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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지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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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5-1966: 결성 이전과 결성2. 1967-1969: 성공과 투어 기간들3. 1970-1974: 재결성4. 1975-1979: 디스코로의 전환5. 1980-1986: 밴드의 혼란과 침체 그리고 솔로 활동들6. 1987-1999: 복귀와 성공, 앤디 깁의 사망7. 2000-2008: This Is Where I Came In, 모리스 깁의 사망과 해체8. 2009-2012: 재결합과 로빈 깁의 사망9. 2013-현재

1. 1955-1966: 결성 이전과 결성

1955년 영국, 맨 섬에서 태어난 배리, 로빈, 모리스 깁은 아버지 휴 깁의 고향 맨체스터 촐튼으로 옮겨가 스키플과 락앤롤을 하는 그룹 더 래틀스네이크스(The Rattlesnakes)[1]를 결성했다. 배리 깁은 기타와 보컬, 로빈과 모리스 깁은 보컬, 친구 폴 프로스트(Paul Frost)는 드럼, 케니 호록스(Kenny Horrocks)는 워시텁 베이스(Washtub Bass)[2]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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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틀스네이크 시절 사진.

1957년 12월, 이들은 우연히 그룹 역사 내 최초로 나중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코러스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지역 극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녹음한 LP음반을 재생하고 립싱크하는 형식으로 공연을 진행했지만, 이 날은 급하게 극장에 가느라 음반이 부서져 버렸고 어쩔 수 없이 코러스를 사용해 라이브로 진행하게 되었다. 공연 후 관중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음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1958년 5월, 멤버였던 프로스트와 호록스가 밴드를 떠나서 해체되었고 삼형제만 남게 되었다. 남은 멤버들은 Wee Johnny Hayes and the Blue Cats로 밴드명을 고치고 활동하려 했지만, 그해 8월 호주 퀸즐랜드 브리즈번 북부 지역인 레드클리프로 가족들과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민의 이유는 로빈 때문이었다. 삼형제 모두 장난을 잘쳤지만 로빈은 특히 심했고, 8살때부터 방화광이 되어 이불이나 광고판들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들이 찾아와 진지하게 이민을 가라고 권유했고 이렇게 맨체스터를 떠나게 되었다.

호주로 간 삼형제는 돈을 벌기 위해 작은 공연들을 시작했고, 브리즈번 라디오 DJ 빌 게이츠[3]의 소개를 통해 오토바이 경주 프로모터이자 경주자였던 빌 굿(Bill Goode)과 만나게 된다. 빌 굿은 1960년까지 계약을 맺고 자기의 경주장에서 중간 휴식 시간마다 삼형제를 무대에 세워 공연하게 해주었고, 밴드 이름을 자기 이름 앞글자를 따서 나중에 Bee Gees로 바뀌게 되는 BGs로 지어 붙여 주었다. 우연의 일치로 BG가 Bill Goode도 되지만 Barry Gibb도 되기에 삼형제도 흔쾌히 응했다. 얼마 뒤, 브리즈번 공항 확장 공사로 깁 가족은 근처 크립 섬(Cribb Island)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삼형제는 노스게이트 주립 학교에 다니게 된다.

1960년, 비 지스는 텔레비전 쇼에 서게 되었고 배리 깁이 작곡한 Time Is Passing By라는 노래를 첫 곡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비 지스는 퀸스 아일랜드 해변 리조트를 거점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입하게 된다. 당시 호주의 스타였던 콜 조이(Col Joye)에게 영향을 받아 작곡을 했고, 나중에 그는 1963년 비 지스가 페스티발 레코드의 자회사 리돈 레코드와의 레코딩 계약을 할때 도움을 주었다. 비 지스는 매년 2~3곡 씩 싱글을 내는 계약을 맺게 되었고, 배리는 다른 가수들에게도 곡을 써주기 시작했다.

1962년, 처비 체커(Chubby Checker)의 시드니 스타디움 공연 때 앞무대를 장식하였다.

1963년, 깁 가족은 시드니 마로브라(Maroubra)의 Bunnerong 171로 이사를 가게 된다. 나중에 로빈 깁은 이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인생의 마지막 곡으로 Sydney[4]라는 노래를 만든다. 2016년, 그들이 살던 집은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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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초 모습

1965년, Wine And Women이라는 노래가 소소한 히트를 기록했고, 그룹의 1집 LP The Bee Gees Sing And Play 14 Barry Gibb Songs를 발매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너무 작은 히트로 돈이 안된다고 판단되어 자회사 리돈 레코드의 본사였던 페스티발 레코드가 계약을 해지시켰다. 그러나 운좋게도 미국 출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냇 키프너(Nat Kipner)와 만나게 되고, 밴드의 잠재력을 알아본 그가 리돈 레코드 때의 음원들 권리까지 전부 찾아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스핀 레코드에 넣어주었다. 그를 통해 비 지스 초기 곡들 대부분을 프로듀싱 해준 프로듀서 오시 번(Ossie Byrne)과 만나게 되고 세인트 클레어라는 스튜디오 하나를 1966년 중반까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주었다. 비 지스는 이 당시 수많은 음악적 기술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밴드는 이러한 호의에 응하여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였고, 다른 밴드들과 협연도 하였으며, 당시 전세계 스타가 된 비틀즈 노래도 많이 커버하여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첫번째 메이저 히트곡이자 동명의 2집 앨범인 Spicks And Specks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다른 곡들이 많이 망해서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1966년, 비 지스는 프로듀서 오시 번과 나중에 밴드에 가입해 드러머가 되는 콜린 피터슨과 영국으로 여정을 떠났다. 그리고 여정 중이었던 1967년 1월, 그들은 호주의 66년 최고의 싱글로 Spicks And Specks가 수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1967-1969: 성공과 투어 기간들

2.1. Bee Gees' 1st, Horizontal, Idea

비 지스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 휴 깁은 아들들의 데모곡을 비틀즈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보냈다. 엡스타인은 데모곡들을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에게 보냈고 영국에 도착한 그룹은 1967년 2월, 스틱우드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된다. 성공적인 오디션 후 UK 앨범 발매 담당 폴리도어 레코드, US 앨범 발매 담당 아트코 레코드와 5년 계약을 맺게 되었고, 바로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로버트 스틱우드는 프로듀서 겸 매니저가 되어 이들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기 시작했고, 이름이 비슷한 비틀즈와 비교하며 "1967년의 가장 주목해야할 새로운 재능"이라고 광고했다. 앨범 녹음 전 콜린 피터슨과 빈스 멀로니를 멤버로 가입시켜 5인조가 되었고 곧이어 그룹의 두번째 메이저 싱글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을 발매했다. 비틀즈와 비슷한 이름 때문에 비틀즈의 새로운 싱글인줄 알고 각 라디오 방송국에서 많이 방송하였고, 덕분에 영국과 미국 차트에서 20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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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조 시절 모습[5]

연이어 현재까지 고전 명곡으로 남아있는 싱글들인 To Love Somebody[6], Holiday를 발매한 그룹은 3집 앨범이자 영국에서의 데뷔 앨범인 Bee Gees' 1st를 발매하였고 대성공을 누리게 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룹은 런던 노섬벌랜드 거리 플레이하우스 극장에서 그들의 첫번째 BBC Session을 녹음했다. 이때의 세션은 BBC Sessions: 1967–1973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 발매되었다.

Bee Gees' 1st가 발매된 후, 밴드는 뉴욕에 "영국의 놀라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처음 소개되었다. 같은 시기 영국 텔레비전 쇼인 Top Of The Pops에 첫 출연하게 된다.
지미 새빌[7]이 그곳에 있었고 그건 정말 놀라웠어요. 우리는 그를 비틀즈 팬 클럽 책에 있는 사진으로만 봤었거든요.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가 그곳에 진짜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공연에는 우리와 룰루[8], 더 무브(The Move) 그리고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를 부르는 롤링 스톤즈가 있었죠. 여러분이 알아야 될 건, 그때는 우리 모두 슈퍼스타가 되기 전이었고 그래서 모두 함께 그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겁니다.
― 2009년 비 지스 자서전 발췌, 모리스 깁의 회상

1967년 후반기, 그룹은 두 번째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리버풀 성공회교에서 포크 그룹 더 세틀러스(The Settlers)와 함께 Thank You For Christmas[9]와 다른 캐롤들을 라이브 방송에서 불렀다. 10일 뒤, 밴드는 자신들의 크리스마스 이브 반짝쇼인 How On Earth?도 방영하였다.

1967년 11월 5일, 로빈 깁이 아내 몰리 훌리스와 함께 열차를 타고 가다 히더 그린 역에서 발생한 탈선 사고로 죽을 뻔했다. 49명이 사망하고 78명의 부상자가 나온 큰 사고였고 둘은 무사했지만 로빈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작곡 능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68년 1월, 4집 Horizontal을 완성한 밴드는 미국에 홍보 투어를 가게 되었다. LAPD는 비틀즈 때와 같은 인파를 예상하고 수많은 경찰들을 투입하였다.

2월, 앨범이 발매되었고 역시 성공하였다. 고전 명곡 MassachusettsWorld라는 히트곡이 나왔고, 발라드 And The Sun Will ShineReally And Sincerely도 소소한 히트를 했다.

앨범 홍보와 더불어 미국에서 첫번째로 텔레비젼 쇼에 나가게 되었다. 영국에서 만나서 밴드의 팬이 된 토미 스머더스(Tommy Smothers)가 자신의 쇼인 더 스머더스 브라더스(The Smothers Brothers)에 초청한 것이다.

앨범 히트 후, 밴드는 코펜하겐부터 시작해 북유럽 투어에 나서게 되었고, 이 때문에 영화 Wonderwall의 사운드트랙 작업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1968년 2월 27일, 밴드는 17-piece Massachusetts String Orchestra와 함께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독일 투어를 시작했다.

3월에는 프로콜 하럼[10]이 찾아와, 공연을 도와주었다. 로빈의 아내 몰리 헐리스(Molly Hullis)가 회상하기에 독일 팬들은 영국의 비틀마니아보다 더 열광적이었다고 한다. 투어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끝나게 된다. 그후 스위스에서 남은 투어를 더 진행했다.
취리히 공항에는 5,000여명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베른으로 가는 여정 중에도 아이들은 유니온 잭을 흔들어댔죠. 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때도 경찰들은 경호하느라 우리를 만나러 올 수도 없었고, 아이들은 밖에서 차를 부숴댔죠. 우리는 호텔 안에 있었는데 모든 창문이 부서졌고, 우리는 바닥에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2009년 비 지스 자서전 발췌, 모리스 깁의 회상

3월 17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 Words를 연주했고, 10일 뒤 런던 로얄 알버트 홀에서 공연했다. 새 싱글 Words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5집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그 다음 싱글인 Jumbo가 실패하였다.[11] 그래도 다음 싱글인 I've Gotta Get A Message To YouI Started A Joke가 메가히트를 기록해 만회했다. 싱글들에 힘입어 5집 Idea까지 성공하게 되었지만, 홍보용 투어와 TV쇼 전에 멤버 빈스 멀로니가 블루스 음악을 하고 싶어하여 탈퇴하였다.[12] 남은 밴드는 예정되어있던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였고, BBC 프로그램의 프랭키 호워드 쇼에 나가게 된다. 여기서 짜준 코미디 각본들로 삼형제의 코미디 기믹[13]을 처음 선보이게 됐고 그룹 해체전까지 고정으로 자리잡았다.

밴드는 8월 2일 부터 7주간의 미국 투어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7월 27일 로빈 깁이 신경쇠약으로 쓰러져서 의식을 잃는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투어는 연기되었고, 밴드는 로빈이 낫는 동안 6집 작업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6집의 악기 트랙과 데모는 완성되었지만 로빈이 낫지 않아 무기한 연기되었다.

2.2. Odessa, Cucumber Castle, 해체

1969년 초, 밴드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밴드의 목소리였던 로빈은 자기가 병석에 있는 동안 스틱우드가 배리를 밴드의 새로운 프론트맨으로 세우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공연은 계속되었다.

로빈이 다시 밴드로 복귀한 비지스는 Top Of The Pops와 톰 존스의 The Tom Jones Show에 나가서 I Started A Joke와 First Of May를 불렀고, 이게 당시 재결성 이전 로빈 깁이 밴드와 함께하는 마지막 라이브가 되었다.

로빈이 낫는 동안 비지스의 멤버들은 6집의 컨셉을 마스터피스[14]로 잡고 본격적으로 6집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로빈이 그룹에 복귀하였고 이에 따라 앨범 작업 기간은 길어져서 곡 수가 두 배로 많아졌고 결국, 더블 앨범으로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Give Your Best, Marley Purt Drive, Melody Fair, First Of May 등을 담고 발매된 6집 Odessa는 비평가들로부터 비 지스 최고의 앨범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명반 대열에 들었다. 그러나 로빈 깁은 Lamplight라는 자신의 곡이 A사이드 발매가 되지 않고 First Of May의 B사이드 싱글로 발매되자 불만이 폭발해 밴드를 탈퇴해버리고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시기에 Best Of Bee Gees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식 앨범에 실린적 없는 Spicks And Specks와 Words, Tomorrow Tomorrow까지 담았던 이 앨범의 성적은 기대한 것 만큼 좋지 않았다.

로빈 깁이 솔로 활동을 이어나갈 동안 남은 세명은 7집 앨범 Cucumber Castle 작업에 착수했다. 런던 히포드롬에서 로빈 없이 첫 무대를 가지게 되었고, 깁 가문 첫째 딸인 레슬리 깁(Lesley Gibb)으로 인원을 충당해서 공연을 했다. 앨범과 더불어 동명의 TV영화도 1971년 방영 예정으로 촬영하게 되었으나 촬영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룹은 드러머 콜린 피터슨을 해고해버렸다. 콜린은 1969년 초부터 매니저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비지스의 자산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매니저였던 로버트 스틱우드의 많은 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콜린은 더이상 스틱우드가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곧바로 위기감을 느낀 스틱우드에게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해고 통보를 받은 콜린은 멤버들을 믿고 자기 없이 비지스의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을거라고 스탁우드에게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이를 콜린이 밴드를 장악하기 위한 술수라고 오해한 배리는 "비지스는 우리 삼형제의 것이지 너의 것이 아니다."라며 바로 콜린을 잘랐다. 그가 연주한 앨범의 드럼 트랙도 전부 지우고 테리 콕스라는 드러머를 데려다 전부 다시 녹음했다.

그동안 로빈은 NME 잡지와의 인터뷰들로 자신의 솔로 활동을 알렸다. 헨리 8세 영화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있으며, 할아버지가 수제폭탄을 만들어 트라팔가 광장에서 테러를 하려다 잡힌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 패밀리 트리(Family Tree)를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97명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60명의 코러스를 대동해서 아폴로 11호 발사에 영감 받은 곡 To Heaven And Back[15]을 작곡했다고 했다.

8월, 싱글 Don't Forget To Remember가 발매되었고 영국에서는 2위까지 올라가 히트했지만 미국에서는 73위에 그치게 되었다. 70년에 연이어 발매된 If I Only Had My Mind On Something ElseI.O.I.O는 망했다고 볼 정도로 끝나버렸다.

1969년 12월 1일, 비 지스는 사실상 해체 수순에 접어들게 되었고 배리와 모리스는 서로 각자 길을 가기로 한다.

1970년, 7집이 발매되었고 앨범은 그동안의 성공에 비해 거짓말 같이 망해버렸다. 앨범이 망할동안 배리는 The Kid's No Good, 모리스[16]The Loner로 솔로 앨범 작업을 진행했다. 각자 리드 싱글 I'll Kiss Your MemoryRailroad를 발매했지만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망해버렸다. 반면에 로빈은 Robin's Reign을 발매했고, Saved By The Bell이 대히트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3. 1970-1974: 재결성

1970년 여름, 로빈이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 번 그룹을 하자는 제의였다.

그 결과 1970년 8월 21일, 삼형제만으로 비 지스가 다시 재결성되었다. 배리는 이제 두 번 다시 해체하는 일은 없을거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재결성 기념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17] 그런데 사실 6월에 벌써 로빈과 모리스는 만나서 12곡을 같이 녹음했었다. 여기다 배리의 노래 2곡을 추가하여 순식간에 앨범을 완성했다. 이와 동시에 배리와 로빈은 On The Other Hand라는 책도 출판했다. 그리고 드럼 보강을 위해 모리스의 미발매 솔로 앨범 The Loner에서 드럼을 쳤던 제프 브릿지포드(Geoff Bridgford)를 영입했다. 그렇게 발매된 8집 2 Years On은 미국차트 3위까지 올라간 Lonely Days의 히트를 업고 흥행에 성공했다. 재결성 기념으로 조니 카슨 쇼, 에드 설리번 쇼, 앤디 윌리엄스 쇼 등에 나가서 많은 인기몰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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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성 후

1971년 후반, 연이어 작업한 통산 9집 앨범 Trafalgar가 발매되었고,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가 미국차트 첫 1위를 달성했다. 이 곡은 그해 그래미의 Best Pop Vocal Performance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발매된 Melody 영화의 사운드트랙인 Melody Soundtrack 앨범에 비 지스의 노래가 다수 실렸는데 이것마저 히트하여 그룹은 다시 성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즈음 그룹은 기타리스트 알란 켄달(Alan Kendall)을 영입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모든 악기를 모리스 깁이 다 맡았지만 드러머와 기타리스트가 그룹에 들어온 후 모리스는 자신의 주 악기인 베이스 연주에 집중하게 되었다.

1972년, 싱글 My WorldRun To Me가 어느정도 흥행하고 10집 To Whom It May Concern이 발매되었다. Run To Me로 인해 영국 톱10 차트에 3년 연속 드는 영광을 얻었다. 이 즈음 드러머 제프 브릿지포드가 그룹에서 탈퇴했다.

같은 해 11월 24일, 비지스는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에서 열린 우드스탁의 헤드라이너로 스티비 원더, 이글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과 함께 출연하게 되었다.

1973년, 로버트 스틱우드를 따라 그가 세운 RSO 레코드로 이적한 그룹은 다시 저조한 성적에 부딪히게 되었다. Saw A New Morning이 잘 안팔리게 되면서 결국 11집 Life In A Tin Can이 망해버렸다. 덕분에 같이 작업하던 A Kick In The Head Is Worth Eight In The Pants는 아예 미발매되어 버렸다. 만회하기 위해 Best Of Bee Gees, Volume 2도 냈지만 1때 만도 못한 성적을 냈다. 4월 6일, 미드나잇 스페셜에 출연하여 제리 리 루이스와 함께 Money (That's What I Want)를 불렀다. 척 베리도 초대하여 같이 Johnny B. Goode과 Reelin' And Rockin'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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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미드나잇 스페셜 공연 모습

1974년 초에 시작한 미국과 캐나다 투어는 갈수록 망해갔고, 마지막 공연은 영국의 한 작은 클럽에서 끝내게 되었다. 그룹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음악 사업가 아흐메트 에르테군(Ahmet Ertegün)을 만나 그의 조언대로 그가 세운 애틀랜틱 레코드로 이적하게 되었고, 스틱우드는 소울 음악 프로듀서 아리프 말딘(Arif Maldin)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 그렇게 탄생한 12집 Mr. Natural발라드가 적고 R&B가 많이 느껴지는 앨범이 되었다. Charade라는 명곡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망했지만 적어도 그룹에 활기를 갖게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기타리스트 알란 켄달이 자신의 장르에 맞게 연주를 하게되어 두각을 나타내었고, 새로운 드러머 데니스 브리옹(Dennis Bryon)도 영입했다. 다음 앨범 때는 추가로 키보디스트 블루 웨버(Blue Weaver)까지 영입하여 R&B하기 좋은 밴드를 제대로 다시 갖추게 되었다.

4. 1975-1979: 디스코로의 전환

4.1. Main Course, Children Of The World

1975년 초, 비 지스는 친구 에릭 클랩튼의 조언대로 미국 마이애미플로리다로 옮겨왔다. 발라드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이후, 그들은 결국 말딘과 스틱우드의 음악적 방향 전환 요구에 수긍했고 댄스에 기초한 디스코 곡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번째 미국차트 1위곡 Jive Talkin'과 7위를 기록한 Nights On Broadway가 탄생하게 되었고, 밴드는 새로운 사운드에 결과적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중들도 화답하여 13집 Main Course는 순식간에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앨범에는 나중에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배리 깁의 팔세토 창법이 처음 등장했다. 이전까지 비 지스 보컬의 핵심은 비브라토의 로빈 깁이었지만, 디스코 시대만큼은 배리 깁의 하이톤 가성이 보컬 메인이 된다. 그리고 Idea 앨범 이후 미국 톱10 싱글차트에 두 곡이나 올린 R&B 앨범이 되었다.

그 해 중반, 미드나잇 스페셜에 새앨범 홍보차 재차 출연하여 To Love Somebody를 헬렌 레디(Helen Reddy)와 함께 불렀다. 같은 시기에 망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인 All This And World War II에 참여하여 비틀즈 Abbey Road 앨범의 3곡을 불렀다. Golden Slumbers/Carry That Weight, She Came In Throught The Bathroom Window는 배리 깁이 불렀고, Sun King은 모리스 깁이 불렀다.

1976년 9월, 14집 Children Of The World를 발매했다. 더 풍부해진 배리의 팔세토와 블루 웨버의 새로운 디스코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결합된 곡들이 포진되어 있고, 말딘 대신 이전 앨범에 보조로 참여한 알비 갈루텐(Albhy Galuten)과 칼 리차드슨(Karl Richardson)을 새로운 프로듀서로 기용했다. 이 두 프로듀서는 남은 70년대의 비 지스 커리어를 계속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며 함께했다. 그리고 이 앨범부터 로빈과 모리스의 단독 보컬을 비 지스 앨범에서 한동안 들을 기회가 사라진다.
파일:disco bee gees.jpg
성공 가도를 달리는 모습

1976년 9월 4일, 앨범의 첫 싱글인 You Should Be Dancing은 다시 한 번 미국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대성공을 가져주었고 밴드를 디스코의 왕좌에 올려놓았다. 발라드 Love So Right은 3위, 또다른 댄스곡인 Boogie Child는 12위에 올라섰고, 앨범은 8위를 기록했다.

11월에는 1967년 부터 1972년 사이의 히트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인 Bee Gees Gold도 발매했다.

4.2. Saturday Night Fever, Spirits Having Flown

성공적인 라이브 앨범인 Here At Last... Bee Gees... Live를 발매하고 스틱우드의 제안대로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성공을 가져다 줄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사실 비 지스는 영화 후반 제작때까지 참여하지 않았었다. 존 트라볼타에 따르면 촬영 당시에 비 지스 노래 대신 스티비 원더와 보즈 스캑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고 한다. 후반 제작 때 쯤에야 스틱우드는 비 지스에게 영화를 위한 노래들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밴드는 프랑스의 샤토 드 에후빌 스튜디오에 주말 동안 틀어박혀 노래를 만들었다. 마침내 데모곡들이 완성되고, 스틱우드와 RSO 스튜디오 사장이 된 음악 감독 빌 오크스(Bill Oakes)[18]가 와서 들어보게 되었다. 배리 깁의 회상에 따르면 그들은 엄청나게 감격했고 바로 대박 조짐이 보임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빌 오크스는 원래 토요일 밤의 열기에 전곡을 디스코로 쓸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 지스의 노래들을 듣고 생각을 바꿨고 결국 사장되어가던 디스코는 이 영화가 대박을 치면서 전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만든 곡들을 듣자마자 열광했고, 이것들은 최고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어떠한 컨셉도 없었죠. 그들이 가져온 영화 대본 초판을 제외하고는요. 당신은 당시 우리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1975년 그 당시, 상당히 실패해서 재기의 가망조차 없었습니다. 비 지스 사운드는 대중들에게 지겨워진 상태였어요.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죠. 우리는 거의 3년간 히트곡이 없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오 세상에, 이게 다야. 이게 우리의 끝이야, 60년대 대부분 그룹들처럼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어요. 우리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몰랐죠.
― 2007년 가을, Movies Rock 잡지 인터뷰 중 배리 깁의 발언 일부분.

이 사운드트랙 앨범에서는 비 지스에게 3곡의 미국차트 1위곡을 안겨 주었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Night Fever가 그 곡들이며 한 세대를 디스코 세대로 바꿔놓았다.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다른 가수인 이본느 엘리먼(Yvonne Elliman)에게도 If I Can't Have You[19]라는 노래를 주었고 이것 역시 1위를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More Than A Woman은 비 지스 버전과 타바레스(Tavares) 버전, 두 버전이 실려있고, 마찬가지로 히트했다.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성공에 기름을 부었고, 1978년 빌보드 연말 앨범차트 1위를 달성한다. 또한 4천만장이 팔려나가며 당시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휘트니 휴스턴보디가드 앨범에 이어서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트랙 앨범 2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앨범 시장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든 2020년대 사정상, 뒤집힐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비 지스가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의 뒤를 이어 전세계 음악 왕좌에 앉는 절정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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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비 지스의 사운드는 1977년 크리스마스 시즌 시작부터 9개월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삼형제가 쓴 7개의 곡이 27~37주 정도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주름잡았다.
3곡은 비 지스의 이름으로 나왔고, 2곡은 동생 앤디 깁의 이름으로,[20] 1곡 씩 이본느 엘리만의 If I Can't Have You, 프랭키 발리Grease이다.

1978년 3월, 1964년 4월의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작곡한 곡으로만 빌보드 톱10 차트에 5곡을 채워넣었다. Night Fever, Stayin' Alive, If I Can't Have You, Emotion[21], Love Is Thicker Than Water[22]가 그 곡들이다. 배리 깁은 연속으로 4곡을 빌보드 1위에 올린 작곡가가 되었고, 존 레논폴 매카트니 콤비의 기록을 깨버렸다.

비 지스는 사운드트랙으로 2년 연속 그래미 상을 수상했다.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프로듀서상, Best Pop Performance by a Duo or Group with Vocals상[23], Best Vocal Arrangement for Two or More Voices상[24] 총 5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때쯤에 비 지스의 막내 동생인 앤디 깁도 음악계에 등장하여 형들의 도움으로 같이 상당한 성공을 누리게 되었다. 배리 깁이 많은 곡을 써주어 3곡이나 빌보드 1위를 달성하게 해주었다. 심지어 이 노래들 중 하나인 Shadow Dancing은 빌보드 7주 1위, 연말차트 1위[25]

그러나 너무 큰 성공에 도취했는지 1978년 잠깐 뻘짓을 하게된다. 피터 프램튼과 함께 주연으로 로버트 스틱우드가 제작한 참여한 동명의 비틀즈 앨범을 영화화 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등장했고, 비평가들의 혹평과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폭망하게 된다. 그러나 사운드트랙은 괜찮은 편이어서 로빈 깁 이름으로 발매된 Oh Darling!은 미국차트 15위까지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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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 피터 프램튼과 주연을 맡은 모습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앨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고, 15집 Spirits Having Flown이 탄생하게 된다. 사운드트랙 앨범의 명성에 힘입어 차트에서 고공행진을 했고, 역시 3곡의 미국차트 1위곡이 나오게 된다. Too Much Heaven, Tragedy, Love You Inside Out이 그 곡들이다. 이 곡들은 6곡 연속 빌보드 1위 기록을 세우는데 일조하고, 이 기록은 비틀즈와 타이 기록이며 오직 휘트니 휴스턴만이 기록을 넘어섰다.

1979년 1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니세프 자선공연에서 Too Much Heaven을 공연하고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비 지스는 이 노래의 로열티를 전부 기부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07년 기준으로 1억 천만 달러 이상을 유니세프에 벌어다 줬다.

같은 해 여름, 비 지스는 미국과 캐나다를 도는 Spirits Having Flown 투어를 38개 도시에서 열고 전부 매진되었다. 또한 Too Much Heaven의 뮤직비디오도 제작하게 되는데 이때 만난 감독 마틴 피츠(Martin Pitts)와 프로듀서 찰스 앨런(Charles Allen)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게 된다.
Too Much Heaven의 B사이드로 실린 Rest Your Love On Me컨트리 뮤직 발라드 넘버로 컨트리 차트 톱40안에 들며 장르의 다양성도 추구했다.

비 지스의 놀랍고도 거대한 성공과 영향은 1979년 말 디스코 거품이 꺼지면서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디스코에 반감을 갖게되는 이러한 현상은 비 지스의 미국 커리어들이 추락하는데 큰 일조를 했고, 미국 라디오들에서는 비 지스 노래가 없는 Bee Gee-Free Weekends라는 홍보까지 하며 노래를 틀지 않았고 1979년 이후부터 1989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단 하나의 톱10 싱글밖에 기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배리 깁은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은 매주 1위를 기록했었죠. 그건 단순한 히트 앨범이 아니었어요. 25주간 매주 1위였다고요. 정말 놀랍고, 말도 안 되고, 기이한 시기였어요. 제 기억으로 우리는 그 수많은 전화들을 일일이 받을 수도 없었고, 팬들은 우리 담벽을 넘으려고 했었죠. 그게 끝났을 때, 저는 꽤 기뻤습니다. 그건 너무 비현실적 같았거든요. 결국, 그런 일이 계속되지 않는 때에 삶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알았죠. 성공이 좋긴 했지만요.
― 2007년 가을, Movies Rock 잡지 인터뷰 중 배리 깁의 발언 일부분.

디스코 폭파의 밤 문서에 당시 사회 기조가 잘 나타나있다.

5. 1980-1986: 밴드의 혼란과 침체 그리고 솔로 활동들

1979년, 로빈 깁은 소울 가수 지미 러핀(Jimmy Ruffin)의 앨범 Sunrise을 함께 제작했고, 비 지스가 작곡한 곡들이 포함되어 1980년 발매되었다.

1980년 3월, 배리 깁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Guilty 앨범 제작을 했고, 전곡을 작곡해주며[26] 그 중 2곡에 피쳐링으로 참여했다. 앨범은 미국, 영국 차트 1위를 했고 싱글 Woman in Love[27]도 1위를 하며 스트라이샌드의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배리 깁이 피쳐링한 GuiltyWhat Kind Of Fool도 미국에서 톱10안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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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의 만남

그 해 10월, 비 지스는 다시 모여서 새로운 노래들을 녹음했지만, 그동안 같이 성공을 누려 온 알란 켄달[28]과 데니스 브리옹, 블루 웨버가 그룹을 떠나버렸고,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새로운 스튜디오 뮤지션들을 모았다. 모리스는 솔로 앨범 Strings And Things 작업을 시작했다.

1981년, 16집 Living Eyes를 발매했다. RSO 레코드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자 비 지스 작품 중 첫번째로 CD발매가 된 앨범이다. 또한 최초로 CD로 제작된 앨범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디스코 때문에 비 지스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미국, 영국 앨범차트 톱40에도 들지 못하는 결과를 나았다. 싱글은 두 곡만 발매되었고 He's A Liar는 30위, Living Eyes는 45위를 하며 앨범보다 그나마 나은 성적을 기록했다.

1982년, 디온 워윅의 복귀 싱글 Heartbreaker와 동명의 앨범 전곡을 작곡해주며 싱글은 영국 차트 3위, 미국 차트 1위를 달성했다.

1983년, 돌리 파튼케니 로저스에게 Islands in the Stream을 작곡해줬고, 미국 차트 1위를 달성했다. 여세를 몰아 로저스의 앨범 Eyes That See In The Dark의 전곡을 작곡하고 프로듀싱해 미국 톱10차트에 올리며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같은 해에 토요일 밤의 열기 후속작인 스테잉 얼라이브[29]가 제작되고 이 영화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하게 된다. 비록 영화는 망했지만 사운드트랙은 잘 팔렸고, The Woman In You가 히트했다.

같은 해에 비 지스는 밴드 시카고의 작곡가 로날드 셀(Ronald Selle)에게 표절로 고소를 당했다. Let It End라는 자신의 노래를 How Deep Is Your Love에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1심에서는 증언을 제대로 못해서 졌지만 2심에서 승리하여 일단락되었다. Let It End 음원

1983년 8월, 배리 깁은 MCA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하고 1984년까지 새앨범 Now Voyager 작곡에 전념했다. 그동안 로빈 깁은 How Old Are You?, Secret Agent, Walls Have Eyes 3장의 앨범을 연달아 냈다. 모리스 깁은 1970년 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싱글인 Hold Her In Your Hand를 발매했다. 사운드트랙 앨범 A Breed Apart도 작업했지만 미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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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마이클 잭슨과의 만남

1985년, 다이애나 로스의 Eaten Alive 앨범 전곡을 써주고 타이틀 트랙은 마이클 잭슨과 공동작곡을 했다. 싱글 Chain Reaction은 영국과 호주 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86년, 배리는 두 번째 솔로 앨범 Moonlight Madness를 작업하지만 음반사의 거부로 발매가 취소되었다. 이는 나중인 88년 Hawks 사운드트랙으로 발매된다.

6. 1987-1999: 복귀와 성공, 앤디 깁의 사망

1987년 비 지스는 17집 E.S.P.와 함께 화려하게 돌아왔다. 6년만의 새 정규앨범이자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서 발매하는 첫 앨범으로 3백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싱글 You Win Again은 수많은 나라 차트에서 1위를 했고, 영국에서는 60, 70, 80년의 기간마다 1위를 달성한 첫번째 가수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직도 그놈의 디스코에 대한 반감 때문에 75위에 그치게 되었고 앨범도 잘 안팔렸다. 이 노래는 영국 아카데미의 아이버 노벨로 어워즈에서 최고의 노래로 선정되었다. 88년 2월에는 브릿 어워즈 최고의 영국 가수에 노미네이트 되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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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복귀

1988년 3월 10일, 막내 동생 앤디 깁이 사망하였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위의 세부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앤디 깁은 비 지스의 새로운 멤버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끝나버렸다. 대신 에릭 클랩튼이 잠시 들어와 더 번버리스(The Bunburys)라는 이름으로 영국 자선단체 기부금을 모으는 행사를 했다. 그룹은 총 세 곡을 녹음했다. We're The Bunburys, Bunbury Afternoon, Fight (No Matter How Long)이 그 곡들이고 마지막 곡은 록 차트 8위까지 올라갔으며 88년 서울올림픽 주제가 앨범에 수록되었다. 해당 앨범에는 비 지스 이름으로 Shape Of Things To Come도 수록되었다.

1989년, 18집 One을 발매했다. 오랜만의 미국 차트 진입에 성공했다. 싱글 One이 7위,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앤디 깁을 추모하는 노래인 Ordinary LivesWish You Were Here도 수록되어 있다. 앨범 발매 후 10년만의 월드 투어도 진행했다.

1990년, 폴리도어 레코드에서 발매된 모든 싱글들을 모은 박스셋 Tales From The Brothers Gibb: A History In Song을 발매했다. B사이드 곡들과 미공개곡들이 수록되었는데 유일하게 빠진 싱글은 Living Eyes 뿐이다. 그리고 이 박스셋이 음악업계 최초의 박스셋이다. 영국에서는 박스셋대신 The Very Best Of The Bee Gees로 영국에서 히트한 곡들만 모아 발매했고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당해 초에는 몇년 간 노력한 끝에 모리스 깁이 드디어 알콜 중독을 치료했다.

1991년, 19집 High Civilization을 발매했다. Secret Love만이 영국차트 5위에 들며 흥행했고 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가 끝나고 배리는 수술이 시급한 척추 문제와 두 번 다시 기타를 못치게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심한 관절염을 앓게 되었다.

1992년 3월 6일, 비 지스의 아버지 휴 깁이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93년, 20집 Size Isn't Everything을 발매했다. 영국에서 5위까지 한 싱글 For Whom The Bell Tolls와 23위를 한 Paying The Price Of Love도 있지만 미국에서 전자는 차트 진입 실패, 후자는 74위, 앨범은 153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1997년, 21집 Still Waters를 발매했다. 500만장을 팔았으며, 영국 앨범 차트 2위에 오르고 오랜만에 미국에서 11위까지 올라가며 대성공을 했다. 싱글 Alone은 영국 차트 5위와 미국 차트 28위를 기록했다. RSO 레코드 재적 시기 이후 처음 맞는 미국에서의 성공이었다.

같은 해 2월 24일, 런던 얼스 코트에서 열린 브릿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또한, 로큰롤 명예의 전당비치 보이스브라이언 윌슨이 입성시켰다.

11월 14일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One Night Only 콘서트를 진행했다. 앤디 깁의 생전 음원 영상을 띄우고 부른 Our Love (Don't Throw It Away)셀린 디온과 함께 한 Immortality 공연도 진행했다. 공연 실황 음반은 570만장이 팔렸다. One Night Only는 배리의 건강문제로 1회로 끝낼 예정이었고, 밴드의 마지막 라이브 퍼포먼스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관객들 반응이 너무 좋고 예상치 못한 대박에 단 하루만 하려던 공연이 전세계 투어가 되었다. 1998년 9월 5일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시작해 1999년 3월 27일 시드니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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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Night Only 투어

1998년,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이 뮤지컬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비 지스는 3곡을 새로 써주었다. 또한 고향 맨 섬을 대표하는 전통 노래 Ellan Vannin을 맨 섬 자선단체를 위해 녹음했고 투어 기간 동안 불렀다.

1999년 12월 31일, 마지막 풀 사이즈 콘서트인 BG2K를 끝으로 20세기를 마무리 지었다.

7. 2000-2008: This Is Where I Came In, 모리스 깁의 사망과 해체

2001년, 마지막 앨범이자 22집 This Is Where I Came In을 발매했다. 영국 차트 6위, 미국 차트 16위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새앨범은 각 멤버들이 각자 원하는 대로 곡을 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모리스 깁도 2곡, 로빈, 배리 깁은 각자 3곡, 나머지는 공동 작곡으로 채웠다. 앨범 홍보를 위해 Live By Request에 출연하여 마지막 앨범 치고 여러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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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맞은 비 지스

2002년 2월 23일, 미국 마이애미의 Love And Hope Ball에서 공연하였고, 3인조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로빈은 이날 공연 중간부터 참여했으며, 배리와 모리스는 로빈이 오기전까지 비 지스 노래는 Words 한 곡만 연주했고,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로이 오비슨, 에벌리 브라더스의 노래를 커버하며 공연을 이어갔다. 로빈이 도착한 후부터 비 지스 히트곡들을 부르며 공연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이때가 마지막이 될거라고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촬영은 물론 녹음도 하지 않아 비 지스의 마지막 공연을 다시 접할 기회가 사라졌다. 이때 바로전의 공연인 2001년 6월, 로스앤젤레스다저 스타디움 공연도 촬영되지 않았다.

2003년 1월 12일, 비 지스의 마지막 기간에 음악 감독으로도 활약했던 모리스 깁이 뜻밖의 죽음을 맞이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모리스의 사망 이후, 남은 형제들은 계속 비 지스를 이끌어 나가려 했지만 모리스가 없이는 도저히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비 지스 내에서 가장 넉살이 좋았던 모리스가 사라지자 예전의 싸운일도 있고 해서 항상 사이가 완전히 가깝지는 않던 배리와 로빈만 남게 되자 금세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리스의 추모 공연을 열기 위해 둘이 노력했지만 뜻이 맞지 않아 취소되는 순간부터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배리가 나중에 말하길 둘의 사이는 해가 갈수록 벌어졌고, 어떤때는 1년이 넘게 대화 한 번 하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앤디 때, 우린 죽음이 점점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 때는 예상 못한 충격이었어요."
― 2014년 6월 5일, Rolling Stone 잡지 인터뷰 중 배리 깁의 발언 일부분.

모리스가 사망한 같은 주, 로빈의 솔로 5집 앨범 Magnet이 발매되었다.
2월 23일에는 그래미 레전드 상을 수상하여 21세기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수상에는 모리스 깁 대신 아들 아담 깁이 대리수상을 했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모리스 깁이 빠진 채로 처음하는 비 지스 축하공연을 했다.
배리와 로빈은 각자 독립적으로 음악작업을 진행했고 가끔 특별한 이벤트에만 둘이 합동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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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만 행보를 이어나가는 모습

2004년 5월 27일, 영국 왕실로부터 밴드 자격으로 CBE 훈장을 수여받았다. 시상식에는 배리, 로빈이 참여해 수상했으며 모리스는 아들 아담이 대리수상 하였다.
2004년 후반, 로빈은 독일, 러시아, 아시아 등지에서 솔로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 진행 중인 2005년 1월, 배리와 로빈은 다시 만나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의 구호기금을 모으기 위해 다른 가수들과 Grief Never Grows Old 녹음에 참여했다.
그 후, 배리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작업했던 Guilty의 후속앨범 Guilty Pleasures의 전곡을 같이 작업했다. 로빈은 계속 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배리는 클리프 리처드와 함께 I Cannot Give You My Love를 녹음했고 영국 차트 20위를 했다.

2006년, 배리와 로빈은 다시 만나 마이애미 당뇨병 조사 기관 자선 콘서트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고, 모리스가 사망한 후 첫 번째 합동 라이브가 되었다. 공연 장소는 3형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라이브를 했던 Love And Hope Ball이다. 5월 20일에는 영국 왕실 자선 단체 Prince's Trust 30주년 기념식에 참여하여 공연했다. 로빈은 솔로 6집 My Favourite Christmas Carols를 발매했다.

2008년 10월, 런던 BBC Electric Proms에서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의 몇 곡을 라이브로 공연했다. 몇몇의 다른 공연자들과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고, TV에 방영되었다.

8. 2009-2012: 재결합과 로빈 깁의 사망

2009년 9월 1일, 배리의 63번째 생일 날, 배리가 "그들이 곧 돌아올 것이다."라고 발표했다는 것을 이지 믹스 라디오 호스트인 팀 록스보로(Tim Roxborough)가 방송에서 발표했다. 배리는 워너/리노 레코드와의 계약 조건으로 인해 공식 발표는 못했던 상황이다.
9월 7일, 로빈은 크리켓 선수이자 방송인 조나단 애그뉴(Jonathan Agnew)에게 배리와 연락해서 비 지스의 이름으로 다시 재결합해 공연할 것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혔다.
10월 31일, 스트릭틀리 컴 댄싱과 11월 17일,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해 공연을 했다.
11월 3일에는 재결합 후 첫 음반인 The Ultimate Bee Gees를 발매했다.

2010년 3월 15일, 비 지스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스웨덴 팝 그룹 ABBA를 입성시켰다.
5월 26일,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9 마지막 회에 깜짝 등장하여 공연을 했다.

2011년 11월 20일, 61세의 로빈 깁이 간암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2012년 2월 13일, 로빈은 영국 군인 출신 트리오 그룹 더 솔져스(The Soldiers)와 런던 팔라디움 상이군인 자선 콘서트에 출연해 공연을 했고,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5월 20일, 로빈 깁의 사망이 발표되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그리고 비 지스는 영원히 해체되었다. 배리 깁은 형제들 중 맏형이지만, 모든 동생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제가 후회하는 유일한 것은 마지막까지 로빈과 좋은 관계로 남지 못했다는 겁니다. [31] 언제나 로빈과는 작은 다툼이라도 꼭 있었어요. 로빈과 저는 음악적으로는 잘 맞았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절대 맞지 않았죠. 우리는 형제였지만, 진짜 친구는 아니었어요."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은 나쁜 시간들이 있었고, 좋은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적은 좋은 시간들이 정말 아름다웠던 겁니다..."
― 2014년 6월 5일, Rolling Stone 잡지 인터뷰 중 배리 깁의 발언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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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깁의 장례식

9. 2013-현재

2013년 9월과 10월, 배리는 첫 번째 솔로 투어 In Honour Of His Brothers And A Lifetime Of Music을 진행했다. 공연 후 배리 깁은 완전한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아들 스티브 깁과 함께 작업을 했다.
추가적으로 리노 레코드의 The Studio Albums 1967-1968과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의 박스셋 The Warner Bros Years 1987-1991, 페스티발 레코드의 The Festival Album Collection: 1965-1967도 발매되었다.

2014년 9월 29일, 로빈 깁의 사후 앨범 50 St. Catherine's Drive가 발매되었다. 사후 앨범 치고는 성적이 좋지 않은 편이다.
12월 19일, BBC Four에서 전기 다큐멘터리 The Joy Of The Bee Gees가 방영되었다.

2015년 3월 23일, 13스타 레코드에서 1974-1979 박스셋을 발매했다. 미공개곡 하나 추가안된 5장 앨범 모음집

2016년, 배리 깁의 두 번째 솔로 앨범 In The Now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비 지스의 음악 판권들은 캐피탈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8월 12일, 비 지스의 어머니인 바바라 깁이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17년, 현재까지 발매된 비 지스 앨범 중 마지막 앨범인 Timeless: The All-Time Greatest Hits가 발매되었다.

2018년, 배리 깁은 기사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보이 아재 밴드인 테이크 댓의 컴필레이션 앨범 Odyssey의 수록곡 How Deep Is Your Love[32]의 피처링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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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배리 깁

2019년 2월 10일, 프랭크 마셜을 감독으로 한 비 지스 전기 다큐멘터리을 제작한다고 발표되었다. 현재 완성 단계이며, 내년에 TV로 방영된다.

또한, 배리 깁은 2020년 발매 목표로 제목 미정의 세 번째 솔로 앨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앨범은 컨트리 풍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알려진 정보로는 듀엣 앨범이 될 것이며, 현재 듀엣 가수로는 컨트리 가수 제이슨 이스벨과 올리비아 뉴튼 존이 참여했다. 신곡들이 포함될지, 비 지스의 대표곡들의 리메이크 앨범일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비 지스를 영화로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에 참여한다고 한다. 배리 깁로빈 깁의 아내 드위나, 모리스 깁의 아내 이본느 3명이 영화 제작에 참여한다. 현재 제작 기간은 3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배리 깁 역으로 브래들리 쿠퍼가 고려되고 있다. 현재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로빈 깁의 아들 로빈 존 깁이 라미 말렉과 접선해 로빈 깁역을 맡아줄 것에 대해 의논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쓰일 음원들은 MR만 오리지널을 쓰고 보컬은 배우들이 직접 녹음할 것이라고 하고, 대표곡 중 하나인 Jive Talkin'은 영화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2021년 10월 6일, 브라질 모델 겸 배우인 Carina Haller가 캐스팅되었다. 처음으로 확정된 공식 캐스팅이다.

2019년 12월 빌보드가 발표한 올타임 아티스트 순위에서 28위를 기록했다.

2020년 말 또는 2021년 초 사이에 배리 깁의 새 앨범 발매와 HBO의 비 지스 다큐멘터리가 방영 예정이다. 다큐멘터리에는 1971년의 60분짜리 공연 라이브 실황과 미공개 사진, 동영상 등이 공개될 것이라고 한다. 다큐멘터리 제목은 "The Bee Gees: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이다.

2020년 12월 12일 오후 8시(미 동부표준시 기준), 프랭크 마셜이 감독한 비 지스 전기 다큐멘터리가 HBO에서 방영된다. 비 지스의 영상 자료들과 저스틴 팀버레이크, 닉 조나스, 노엘 갤러거 등의 유명인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2021년 1월 8일, 배리 깁의 3번째 솔로 정규 앨범인 Greenfields: The Gibb Brothers Songbook, Vol. 1이 발매된다.

2025년부터 기존 비 지스 전기 영화 제작을 갈아엎고 리들리 스콧을 감독으로, 존 로건을 작가로 하여 전기 영화 "You Should Be Dancing" 촬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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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로는 방울뱀들이다.[2] 줄이 하나 짜리인 악기이다. 빨래통을 울림통으로 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3]빌 게이츠와는 동명이인.[4] 해당 곡은 로빈 깁 유작 50 St. Catherine's Drive에 수록.[5] 가운데가 빈스 멀로니, 오른쪽 끝이 콜린 피터슨이다.[6] 원래는 오티스 레딩에게 가려던 곡이었다.[7] 당시 Top Of The Pops 진행자.[8] 나중에 모리스 깁의 아내가 된다.[9] Horizontal 세션 때 녹음됐지만 2008년에 공개되었다.[10] A Whiter Shade Of Pale이라는 히트곡을 가진 프로그레시브록 밴드.[11] 안그래도 실패할 것 같은 노래 같아서 더블 사이드 싱글로 뒷면에 The Singer Sang His Song 까지 수록했지만 역시 실패였다.[12] 그는 5집 Idea에 Such a Shame이라는 비 지스 커리어 상 유일하게 삼형제의 목소리도 안들어가고 작곡도 참여하지 않은 솔로곡을 남겼다.[13] 주로 모리스 깁이 담당.[14] 철자는 masterpiece가 아닌 masterpeace이다.[15] 그러나 곡은 미공개 되었다.[16] Sing A Rude Song이라는 뮤지컬 주연도 맡았다.[17] 덕분에 로빈의 솔로 2집 앨범이 될 예정이었던 Sing Slowly Sisters가 미발매로 남았다.[18] 나중에 비 지스가 노래도 써준 이본느 엘리먼(Yvonne Elliman)과 결혼하게 된다.[19] 비 지스 버전은 Stayin' Alive 싱글의 B사이드에 실려있다. 원래는 이 곡을 비 지스가 부르고 How Deep Is Your Love를 이본느에게 주려했지만 스틱우드가 바꿔서 하자고 해서 바뀌었다.[20] 이 중에는 Shadow Dancing이라는 노래도 있었는데, 이 노래는 비 지스의 다른 노래들 못지않게 히트쳐서 1978년 빌보드 연말차트 1위를 차지했다.[21] 사만다 생의 곡.[22] 앤디 깁의 곡.[23] 각 년도마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순으로 받았다.[24] Stayin' Alive만 받았다.[25] 비 지스의 다른 히트곡들인 Stayin' Alive, Night Fever, How Deep Is Your Love를 이겼다.동생 곡 선물해줬는데 그것땜시 연말차트 1위를 뺏겼다[26] 4곡은 로빈과 함께, 타이틀곡은 형제 공동 작곡.[27] 배리, 로빈 깁 작곡.[28] 1989년 돌아온다.[29] 실베스터 스탤론이 전작을 보고 감명받아 감독까지 맡아 제작했지만 폭망했다.[30] 상은 펫 샵 보이즈가 수상.[31] 실제로 모리스 사망 당시 큰 충돌이 생겨서 재결합때도 사망 전까지 어색한 사이였다고 한다. 로빈의 투병 소식도 뉴스 듣고 알았고, 사망 전에야 겨우 만나서 화해했다고.[32] BeeGees의 명곡이지만 Take That이 90년대 중반에 해체하면서 리메이크 한 굿바이싱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