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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12:35:04

브리안 라우드루프

브리안 라우드럽에서 넘어옴
브리안 라우드루프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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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 1996-97
파일:PFA Scotland.jpg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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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월드사커 로고.png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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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안 라우드루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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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스 FC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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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액 인물
모지스 맥닐, 피터 맥닐, 피터 캠벨, 윌리엄 맥베스, 톰 밸런스, 존 맥퍼슨, 조크 드러먼드, 니콜 스미스, 닐리 깁슨, 알렉스 스미스,
로버트 C. 해밀턴, 아서 딕슨, 지미 고든, 제임스 보위, 토미 케언스, 앤디 커닝엄, 버트 맨더슨, 토미 뮤어헤드, 샌디 아치볼드, 데이비드 미클존,
앨런 모턴, 툴리 크레이그, 두기 그레이, 지미 플레밍, 밥 맥페일, 지미 심슨, 조지 브라운, 지미 스미스, 제리 도슨, 샘 잉글리시,
토런스 길릭, 알렉스 벤터스, 윌리 손턴, 조크 쇼, 윌리 우드번, 윌리암 와델, 조지 영, 이언 매콜, 바비 브라운, 새미 콕스,
조지 니븐, 조니 허버드, 빌리 심슨, 존 리틀, 에릭 캘다우, 알렉스 스콧, 랠프 브랜드, 지미 밀러, 바비 시어러, 빌리 리치,
데이비 윌슨, 해럴드 데이비스, 데이비드 프로번, 이언 맥밀런, 윌리 헨더슨, 로니 매키넌, 짐 백스터, 존 그레이그, 콜린 잭슨, 샌디 저딘,
윌리 존스턴, 윌리 매티슨, 데이브 스미스, 알렉스 맥도널드, 콜린 스타인, 알피 콘 주니어, 피터 매클로이, 데릭 팔레인, 데릭 존스톤, 토미 매클레인,
톰 포사이스, 앨리 도슨, 데이비 쿠퍼, 바비 러셀, 데이브 맥퍼슨, 앨리 맥코이스트, 이언 듀랜트, 그레이엄 수네스, 테리 버처, 크리스 우즈,
리처드 고프, 이안 퍼거슨, 레이 윌킨스, 존 브라운, 마크 헤이틀리, 앤디 고람, 스튜어트 맥콜, 브리안 라우드루프, 폴 개스코인,
외르크 알베르츠, 배리 퍼거슨, 로렌초 아모루소, 슈테판 클로스, 페르난도 릭센, 나초 노보, 리 맥컬록, 데이비드 위어, 앨런 맥그레거, 제임스 태버니어, 스티븐 데이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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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스 FC 역대 최고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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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gers Football Club Greatest ever Team
(4-4-2)
ST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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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5) / (1997)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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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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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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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65)
(1969~1970)
CM

개스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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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8)
RM
브리안
라우드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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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8)
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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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998)
(20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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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前 축구선수
파일:BrianLaudrup.jpg
이름 브리안 라우드루프
Brian Laudrup
출생 1969년 2월 22일 ([age(1969-02-22)]세)
오스트리아 [1]
국적
[[덴마크|]][[틀:국기|]][[틀:국기|]]
신체 186cm / 체중 78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2], 미드필더[3] / 은퇴)
소속 클럽 브뢴뷔 IF (1986~1989)
FC 바이어 05 위어딩엔 (1989~1990)
FC 바이에른 뮌헨 (1990~1992)
ACF 피오렌티나 (1992~1993)
AC 밀란 (1993~1994)
레인저스 FC (1994~1998)
첼시 FC (1998~1999)
FC 코펜하겐 (1999)
AFC 아약스 (1999~2000)
국가대표 82경기 21골 (덴마크 / 1987–1998)
가족 미카엘 라우드루프


[clearfix]

1. 개요

파일:laudruprangers.jpg
바이에른 뮌헨이 그를 샀을 때 라우드루프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비싼 선수였다.
그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냐고? 물론이다. 그는 그의 연봉에 걸맞은 활약을 했다.
그의 처럼 그는 월드클래스였으며 그가 클럽에 있을 때 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란츠 베켄바워
덴마크의 前 축구 선수이자 현 축구 해설자.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라우드럽 형제로 유명한,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동생이다.[4] 워낙 형이 거물이라[5] 형에 비해 약간 이름값이 밀리는 느낌은 있으나, 동생 또한 대단한 선수이다. 형은 플레이메이커로 드리블과 패스에 특화된 공격형 미드필더라면 동생인 브리안은 보다 확실한 전문 공격수, 골잡이였다. 물론 그렇다고 미카엘이 득점력이 없다는 건 아니다.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스피드와 볼컨트롤, 위치선정에 득점감각까지 가지고 있는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공격수.

형이 출전하지 않은 유로 1992에서 활약하면서 조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전까지 덴마크는 유럽 축구 무대에서 2류 취급을 받았으나, 라우드루프 형제와 골키퍼 페테르 슈마이켈을 앞세워 유럽 무대를 호령한다.

형이 은퇴하면서, 브리안 또한 비교적 이른 나이인 29세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해서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로부터 3년 뒤 32세 때 프로 무대도 은퇴한다.

2. 클럽 경력

2.1. 브뢴뷔 IF

1987년과 1988년 덴마크 1부 리그인 덴마크 퍼스트 디비전을 우승하고 분데스리가의 위어딩엔으로 이적하였다.

2.2. FC 바이어 05 위어딩엔

브리안은 좀 더 적은 부담감 속에서 뛰기를 원하였고 해외 진출을 하여 분데스리가의 위어딩엔에서 뛰게 되었다. 88-89시즌에 36경기 6골을 득점하며 덴마크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였다.

2.3. FC 바이에른 뮌헨

1990년 5월에 분데스리가 당시 최고 이적료를 갱신하며 바이에른 뮌헨에 합류하였다. 33경기 9골을 넣으며 준수한 활약을 했고 팀은 준우승을 했다. 다음 시즌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였으나 덴마크 올해의 선수를 다시 수상했고 발롱도르 6위와 피파 올해의 선수 5위를 하였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바이에른에서의 2년간 53경기 출전, 11골을 기록하였다. 컵대회와 유럽대항전을 포함하면 63경기를 출전하였다.

2.4. ACF 피오렌티나

당대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로 무대를 옮겨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였다. 시즌 초반기에는 화끈한 공격축구로 좋은 출발을 하였으나 시즌 후반기에 감독 교체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피오렌티나는 50여년만에 강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 당시 피오렌티나에는 뮌헨에서 온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바티골'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뛰고 있었으나 강등을 막는데는 실패.

2.5. AC 밀란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2d75ae48d5c0b7579ad7c40255cde05.jpg

피렌체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밀란에 임대되었으나 당시 세리에는 경기당 출전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를 3명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브리안이 뛰던 시절 밀란의 외국인 선수들은 수비를 위해 중용된 마르셀 드사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격수들이었는데, 그들은 이 규정 때문에 자국을 대표하는 출중한 실력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경기에만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무조건 기용되었을 마르코 판바스턴은 93/94 시즌부터 이미 출장 불가능한 상황에서, 브리안은 91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프랑스의 장 피에르 파팽, 루마니아의 재능있는 공격수 플로린 러두쵸이우, 구 유고 연방 출신의 마법사 데얀 사비체비치와 출장 기회를 나눠 갖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비를 중시하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성향상 경기에 투입되는 공격수는 제한적이었고[6], 그와 포지션이 거의 같은 경쟁자인 데얀 사비체비치는 만만찮은 상대였다.[7] 그래도 브리안은 챔피언스리그 7경기를 뛰며 밀란의 클럽 통산 다섯번째 챔스 우승에 기여했다.[8]

2.6. 레인저스 FC

파일:laudruprangers2.jpg
The Great Dane
1994년 7월 브리안은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 FC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레인저스는 유럽 대항전 우승을 위해 야심차게 투자하던 시절. 브리안은 레인저스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레인저스의 에이스로 부상하게 되고, 이 당시 바르샤의 오퍼도 거절하고 클럽에 남게 된다.

브리안이 공격을 이끌던 이 시절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 리그 9연속 우승을 하게 되고 브리안은 덴마크 올해의 선수를 2회 수상[9] 하게 되는 등 스코틀랜드 리그 내에서도 탑급의 선수로 꼽히게 된다.

아직도 레인저스 팬들은 브리안을 역대 최고의 용병 중 하나로 꼽고, 브리안도 레인저스 시절을 "내 커리어 중 가장 좋았던 4년"이라 할 만큼 서로에게 좋았던 시절이였다. 또 레인저스는 브리안을 클럽 명예의 전당에 헌액할만큼 클럽 레전드로서도 대우해주고 있다. 최근 시작한 인스타그램에서도 레인저스 시절 또는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은 게시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을 보면 정말 레인저스 시절을 자신의 최고 전성기로 생각하고 있는듯.[10]

2.7. 첼시 FC

브리안은 1998년 첼시로 이적하나 7경기 0골을 기록한다. 부상으로 많이 뛰지 못한 것이 원인. 그러나 1998 UEFA 슈퍼컵 우승을 챙겨가게 된다.

2.8. FC 코펜하겐

1999년 봄에 라이벌 팀인 코펜하겐으로 이적하여 옛 친정팀인 브뢴뵈의 서포터들에게 야유를 받았다.[11]

2.9. AFC 아약스

아약스에서 99-00시즌에 38경기 15골을 득점하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부상으로 인해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12]

3. 국가대표 경력

3.1. UEFA 유로 1992

이 당시 덴마크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였으나[13] 운 좋게 참가하게 된 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부상으로 당시 팀에서 슈퍼스타라고 부를만한 거의 유일한 사람인 이 출전하지 못하였으나[14] 그는 페테르 슈마이켈과 함께 [15]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다. 4강전 상대는 오렌지 군단 이었는데 오렌지 삼총사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가 버티는 네덜란드를 승부차기로 꺾고 올라갔으며 결승전에서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챔피언인 전차군단을 2:0으로 박살내고 정상에 오른다.

비록 본선에서 득점하지는 못하였으나 좋은 활약으로 유로 92 토너먼트의 팀에 뽑히는 업적을 이룬다.

3.2. 1995 킹 파드컵

유로 92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한 1995년 킹 파드컵. 브리안은 사우디아라비아 전에서 원더골을 집어넣으며 2:0 승리를 이끌고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무너트리는 쐐기골을 어시스트하며 덴마크를 우승으로 이끈다. 브리안은 대회 MVP도 수상하게 된다.

3.3. UEFA 유로 1996

덴마크의 슈퍼스타들인 미카엘과 브리안, 그리고 페테르 슈마이켈이 총출동했으나 덴마크는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들게 된다.

3.4.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 리그를 1승 1무 1패로 통과하고 16강에서 나이지리아를 4:1로 대파한다. 그리고 8강 토너먼트에서 브라질을 만나 2:1로 뒤지던 중 브리안이 동점골을 꽂아넣었으나[16]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히바우두가 역전 중거리 슈팅을 성공시켜 브라질이 3:2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라우드루프 형제 모두 분전했으나 아깝게 패배하고 이 경기는 두 형제 모두에게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된다.

4. 플레이 스타일


자기 득점은 확실하게 챙길 줄 아는 선수였지만, 무엇보다 플레이메이킹에 희열을 느꼈던 선수로서 팀원에게 만들어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존 그레이그

폴 개스코인, 프란츠 베켄바워, 안드레아스 브레메 등 기라성같은 축구전설들이 월드클래스라고 직접 극찬하고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전화로 영입을 시도했던 시대의 천재형 공격수로, 포지션적으로 다재다능했던 선수로서 양쪽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 원톱 스트라이커 등 다양한 공격 포지션 전체를 소화 가능했으나 제일 선호했던 자리는 프리롤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특히 국가대표팀에서 에이스 대접을 받았던 선수로서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총 2골 3도움을 기록하고 덴마크를 8강까지 진출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빠른 준족과 우아하고 고상한 볼컨트롤로 무장한 선수로 창의력과 개인 능력까지 갖췄다. 주로 빠른 속력으로 수비를 주파하며 순간적으로 열린 틈으로 무심하게 동료들에게 킬패스를 찔러주는 플레이를 구사했으며[17], 180대 중반이라는 좋은 신장을 이용해 헤딩 득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득점에 양발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넓은 시야를 활용하여 동료를 활용할 줄 아는 선수였다. 물론 천재 드리블러형 공격수의 전형답게 수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AC밀란 시절 수비참여도를 강조했던 파비오 카펠로가 라우드루프를 로테이션 정도로만 써먹는 계기가 된다.

다만 비록 실력과 재능이 유럽 최고 자리도 능히 넘볼수 있을정도로 뛰어났으나, 결정적으로 멘탈이 완성되지 못한 선수였다. 형 미카엘 라우드루프와 닮아 매사에 좀 건성건성이고 실력 향상에 게으른 면모가 역력했다고 회자되며, 이 멘탈의 영향으로 플레이 기복이 심했고, 스스로 순수 재능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월드클래스 경지에 올랐음에도 딱 그자리에만 만족하고 더이상의 발전을 꾀하지 않았다. 게다가 빅클럽에서 뛴 경력과 남긴 기록들이 부실한 탓에, 당대 그의 퍼포먼스를 보지 못한 어린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무시 또는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6.1. 모델 셀리머니

하지만 브리안 라우드럽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골[18]을 넣고 보여준 셀러브레이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델 세레머니', TV시청 세레머니[19]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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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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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정말 잘생긴 축구선수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바이에른 뮌헨 시절 Kicker지 독자들을 대상으로 'das idol 90'이라는 분데스리가 선수 인기투표를 진행했는데, 라우드루프가 4회로 공동 최다 1위 등극을 기록했으며, 옆동네 Bild지에서 15만명 구독자를 대상으로 한 비슷한 조사에서도 무려 자국 레전드 안드레아스 브레메, 로타어 마테우스, 루디 푈러에 이은 4위를 기록했다.

여러모로 외모는 보다 확실히 나은듯 하다 (...).


[1] 아버지인 핀 라우드루프가 오스트리아에서 뛸 때 태어났다.[2] 중앙 공격수[3]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4] 아버지 핀 라우드루프도 축구 선수였다.[5] 라우드루프 형제가 활약할 무렵 국내에선 유럽 축구를 접할 루트가 마땅치 않아 아는 사람만 아는 선수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그 명성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1990년대를 풍미한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플레이메이커였다.[6] 그 시기 카펠로 감독은 거의 무조건 투 볼란치를 사용했다.[7] 사비체비치 또한 카펠로 감독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점은 브리안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그는 92년부터 밀란에서 뛰고 있었고, 무엇보다 붉은 별 클럽에서 90/91 유러피안컵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카펠로 감독은 사비체비치를 그닥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출장하는 경기에서는 팀 공격을 그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면이 있었다. 실제로 93/94 UCL 결승전에서도 카펠로는 사비체비치를 선발로 내보냈고 그는 클래스를 증명했다.[8] 이때 결승에서 만난 FC 바르셀로나에는 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그는 감독과의 갈등으로 벤치에도 앉지 못한 채 소속팀이 0:4 참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어딘가로 향하는데...[9] 4회 수상, 현재까지도 최다 수상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10] 은퇴 후 클럽 당시 좋은 성과를 낸 감독인 제라드를 만나 사진찍고 대화할만큼 계속 레인저스에 애정을 갖고 있다. 물론 제라드가 레인저스를 떠나는 과정이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는게 문제지만...[11] 그래도 형에 비하면 양반이다. 형은 철전지 원수 라이벌 팀으로 다이렉트 이적했다.[12] 형 미카엘도 AFC 아약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브리안이 아약스로 이적한 것도 아마 형의 영향이었을 것이다.[13] 본래 예정대로라면 본선 진출한 유고슬라비아가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지만 하필 이 시기에 터진 내전의 영향으로 인해 UN으로부터 국제 스포츠 대회 출전 금지 조치 제재를 받았으며, 이 제재로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탈락하는 상황에 놓여지면서 출전이 좌절 되었다. 실제로 당시 선수들은 개최국 스웨덴에 미리 도착했다가 제재를 받고 되돌아가는 상황을 겪게 된다.[14] 사실 두 형제는 당시 리하트 묄러 닐센 감독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표팀 은퇴선언을 하였고 이로인해 덴마크 대표팀은 두 형제 없이 가야하는 상황에 놓여져서 어려움이 있었다.[15] 미카엘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이들도 당시 유럽에서 명함 내밀 정도는 된다.[16]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모델 세리머니.[17] 이런 모습은 형 미카엘과 아주 흡사해서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저화질 예전 동영상을 보면 형과 헷갈리기 십상이다.[18] 이 당시 브리안에게 오는 로빙패스를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아크로바틱하게 걷어내려다 헛발질을 하여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19] 피파 온라인 3에도 이 세리머니가 있다. 커맨드는 shif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