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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0:40:00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벨기에의 스테파니에서 넘어옴
<colcolor=#000000><colbgcolor=#DCEDC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비 & 로냐이 공비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Princesse Stéphanie de Belgique
파일:Kronprinzessin_Stefanie.jpg
이름 네덜란드어 스테파니 클로틸더 루이세 헤르미너 마리 샤를로터
(Stefanie Clotilde Louise Hermine Marie Charlotte)
프랑스어 스테파니 클로틸드 루이즈 에르미니 마리 샤를로트
(Stéphanie Clotilde Louise Herminie Marie Charlotte)
독일어 슈테파니 클로틸데 루이제 헤르미네 마리 샤를로테
(Stephanie Clotilde Louise Hermine Marie Charlotte)
출생 1864년 5월 21일
벨기에 브뤼셀 라컨 라컨 궁전
사망 1945년 8월 23일 (향년 81세)
헝가리 왕국 파논하르마 파논하르마 대수도원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1881년 결혼 / 1889년 사망)
너지로녀의 엘레메르 로냐이 공 (1900년 결혼)
자녀 엘리자베트 마리
아버지 레오폴드 2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형제 루이즈, 레오폴드, 클레망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황태자비3.3.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과 불행3.4. 재혼3.5.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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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의 공주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비. 레오폴드 2세의 차녀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의 아내이다.

2.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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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1] 모노그램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383871-1367582457-01.jpg
파일:843931-1542990618-01.jpg
어린 시절
1864년 5월 21일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사이에서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대부이자 외삼촌[2]인 오스트리아의 스테판 대공과 외숙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클로틸데 공녀[3]로부터 따와 '스테파니 클로틸드 루이즈 에르미니 마리 샤를로트'로 지어졌다. 정략결혼한 스테파니의 부모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던 마리 앙리에트와는 달리 레오폴드는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가정에도 헌신하지 않았다.

1865년 할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사망하여 아버지가 레오폴드 2세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1869년 스테파니의 오빠이자 유일한 후계자였던 레오폴드 왕세자가 연못에 빠져 폐렴을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레오폴드 2세와 마리 앙리에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아이를 낳았으나 아들이 아닌 딸 클레망틴 공주가 태어났고 이후 두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스테파니의 교육은 10살 때부터 시작되었고 대부분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등을 배웠고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랐지만 깊은 수준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3.2. 황태자비

1878년 오스트리아 제국엘리자베트 황후런던으로 향하는 길에 벨기에에서 스테파니 공주를 만났다. 레오폴드 2세마리 앙리에트는 스테파니가 엘리자베트 황후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와 결혼하길 바랐다. 1880년 3월, 레오폴드 2세 부부는 루돌프 황태자를 벨기에 궁정으로 초대했고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공주는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다. 부모로부터 빨리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던 루돌프 황태자는 스테파니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4] 엘리자베트 황후는 작은 왕국인데다 짧은 역사를 가진 벨기에 출신의 공주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파일:297605-1340965657.jpg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공주
1880년 3월 7일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공주의 약혼이 공식화되었다. 당시 스테파니는 15세였고, 루돌프 황태자는 21세였다. 또한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황실 기준으로 7촌 지간이었다.[5] 원래 결혼식은 1881년 2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스테파니 공주가 초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오스트리아 황실 측은 결혼식을 연기했다.

결혼식은 스테파니 공주가 17세 생일은 맞기 며칠 전인 1881년 5월 10일 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두 사람은 결혼 초반에는 서로에게 애칭을 붙여주는 등 나름 행복한 신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스테파니는 빈을 떠나 유럽을 여행하곤 했던 시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를 대신하여 궁중의 여러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1883년 봄,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아이를 임신했다. 황실 사람들은 새 후계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매우 기뻐했다.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당연히 아이가 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고,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루돌프 황태자는 실망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에르치(Erzs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파일:Stephanie_Belgien_Elisabeth_1885_(cropped).jpg
엘리자베트 마리와 함께

하지만 에르치가 태어난 이후 루돌프 황태자는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성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무도 스테파니에게 황태자가 성병에 걸린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의사들은 그가 복막염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이후 스테파니가 불임이 되자 이 사실은 곧 들통이 나게 된다. 배신감에 휩싸인 스테파니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고 폴란드의 한 백작과 불륜을 저질렀다.

3.3.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과 불행

1887년부터 루돌프 황태자조울증은 더욱 심해져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스테파니는 시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루돌프 황태자를 여행을 보낼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1889년 1월 30일 루돌프 황태자는 스테파니에게 딸 에르치를 잘 부탁하며 이제 자신이라는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하라는 편지를 남기고 연인 마리 폰 베체라 여남작과 함께 자살했다.[6] 남편이 사망한 후 스테파니는 을 떠나 친정 브뤼셀에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 레오폴드 2세와 시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반대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스테파니는 14살 연상의 아르투르 포토츠키 백작과 만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힘든 시기를 포토츠키 백작에게 의지하며 보냈지만 그는 1890년에 후두암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고 스테파니는 또 한번의 힘든 시기를 보냈다.

게다가 시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또한 스테파니를 피하고 냉담하게 대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스테파니의 외모가 예쁘지 않다며 비판했다고 한다.[7] 황태자비 작위를 갖고는 있었으나 더이상 황후를 대신할 수도 없는데다 많은 권한이 줄어들었던 스테파니는 궁정 생활을 버거워했고, 엘리자베트 황후처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황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1898년 9월 10일에는 엘리자베트 황후제네바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스테파니는 엘리자베트 황후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3.4. 재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스테파니를 새로운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재혼시킬 생각이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하급 귀족인 조피 초테크 여백작과 결혼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됐다. 스테파니는 헝가리의 하급 귀족인 엘레메르 로냐이와 재혼하기로 결심했으나, 아버지 레오폴드 2세는 이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스테파니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으며 심지어 스테파니가 벨기에로 입국하는 것도 금지시켜 버렸다. 또 가장 친했던 여동생 클레망틴 공주와도 연락하는 걸 금지시켰고 연금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파일:Lónyay_Elemér.jpg
엘레메르 로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는 결혼을 강행했고,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한 지 11년 후인 1900년 3월 22일 엘레메르 로냐이와 재혼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며느리를 불쌍하게 여겨 마지못해 재혼을 허락하긴 했지만 스테파니는 더이상 황태자비 작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딸 에르치와도 절연하게 되었다.[8]

1902년 9월 19일, 스테파니는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가 사망하여 벨기에로 가려고 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 레오폴드 2세가 장례식 참석을 금지시켜 결국 다시 돌아와야 했다. 1909년에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할 때에도 스테파니는 끝끝내 접견을 금지당했다.

스테파니는 헝가리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정원을 가꾸고 살았다. 또 많은 손님들을 대접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테파니는 임시 치료소를 만들었고 남편 엘레메르는 오스트리아 적십자에서 경영을 맡았다.

1916년 11월 21일 시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카를 1세는 엘레메르에게 '공(Fürst)' 작위를 수여하였고, 스테파니 또한 공비가 되었다.

3.5. 말년

스테파니는 남편 엘레메르와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불가리아 왕국페르디난트 1세 등과 같은 여러 망명한 왕족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이후 종교 활동을 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논하르마 대수도원으로 피난을 간 스테파니는 1945년 8월 23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도, 후손들도 오지 않았다. 유해는 파논하르마 대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1년 후 사망한 남편 엘레메르가 곁에 묻혔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Princess Stéphanie of Belgium)
<colbgcolor=#fff3e4,#331c00>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드 1세
(Leopold I)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Saxe-Coburg-Saalfeld)
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로이스 여백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루이즈 도를레앙
(Princess Louise of Orléans)
루이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9]
(Princess Maria Amalia of Naples and Sicily)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
(Archduchess Marie Henriette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
(Archduke Joseph of Austria)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10]
(Infanta Maria Louisa of Spain)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Maria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작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Elisabeth Marie, Princess Otto of Windisch-Graetz)
1883년 9월 2일 1963년 3월 16일 빈디쉬그라츠의 오토 공
슬하 3남
레오폴트 페츠네크
슬하 1녀


[1] 벨기에 공주로서의 문장이다.[2] 어머니 마리 헨리에테의 이복오빠이다.[3] 외삼촌 요제프 카를 대공의 아내이다.[4] 당시 루돌프 황태자는 이미 혼담이 두번이나 성사되지 않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5] 루돌프의 할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과 스테파니의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가 친사촌간이다.[6] 루돌프 황태자가 남긴 편지는 스테파니의 자서전에서 공개되었는데 이 자서전에서 스테파니는 남편이 왜 전날까지 끼고 있었던 정부 '미치 카스파'가 아닌 베체라와 자살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7] 엘리자베트가 싫어했던 동서 샤를로트 공주가 스테파니의 고모여서 더욱 며느리를 미워했다는 설도 있다.[8] 에르치는 아버지가 자살한 원인이 스테파니에게 있다고 여겨 어머니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루돌프의 기일 때마다 아버지와 마리 폰 베체라를 "연인"으로써 추모하는 등, 어머니에게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빅엿을 날려댔다. 결국 딸의 만행에 지친 스테파니는 1934년에 에르치의 상속권을 박탈했다.[9] 페르디난도 1세의 5녀이자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외손녀이다.[10] 카를로스 3세의 차녀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