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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2 17:55:22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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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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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Rudolf, Kronprinz von Österreich
파일:Habsburg–Lotaringiai_Rudolf_(1887).png
이름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Rudolf Franz Karl Joseph)
출생 1858년 8월 21일
오스트리아 제국 락센부르크
사망 1889년 1월 30일 (향년 30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메이얼링
배우자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1881년 결혼)
자녀 장녀 엘리자베트 마리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
어머니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형제 조피, 기젤라, 마리 발레리
서명 파일: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svg
파일:Mayerling_10.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불행한 어린시절2.2. 악화되는 갈등2.3.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갈등의 절정2.4. 마리 폰 베체라의 등장, 일탈의 시작2.5. 비극으로 끝난 사랑
3. 가정사의 비극4. 가족 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황태자. 프란츠 요제프 1세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셋째이자 장남이다.

2. 생애

2.1. 불행한 어린시절

1858년 8월 21일 오스트리아 제국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외아들로 태어났다.

루돌프의 친할머니인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가 태어나기 1년 전에 그의 큰누나 조피[1]가 부모와 동행한 헝가리 왕국 여행 중 장티푸스에 걸려 2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정신을 놓은 엘리자베트 대신 루돌프와 루돌프의 작은누나 기젤라를 데려가 키웠다. 시집살이로 힘겨워하던 엘리자베트는 큰딸을 잃고 우울증이 심해져 차녀와 아들까지 그냥 할머니가 키우라고 내버려두고는 아이들에게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 때문에 기젤라와 루돌프는 친할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친손주들의 양육을 담당한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가 장차 황제가 될 몸이라는 이유로 7살 때부터 군대식 보육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루돌프가 받은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총소리에 놀라 기상하기, 차가운 눈밭 걸어가기, 찬물 끼얹기, 루돌프 혼자 외진 곳에 두고 알아서 집까지 돌아오게 하기 등 7살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사실상의 아동 학대였다.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황제로서 격무에 시달렸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는 여행을 빌미로 바깥만 나돌았기에 그 사이에서 루돌프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받지 못한 채 홀로 할머니로부터 후계자 교육이라는 이름의 아동 학대에 시달렸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2살 터울의 작은 누나 기젤라와의 우애만이 힘이 되어 주었다.

뒤늦게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교관이 나가지 않으면 내가 집 나간다!"라고 강력히 항의해, 그런 아내에게 탈탈 털린 프란츠 요제프도 이를 수락하여 조피 대공비를 설득해 교관을 좀 더 관대한 사람으로 뽑아주었다.

2.2. 악화되는 갈등

루돌프가 장성해 황태자가 된 후에도, 상황은 그다지 호전되지 못했다. 가정에 소홀한 워커홀릭이면서 할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마마보이 아버지와는 대화할 시간이 극히 적어서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해 갈등은 깊어졌던 것이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역시 궁정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한 정신이 불안정해진 관계로, 부자 관계를 조정해보려는 노력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알아서 해라' 하는 식으로 방관하며 자신의 심신을 달래고자 도피성 여행이나 다녔다. 자연히 부자간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향이라도 같았으면 모르겠지만, 부왕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친독파에 완고한 전제주의 군주였던 반면 루돌프 황태자는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적 견해도 달랐던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잘못했다는 얘기도 많은데 사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시집왔을 때부터 어머니 조피 대공비와 고부갈등이 있었던 엘리자베트를 위해주거나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중재하기는커녕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거니 당신이 참으시오."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였다. 아들이 저렇게 우유부단하게 굴었기 때문에 조피 대공비는 어린 며느리에게[2]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킬 수 있었고,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가정에 진절머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엘리자베트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나 조피 대공비 역시 문제가 많았으니, 루돌프의 인생 전반부는 누구 한 사람만 탓할 것 없이 집안 어른들이 죄다 문제였다 한 마디로 정리된다.

2.3.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갈등의 절정

파일:Stefanie_en_Rudolf.jpg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딸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의 루돌프 황태자와 외향적인 성격의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성격 차이로 많이 부딪혔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극심한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았지만 항상 며느리를 무시했으며(시씨는 처음부터 루돌프와 스테파니의 결혼을 반대했다) 당시에는 신생 왕국 벨기에의 공주였기에 합스부르크 황실의 며느리로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여겨져서 황실에서도 겉돌았다.[3]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 사이는 루돌프 황태자와 프란츠 요제프 1세와의 사이만큼이나 악화되었다.[4]

2.4. 마리 폰 베체라의 등장, 일탈의 시작

파일:Baroness_Mary_Vetsera.jpg
마리 폰 베체라 여남작

이렇게 아버지 프란츠의 가혹하고 억압적인 세뇌 교육과 어머니의 무관심, 원치 않은 정략결혼에 신물이 난 루돌프는 자신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던 아내와 어린 딸에게 관심을 끊고 어머니처럼 방황하다가 라리쉬 백작 부인에게서 알빈 폰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 알렉산드린 폰 베체라 여남작(Marie Alexandrine Freiin von Vetsera, 1871년 3월 19일~1889년 1월 30일)'을 소개받았다.

라리쉬 백작부인은[5]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친정오빠 루트비히 빌헬름(1831년 6월 21일~1920년 11월 6일)이 귀천상혼해서 얻은 딸로 루돌프 황태자의 사촌이었다. 이 라리쉬 백작부인의 주선으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사귀기 시작했다.

아무튼 마리와 사랑에 빠진 황태자는 당시의 교황 레오 13세에게 '스테파니 황태자비와의 혼인무효[6]를 인정해달라'는 부탁을 했고[7] (당연히) 레오 13세는 미친 소리 말라며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문제는 레오 13세가 이 사실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말해버렸다는 것이다.[8]

2.5. 비극으로 끝난 사랑

격노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돌프 황태자를 불러내서 그의 면전에서 "너 같은 놈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 제발 가정에 충실해라!!!"라고 한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9]

결국 어릴 적부터 축적되어 왔던 각종 스트레스와 분노, 외로움이 한 순간에 쏟아져 나오면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함께 사냥별장이 있는 메이얼링으로 밀월여행을 가서 마리를 죽인 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동반자살했다.[10] 일종의 정사(情死). 이때 루돌프의 나이는 30세였고 마리 폰 베체라의 나이는 겨우 16세.[11] 이 동반 자살 사건은 이후 '마이어링 사건'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루돌프는 외도가 잦았던 탓에 정부가 많았고, 그 중 미치 카스파(Mizzi Kaspar, 1864년~1907년)라는 창부와 인간적으로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미치 카스파가 그의 동반자살 제안을 거절하자 대타로 베체라와 함께 자살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루돌프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루돌프의 머리에 난 총상 근처에 화상이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는 루돌프가 직접 머리에 총구를 대고 총을 쏘지 않았다(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사람이 총으로 루돌프의 머리를 쏴서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저 두 사람의 증언과는 별개로 피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 미사가톨릭 교회에서 허락해 준 점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큰 죄악으로 여겨서 당시 교회법은 자살자에 대한 장례 미사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12] 그래서 실제로는 루돌프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오스트리아 황실이 가톨릭 교회에 극비리에 제시하고 이를 수용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대외적으로 황태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황실의 명예 문제로 끝날 리가 없기 때문에 비밀로 덮었다는 설이다. 살해의 배후는 제각각으로, 루돌프의 즉위를 반대하는 황실 내 보수파, 혹은 황실을 증오하는 공산주의 세력 등이 후보에 있다. 다만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 자살이 아니라 병사로 보아 장례 미사를 허용했기 때문에, 장례 미사가 거행된 것이 피살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아내 스테파니는 루돌프의 사후 11년 후인 1900년에 헝가리의 귀족과 재혼했다. 제국의 전 황태자비가 일개 귀족과 재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레오폴드 2세와 전 시가인 오스트리아 황실 모두 곤혹스러워 했지만 스테파니가 루돌프 때문에 워낙 고생을 많이 한 데다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국 결혼을 허락했고, 스테파니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고 1945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3. 가정사의 비극

※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은 ☆ 표시
상단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라는 별표시가 꽤 많다는 걸 봐도 알겠지만, 당대 합스부르크 황가의 비극은 루돌프 황태자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황태자에게는 그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미 루돌프 황태자 이전에도 여행에 동행했던 큰딸 조피가 어린 나이에 병사한 걸 보아야 했으며, 이름뿐인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던 남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막시밀리안은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고, 실제로 부고를 들은 조피 대공비는 충격을 받고 칩거하다 죽었다.

제수씨인 벨기에 공주 샤를로트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편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미쳐버리는 바람에 친정오빠인 레오폴드 2세[15]라는 말종의 명령으로 감금당한 채 60년 가까이 살다 외롭게 죽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을 황위에 앉힌 어머니를 배려하느라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방치하는 바람에 부부 사이가 소원해졌고, 여기저기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엘리자베트 황후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의 칼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

막시밀리아노 1세 뿐만 아니라 또다른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 역시 위장병으로 일찍 사망했으며, 루돌프 황태자 사후 후계자로 낙점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역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거하기 2년 전에 사라예보에서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바람에 늙은 황제는 다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황실의 가족사도 그렇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공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이미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후계자들을 연이어 잃게 되자 본래는 황제가 될 일이 없었던 방계 황족을 황제이자 왕으로 만들어야 했고,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멸망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불행한 황제였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프란츠 2세
(Francis II)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of Bavaria)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Duchess Elisabeth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피우스 아우구스트
(Duke Pius August in Bavaria)
아렌베르크의 아말리 루이제 공녀
(Princess Amalie Louise of Arenberg)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
(Elisabeth Marie, Princess Otto of Windisch-Graetz)
1883년 9월 2일 1963년 3월 16일 빈디쉬그라츠의 오토 공
슬하 3남
레오폴트 페츠네크
슬하 1녀
파일:Archduchess_Elisabeth_Marie_of_Austria.jpg
엘리자베트 마리 여대공

아내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정식 이름은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에르치" 폰 외스터라이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특이하게도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하여 사회주의자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붉은 대공비 또는 붉은 황녀.

엘리자베트 마리는 인생사가 참으로 다이나믹한데 오토 추 빈디슈그래츠 남작에게 반해서 결혼시켜 달라고 했는데, 이 오토라는 남자는 약혼자도 있던 사람이라 당연하게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령에 의해 반강제로 결혼한 엘리자베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토는 대놓고 창녀[16] 바람을 피우는 등 아내의 심기를 뒤집어놨고, 결국 엘리자베트는 이혼 신청을 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적십자 간호부로서 병사들을 간호하는 역할로 모범을 보였으며, 오토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망하면서 잠시 굶기도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다. 이때 자녀들의 양육권 분쟁이 있었는데 사실 오토나 엘리자베트나 둘 다 딱히 아이들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엿먹이기 위해 이혼소송이 걸리게 된다. 이때 사회민주당원들이 이혼 소송에서 도와줘서 사회당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직접 입당, 연애도 레오폴트 페츠네크라는 평민 사회주의자와 했다.[17] 귀천상혼으로 고생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생각하면 아이러니.

정작 연애기간에 비해 결혼이 늦었는데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페츠네크가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가서 결혼은 만나고 한참 뒤인 27년 후 1948년에 했다고 한다. 이후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인생사는 엘리자베트 마리 문서로.

5. 여담



[1]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의 맏이이자 장녀. 풀네임은 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마리아 요제파(Sophie Friederike Dorothea Maria Josepha).[2] 원래 조피 대공비가 며느릿감으로 낙점한 것은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였으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엘리자베트에게 반해 고집을 부려 결혼했다. 결혼 당시 엘리자베트는 16세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고 시골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피 대공비가 보기에 황후의 재목은 아니었다.[3] 그런데 스테파니 황태자비의 어머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손녀인 마리 헨리에테였기에 사실 격이 안 맞는 것도 아니었다.[4]루돌프의 아버지를 예를 들었는지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자.[5] 본명은 마리 루이즈 라리쉬 폰 멘니히(Marie Louise Larisch von Moennich). 문제의 마리 폰 베체라를 몰래 빼돌려 루돌프와의 불륜을 적극적으로 돕고 은폐하는 대가로 수입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루돌프의 자살 이후 둘 사이를 이어준 것이 들통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쫓겨나고 사교계에서도 매장당했다. 말년에는 고모 엘리자베트 황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황실 이야기를 팔며 빈곤하게 살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6]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7] 루돌프와 스테파니는 더 이상 서로를 찾아가지도 않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파탄이 나 있었다.[8] 물론 교황이 루돌프를 의도적으로 궁지에 몰려고 그런 건 아니고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하고 상담한 정도였다.[9] 심지어 신임 대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는 황태자가 경의를 표하러 나오자 돌아서버렸다고 한다.[10] 이 때문에 장례식 때 공개된 루돌프의 사진(흑백 사진이고 평온한 표정이라 충격은 덜하지만, 그럼에도 시신 사진이므로 클릭 주의)을 보면 시신의 머리에 있는 총상의 흔적을 붕대로 가려서 장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11] 베체라는 사후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45년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에 관이 파헤쳐졌고, 이 때에 두개골에 총상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확한 진상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녀의 유골을 누군가가 훔쳐가는 일이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12] 1983년부터는 자살한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을 수용하여 자살자에 대한 장례미사가 허용되었다.[13] 루돌프의 누이들 중 그나마 가장 평온한 삶을 살며 장수했다. 16세에 정략결혼한 10세 연상의 남편과도 원만히 해로했고, 4명의 자녀들도 어느 하나 요절하지 않고 잘 자랐다.[14] 언니와 달리 한참 처지는(그렇다고 마냥 처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게 남편인 프란츠 잘파토어 대공 역시 같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출신이었다. 남편의 가문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분가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토스카나 가문으로 프란츠 잘파토어의 조부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였고 백부는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였으며 어머니도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였다. 망국의 왕족인데다 그마저도 군주의 자녀가 아니라 황제의 딸인 마리 발레리에 비하면 처지는 신분처럼 보이는 거지 남편 역시 황실의 혈통을 적통으로 잇고 있었던 만큼 귀천상혼은 아니었다.) 신분의 남편과 연애 결혼을 했다. 더 좋은 조건의 신랑감이 정략 결혼 상대자로 내정된 상태라서 반대가 심했지만 마리 발레리를 유독 편애한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덕분에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고 루돌프 사망 1년 후 결혼해 그렇게 결혼한 남편과 10남매를 낳고 잘 사는 듯했다. 그러나 말년에 남편이 외도를 하고 사생아를 낳아 장인의 이름인 '프란츠 요제프'를 붙여주기까지 하자 가문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고, 50대 중반에 병사했다.[1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콩고 자유국을 식민지도 아닌 개인 사유지로 삼아 지옥으로 만들고 잔인한 착취와 학살을 자행한 끔찍한 인간 폐기물이다.[16] 마리 지글러라는 사람으로 오페라 가수라는 설도 있다.[17] 페츠네크는 심지어 고아였다. 즉 오스트리아 제국이 살아 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결혼인 셈.[18] 유럽의 아동심리학자들은 이 사람의 인생을 아동교육의 부정적 사례의 집합체라고 평가할 정도다.[19] 친불파인 루돌프는 반프랑스 성향의 빌헬름 2세를 극혐해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다 루돌프가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인게 거슬려서 빌헬름 2세도 루돌프 사후 암살설의 배후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20]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는 정치적 성향도 똑같고 평생 서로만을 사랑한 금슬 좋은 부부였다. 엘리자베트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란츠 쪽에서 엘리자베트를 일편단심 사랑했지만 어머니 조피의 시집살이를 막지 않고 무조건 인내만을 강요하는 프란츠 본인의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태도, 정반대의 정치 성향과 성격 차이로 인해 루돌프의 자살 사건까지 화해도 못한 채 거리를 두었다.[21] 빅토리아와 아우구스타의 경우 빅토리아의 교육이 잘못되었고, 엘리자베트와 조피의 경우 누가 봐도 조피의 교육이 일방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조피가 양육권까지 빼앗고 허약하고 어린 아이였던 손자에게 도를 넘는 군사적 훈련을 시켰기 때문.[22] 하지만 평생토록 정치적 사상 차이로 대립하며 원수 수준의 악연을 유지한 빅토리아와 빌헬름 2세 모자와 달리, 루돌프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심각한 아동학대식 교육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심어준 원흉인 아버지와 친할머니를 원망했지만 본인을 키워준 할머니를 더 따랐다.[23] 아버지랑 아들이 워낙 오래 살아서 그렇지 프리드리히 3세는 손주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