 두 번째 폄적 때 자신이 가진 운수를 없앤 후로 맛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 군오와 신상에 타고 싸울 때 신관들이 "무신이긴 하셨군요"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잊혀진데다 작중에서는 주가 때문에 실력발휘를 잘 못하고, 백의화세에게 쫓기며 곁에 있는 화성의 존재감이 강렬하기도 해서 그닥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굉장히 강한 무위를 지녔다. 그 예로 나름 큰 세력을 자랑하는 모정을 손쉽게 이길 수 있다는 발언에 모정은 짜증은 낼지언정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낭천추와 겨룰 때에도 "나와 싸우면 너는 틀림없이 죽는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48]
-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을 무렵에도 성벽에서 뛰어내려도 문제없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고, 신선들도 쩔쩔맬 악귀를 가뿐히 베어내고 상천정에 올랐다. 법력이 아니라 아주 오래 수련한 무인처럼 섬세한 힘의 조절이나 무술실력 그 자체가 매우 뛰어난 모양인데,[49] 이는 원래의 재능과 더불어 800년이나 법력이 봉인된 채 세상을 떠돌아 다닌 것을 생각하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남을 제압하거나 방어하기만 할 뿐, 남을 다치게 할 목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없기에 그 강함이 다소 부각되지 못하는 것.
- 꽃을 좋아한다. 작품 중간중간 그가 꽃에 관심 가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련을 가리키는 민간 전설에서는 그가 세상을 멸할 힘을 지녔음에도 꽃을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작가에 따르면 초기 설정에서의 사련은 추방되었을 때 화신(花神)으로서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주관했다고 한다. 짝인 화성의 한자가 '花城', 즉 이름에 꽃이 들어가며, 혈우탐화라는 명칭에도 꽃 화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복선일지도.
[1] 신을 기쁘게 한 태자[2] 한 손에는 검을 들고 한 손에는 꽃을 든 신[3] 두 번의 폄적을 겪고 인간계에서 고물을 주워다 판 전적 때문에 붙여진 호칭[4] 화관무신(花冠武神)에서 첫 글자를 따 성을 붙인 가명[5] 화성이 은애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호칭[6] 180cm처럼 위장이 가능하다.[7] 음력 6월 12일[애니메이션] [9] 탈세 혐의로 조사받게 되어 성우가 교체되었다.#[애니메이션] [오디오드라마]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유년기]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유년기] [길성고조] [길성고조] [유년기] [22] 당시 사련이 한 '몸은 무간에 있으나 마음은 도원에 있기를'이란 말 때문에 공예가들은 신상에 꽃을 더하거나 사당을 꽃나무 밭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사련의 사당은 그가 무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신도가 많았다고 한다.[23] 성루에서 떨어진 아이를 받아내느라 제천유 의식을 망친 것에 대하여 "만에 하나 하늘이 정말로 죄를 묻는다면 사죄하겠느냐"는 국사의 말에 "그렇다면 하늘이 틀리고 자신이 옳은 것"이라는 당돌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24] 신도들이 바치는 향불과 공양[25] 국사이던 때에는 백은 가면을 쓰고 흑의를 입었다.[26] 진강문학성 연재 당시 작가의 말에 유골이라고 대놓고 쓰여있어 딱히 스포는 아니었으나 작가의 말을 제외하고 정발이 된 지금은 결말에서나 나오는 스포가 되었다.[27] 열신무자는 화려한 복색과 황금 가면을 갖추고 손에 보검을 든 채, 천년의 제일 무신 신무대제 군오를 연기한다. 열신무자로 선택된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기에 선발 기준 또한 엄격하다고 한다.[28] 화대가 황성을 한 바퀴씩 도는 것은 곧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바라는 한 해의 기원이 담겨있었는데 세 바퀴밖에 돌지 못하고 행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29] 신재무간 심재도원[30] 사련이 백무상의 문제로 스승 매념경을 찾아갔을 때, 사련의 스승은 태자전하인 사련이 선락국의 멸망을 막으려 했기에 인계율에 따라 백무상이 나타났다 조언하며, 군오역시 이를 알기에 사련을 말렸다고 한다.[31] 신관을 인간계로 쫓아낼 때 채우는 물건이다. 보통의 경우 폄적된 신관들은 나이를 느리게 먹지만 군오의 자비로 인해 사련은 주가를 통해 불로불사로 살게 되었다.[32] 명분이야 사련이 일전에 생활고에 못이겨 강도를 저지른 일을 댔으나 저들이 저지르는 행각을 보면 그냥 여럿이서 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일로 조롱하며 면박을 줘도 떠나질 않자 모정을 불러내 쫓아낸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힘없는 도깨비불 상태였던 화성은 전부 다 지켜보았다. 화성입장에서 모정은 주인을 내다버린 폐급일 수 밖에 없다.[50][33] 사람들은 초반에 그런 행위에 거부감을 표했으나 사람들 내에서 인면역이 퍼지기 시작하고, 백무상의 '사련은 신이니 찔려도 죽지 않는다'라는 말과 사련에게 강도질을 당할 뻔한 부자의 발언으로 선동되었다.[34] 이때 찔린 칼이 백무상이 준 검이자 현재 시점 사련이 패검으로 쓰는 방심(본래의 이름은 주심.)이다.[35] 모정도 풍신도 불화로 떠나간데다 모후는 곱게 자란 이라 가사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선락 국주는 노회해서도 자존심이 강해 큰 소리를 내느라 사련과도 점차 불화가 심해졌다. 그러한 상황에 국주가 쫓기는 상황인지라 자신의 병환을 숨겼다가 심화되어 토혈을 하는 것을 들키게 되고 병든 아비의 약을 구하겠다고 금지옥엽으로 길러내 신까지 올랐던 아들이 자신들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와중 백무상에게 당한 피해로 인해 점점 정신병자같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데다 어릴적부터 함께한 충직한 심복이던 풍신과도 크게 다투었는데 그 내용을 다 들어버리고야 말았다. 선락 국주 부부도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상황이었던 것.[36] 처음 사련과 만났을 당시에 이미 처자식이 죽었는데 이 죽은 이들의 원혼을 제 몸에 붙여 인면역을 앓아 양분을 빼앗기고 있었다.[37] 사람들을 구하고자 선의로 일을 해왔음에도 역병신, 재앙신 취급을 하면서 구해주려는 사람마저 막았다.[38] 사실 소년은 원혼이 약해졌을 뿐 소멸하진 않았다. 이후 이 소년은 동로산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절' 등급의 귀왕으로서 재탄생한다. 즉, 이 소년이 바로 화성이다.[39] 이는 사련이 자신이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다.[40] 하나는 법력을 봉하고, 또 하나는 운수를 거둔다. 사련이 본편 시점에서 등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를 찬 이유이자 법력과 운이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41] 외전에서 이 당시를 회상할 때 그 무덤 안에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었고 나중에는 고통과 후회 속에서 거의 미쳐갔던 듯하다.[42] 선락국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했던 일종의 연회[43] 다만 오디오 드라마 한정 영문의 입에서 방심국사에 대한 서술이 나올 때 백년 전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정판에서는 두 사건의 시기가 정해졌을 수도 있다.[44] 모정과 풍신을 비롯해 상천전 여러 신관들이 화성을 경계하고 사련에게도 경계하라고 하지만 화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눈치챈 덕에 계속 사이좋게 지낸다.[45] 무려 주가 2개가 박살났다. 등장인물들의 발언에 의하면 처음 있는 일인듯 하다. 그런데도 이후 묘사에 의하면 운이 없는 고물 신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46] 화성이 자신의 신도인 무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도깨비불이었다는 것.[47] 효성진의 경우 사람을 구하려다 도리어 죽게 만들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우마저 제 검으로 해했다는 사실에 절망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너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그 혼백마저 산산히 부서져 흩어져서 혼을 부를 수조차 없게 됐다. 사련은 죽고 싶어도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어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일어섰다.[48] 낭천추의 칼에 맞기도 했으나 당시 낭천추의 부친을 해친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른 것이자 애꿎은 선락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맞아준 것이기에 무위를 드러내지 않았다.[49] 다만 바느질같은 손재주는 영 잼병이라 모정이 대신 해주는 경우가 많다.
[50] 모정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나라는 망했으나 사련 밑에 있던 경험으로 모정을 원하는 이들은 많았고, 모정, 풍신, 사련 셋이서 다섯을 먹여 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쫓기는 신세였던 선락 국주 일가는 얼굴을 드러낼 수 없어 제대로 된 일감을 구할 수조차 없었던데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에게 시킬 수 있는 일도 한정되어 있는데다 모정은 모셔야할 어머니도 계셨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안정적인 일감을 얻어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그렇게 벌어온 쌀을 가지고 사련에게 돌아왔으나 하필이면 사련이 가장 숨기고 싶어했던 치부를 알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사련을 쫓아냈고, 이 사실을 사련이 직접 풍신이나 가족들에게 자백하기도 전에 모정이 이미 다 얘기한 줄 알고 폭로해버린 탓에아웃팅 사이가 급격히 뒤틀려버리고야 말았다. 이때 모정은 풍신도 떳떳하지 않다며 비난했는데 당시 풍신은 한 여인을 만나 정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 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태아령이다. 사련이 준 금 허리띠는 여인에게 증표로 주었으나 팔지 말라고 당부한 탓에 이도저도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