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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08:54:32

빌헬름 회그너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 제2대 주총리
빌헬름 요한 하랄트 회그너
Wilhelm Johann Harald Hoegner
<colbgcolor=#0099d5> 출생 1887년 9월 23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 1980년 3월 5일 (향년 95세)
서독 바이에른주 뮌헨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학력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 (법학 / 법학박사)
재임기간 제2대 바이에른 주총리
1기 1945년 9월 28일 ~ 1946년 12월 16일
2기 1954년 12월 14일 ~ 1957년 10월 8일
정당

배우자 안나 보크 (결혼: 1918년)
자녀 2명
종교 무종교[1]
경력 바이에른 주의원
국가의원
제2대 바이에른 주총리
바이에른 주법무장관
바이에른 주내무장관
1. 개요2. 생애
2.1. 정계입문 및 나치당과의 싸움2.2. 나치 몰락과 두 번의 주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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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제2대 바이에른 주총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한 독일 사회민주당 출신 주총리다.

2. 생애

독일 제국 시기 바이에른 왕국의 뮌헨에서 태어났지만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 최종적으로는 알퇴팅의 페라흐에 정착했다. 이후 회그너 본인은 뮌헨으로 떠나 뮌헨 루트비히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에 입학해 1911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건강 문제로 징집을 피했고, 전후인 1918년 배우자 안나 보크와 만나 결혼했다.

2.1. 정계입문 및 나치당과의 싸움

1919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는데, 1924년부터 1930년까지 바이에른 주의원, 1930년부터 1933년까지 국가의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한편 정치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이에른의 뮌헨이다보니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1924년 7월 바이에른 주의회에서 조직한 뮌헨 맥주홀 폭동 조사위원회를 주도한 것.

조사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우익 극단주의 세력(Völkischer Block)의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진 못했지만, 요제프 페스탈로차와 손잡고 쿠데타 세력과 바이에른 주정부 주요기관의 유착을 폭로하기 위해 활약했다. 하지만 페스탈로차의 소속당인 바이에른 인민당이 극우 성향의 독일 국가인민당과의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막아섰고, 특위 위원장이었던 게오르그 슈탕(바이에른 인민당 소속)이 당시 히틀러에 대한 기소를 무마하려 했던 프란츠 귀르트너 주법무장관에 대한 조사를 종결해버리면서 결국 무산되었다.

1928년 4월 27일, 조사보고서 채택 과정에서 바이에른 사법부가 히틀러에 대한 법적 조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여기 바이에른 주정부 주요기관이 연루되어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보고서에 포함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채택되지 못해 보고서에 포함되진 않았다. 결국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익명으로 『히틀러와 카르[2]: 1923년 바이에른의 나폴레옹적 거물들(Hitler und Kahr. Die bayerischen Napoleonsgrößen von 1923)』 라는 책을 발간해 자신이 조사했던 사실들을 폭로하는데, 이 책이 나치 독일의 몰락 이후 뮌헨 맥주홀 폭동과 연관된 바이에른 주정부 및 수사기관들의 추태를 알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고 1933년 수권법을 제정하며 모든 권력을 독점하자 사민당 소속이었던 회그너는 즉시 의원직에서 해임됐고 결국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야 했다. 그런 오스트리아마저 1938년 안슐루스가 일어나면서 나치 독일의 일부가 되자 오스트리아를 떠나 인접해있던 스위스까지 망명해야했다.

이후 과거 책을 발간해 히틀러를 저격했던 솜씨를 발휘해 가명을 통해 히틀러 정권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여러 책을 발간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1943년을 기점으로 히틀러와 나치당의 몰락이 시작되자 이를 기다리며 모국 독일의 재건을 위한 연방제 헌법 초안을 미리 작성해두기도 했다.

2.2. 나치 몰락과 두 번의 주총리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이 독일의 패배로 마무리된 후인 1945년 6월, 독일로 귀국한 회그너는 바이에른 주의 사법 행정 재건을 주도했으며, 당시 바이에른주에 대한 군정을 맡은 미국은 나치 청산에 소극적이던 프리츠 셰퍼를 경질하고 회그너를 1945년 9월 바이에른의 제2대 주총리로 임명했다.

1946년 바이에른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했으며, 여기에 직접민주주의 요소, 공공 재산 보호, 교육 제도 개혁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헌법 제141조에 모든 국민에게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보장한 것이 특색있는 요소로 꼽힌다.

새 주헌법이 통과된 뒤 치러진 첫 주의회 선거에서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52.3%를 득표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사민당은 28.6%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 회그너가 이렇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자신 밑에서 주법무장관을 맡았던 한스 에하르트가 정국 안정을 위한 대연정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주총리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주부총리 겸 주법무장관으로 전임했다.

하지만 1947년 사민당이 대연정을 탈퇴하면서 주부총리 겸 주법무장관에서도 물러났다. 이때 개인적으로 회그너는 연정 탈퇴를 공개 반대했는데, 쿠르트 슈마허가 이끄는 사민당 중앙당이 보수진영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오히려 바이에른 주사민당 내에서 입지만 일시적으로 잃게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주정부에서 사임한 뒤에는 주의원을 겸임한채 법조인 경력을 살려 뮌헨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었고, 1949년부터는 바이에른 최고법원 산하 검찰청의 수석검사가 되었다. 이 시절 슈마허가 이끄는 중앙당과 보수진영과의 연정 문제, 독일 기본법 채택 문제로 갈등했으나 전후 최초의 전국 단위 총선인 1949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예상밖 패배를 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 당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1918년 신앙을 포기하고 무교로 돌아섰다.[2] 뮌헨 폭동 당시 바이에른 주 총국가판무관이었던 구스타프 폰 카르를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