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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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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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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

1. 북부 프랑스 침공작전 (1337~1340)
1.1. 가스코뉴 침공과 영독동맹 (1337)1.2. 사우샘프턴 습격 (1338)1.3. 헨트 민중 봉기 (1338)1.4. 안트베르펜 상륙 (1338)1.5. 라 카벨 대치 (1339)1.6. 투르네 포위전 (1340)1.7. 슬로이스 해전 (1340)1.8. 2차 투르네 포위전 (1340)
2. 브르타뉴 내전 (1341~1344)
2.1. 낭트 포위전 (1341)2.2. 엔봉 포위전 (1342)2.3. 반 포위전 (1342)2.4. 캥페르 포위전 (1344)
3.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5~1348)
3.1. 오베로슈 전투 (1345)3.2. 캉 포위전 (1346)3.3. 블랑슈타크 전투 (1346)3.4. 크레시 전투 (1346)3.5.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6)3.6. 라 로슈데리앙 전투 (1347)3.7. 칼레 포위전 (1347)3.8. 흑사병 (1348)3.9. 헨트 포위전 (1348)
4.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56)
4.1. 칼레 습격 (1350)4.2. 몽라벨 습격 (1351)4.3. 모롱 전투 (1352)4.4. 생앙토냉 포위전 (1353)4.5. 레글 습격 (1354)4.6. 나르본 습격 (1355)4.7. 베릭 포위전 (1356)4.8. 루앙 습격 (1356)4.9. 푸아티에 전투 (1356)
5.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브레티니 조약 (1357~1360)
5.1. 렌 포위전 (1357)5.2. 아를뢰 습격 (1357)5.3. 파리 시민 봉기 (1358)5.4. 멜로 전투 (1358)5.5. 파리 포위전 (1358)5.6. 런던 조약 (1359)5.7. 랭스 포위전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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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부 프랑스 침공작전 (1337~1340)

1.1. 가스코뉴 침공과 영독동맹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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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프랑스 왕이 가스코뉴에 있는 잉글랜드 왕의 영토를 몰수하자,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정당하게 소유했고 자신도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한 바 있는 가스코뉴의 땅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에게서 단호한 답변만 돌아왔고 사절단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그래서 프랑스 왕은 가스코뉴에 강력한 군대를 보내 몇몇 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유린하고 점령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었다. 당시 가스코뉴의 사령관은 용감하고 노련한 훌륭한 기사 올리버 잉햄 경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다해 프랑스군에 잘 맞섰다.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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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불태우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와 그의 동맹인 저지대 군주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 저지대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13세기부터 이미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1330년대 초부터 저지대 지역 전체가 왕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상서성(Chancery) 관료들의 급발진은 프랑스에 호의적인 군주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1337년 2월 필리프가 프랑스와 저지대 공국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하자 불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명목상 봉신인 캉브레 주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주교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저지대 군주들은 필리프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공국에 간섭할 빌미를 주기는 싫었으므로 대신 프랑스 왕의 맹렬한 적이자 에노 백작의 사위인 잉글랜드 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편 에드워드는 1337년 초까지만 해도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할 계획이었지만, 의회는 언제라도 잉글랜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그렇게 멀리 떠나있으면 위급할 때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렇게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1337년 8월 발랑시엔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된 사절단이 저지대 군주들과 독일 황제가 동맹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왕의 고문들은 과거 에드워드 1세가 독일인들에게 당한 배신을 상기하며 그들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에드워드는 무시했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며 곧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에 상륙해서 11월 30일까지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전비 조달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지연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기는 했지만 당장 영불해협을 넘나드는 함대를 어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에게 20만 파운드를 바치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이 지연되면서 12월부터는 에드워드가 독일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27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해 의회에서 승인된 약 5만 파운드의 전쟁세는 전부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에드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양모에 부과된 관세뿐이었다. 양모 관세 수입은 평시에는 13000파운드였지만 에드워드 1세 시절에 이미 의회의 승인을 받고 6배까지 늘린 전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완벽한 계획이 준비돼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 전역에서 양모 3만 자루를 최저 가격으로 징발한 뒤, 작년의 수출금지령으로 가격이 폭등한 양모를 왕실과 계약을 맺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지대 도시들에 가져가 비싸게 팔아넘기며, 그 수익의 절반을 챙기는 대가로 20만 파운드가 마련되는 즉시 왕에게 대출한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간편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잉글랜드 농촌의 소작농들과 지주들은 조금 낮은 가격이지만 양모값을 받고, 무역상들은 큰 이익을 얻으며, 외국인들만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민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1] 양모 징발과 운송이 지연되자, 조급해진 왕실 관료들은 저지대에 양모 1만 자루가 도착한 즉시 모든 양모를 거둬서 현지 상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당장 필요한 27만 파운드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대부분 그저 행정 실무를 익힌 법학자나 신학자들이라 상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호구만 잡히고 4만 파운드밖에 못 벌었다. 수출금지령 이전 저지대에서 잉글랜드 양모 시세는 자루당 6에서 10파운드 사이였으니 최젓값도 못 받은 것이다.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면서 남은 2만 자루를 받지도 못하게 됐고 정부의 신용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필리프는 독일에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이나 프랑스 북부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했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최신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337년 9월 프랑스 정부 고문들은 11월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라 확신했고, 분노한 왕과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군사를 소집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7월부터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이제야 간신히 보르도 포위전을 시작한 프랑스 남부군은 북부 전선에서 왕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군한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대담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에드워드의 동맹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1.2. 사우샘프턴 습격 (1338)

파일:hywech14.jpg
경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며 아마도 이제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 왕은 짐의 가스코뉴 땅을 부당한 이유로 몰수함으로써 불법적이고 교활한 방식으로 약탈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사기와 불의에 만족하지 않고 짐의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거대한 함대와 수많은 전사를 모아 왕국의 영토와 국민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이제는 자신의 힘이 주님께서 금하신 혐오스러운 계획을 완수하기에 충분하다면 이 세상에서 영어를 완전히 제거할 작정이다.
에드워드 1세의 1295년 의회 소집장[2]
주님의 도우심으로, 상기한 원정군이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할 경우, 이는 전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의 이름과 공로로 이루어질 것이며 잉글랜드 왕이 가진 모든 토지와 권리는 상기한 공작에게 주어져야한다는 데 동의한다. 잉글랜드의 모든 귀족과 다른 세속인들이 가진 토지와 권리는 노르망디의 교회와 남작과 도시들에 주어질 것이나 교황과 로마 교회에 속한 토지와 권리는 몰수되지 않고 온전히 남겨질 것이다.
또한 국왕은 특히 친구와 동맹들에게 신의를 지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왕과 그의 신민들이 과거 전쟁이나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잉글랜드 왕이나 그의 신민들에 의해 빼앗긴 모든 것을 지체없이 완전히 복구하고 반환할 것을 명하며, 이에 국왕 자신, 노르망디 공작, 그리고 모든 노르망디인들이 동의한다.
1339년 필리프 6세와 노르망디 지역 공동체의 조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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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해협과 비스케이 만에서 프랑스 함대는 습격의 강도를 점차 높여나갔다. 1338년 3월에는 칼레에서 출항한 갤리선 함대가 포츠머스에 상륙해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처럼 규모가 큰 해안 도시가 함락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첩보를 통해 이 계획을 이미 2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함대에 징발된 대형 상선들로는 갤리선의 기동력에 대응할 수 없었다.

5월이 되자 필리프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추가로 도착했다. 9월에는 주요 무역 거점 중 하나인 건지 섬을 갤리선 2척을 잃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했고, 10월에는 수천 명의 프랑스군이 솔렌트에 상륙해서 대도시인 사우샘프턴을 습격했다. 수비대가 이를 격퇴했지만 이날 입은 피해로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거의 1년 동안 마비되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이 일련의 습격을 잉글랜드 전역을 점령하고 학살을 벌이기 위한 대대적인 침공의 전조로 받아들였으며, 독일인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겠다는 에드워드의 계획은 갈수록 지지를 잃어갔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걱정하는 일이 계획되고 있었다. 1339년 4월 필리프는 노르망디에서 대형 상선 200척과 선원 수만 명을 징집했다. 이 대규모 함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연 30만 리브르(약 5~6만 파운드) 이상의 비용은 노르망디 지역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교회 성직록을 제외한 모든 토지를 노르망디의 교회와 수도원과 귀족과 도시 정부들에 분배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보르도의 공작 정부는 1337년 프랑스군의 첫 번째 침공을 막아냈지만 이듬해인 1338년에는 이미 저항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군대의 약탈과 파괴로 와인 생산과 수로 운송이 방해받으면서 공작 정부의 주된 수입원인 통행세와 관세 수입이 1/5로 감소했고 이제는 병사들에게 줄 봉급도 없었다. 프랑스 함대가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정하기 시작하면서 바다를 통한 곡물 공급도 어려움을 겪었다.

수백에서 수천 파운드의 빚을 져가며 자비로 군대를 유지한 충성스러운 요새 주둔군 지휘관들이 여름에 시작된 남부 프랑스군의 침공을 또다시 막아냈지만, 이제 잉글랜드와 독일 연합군의 실체를 충분히 파악한 필리프가 11월부터 북부 프랑스에서 모집된 주력군을 가스코뉴 방면으로 돌리자 지난 2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요충지의 요새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기 시작했다.

1339년 7월에는 1만이 넘는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포위했다. 미리 매수된 시민들이 성문을 열면서 프랑스군이 도시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그 뒤에 벌어진 시가전에서 주둔군과 민병대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프랑스군은 도시 내부에 심어둔 배신자들에게 모든 걸 걸었고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위한 공성 장비나 보급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3. 헨트 민중 봉기 (1338)

파일:Battle_of_Courtrai.jpg
"잉글랜드 왕의 호의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플랑드르는 옷감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데 양모 없이는 옷감을 못 만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잉글랜드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
프랑스 대연대기

1328년 플랑드르 백작이 필리프 6세의 도움을 받아서 반란을 진압한 뒤로 플랑드르에서는 반프랑스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공포 통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문제로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336년 8월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 금지령을 내리자 프랑스 정부는 플랑드르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플랑드르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1337년 8월에는 이전의 반란에 대한 배상금을 감면했고 11월에는 전액 면제한다는 특단의 조처까지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1337년 12월 헨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7년 동안 플랑드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될 헨트 상인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를 필두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1338년 1월 헨트 임시정부는 곧바로 도착한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을 벌여,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앙모 수출 금지령의 해제를 약속받았다. 4월에는 플랑드르 백작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격파한 뒤 브뤼헤로 진격해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백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는 1338년 6월 '생계수단을 잃은 헨트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임시정부가 잉글랜드와 맺은 중립 조약을 인정하고 반역죄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1.4. 안트베르펜 상륙 (1338)

파일:Edward_III_becomes_Vicar.jpg
제국의 모든 영주들이 할레 시에 모여 오랫동안 논의한 뒤 잉글랜드 왕에게 말했다. "전하, 프랑스 왕은 제국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고대 법령이 있습니다. 지금 필리프 왕은 캉브레지의 크레브쾨르 성, 아르투아의 아를뢰 성, 그리고 캉브레 시를 소유하고 있으니, 우리의 명예를 위해 황제의 동의를 구해주십시오."
그 후 황제의 칙령이 공개적으로 낭독되었고, 이로써 잉글랜드 왕은 황제의 대리인이자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모든 신민에게 법과 정의를 집행하거나 금과 은으로 돈을 주조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38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파기된 뒤 남은 양모 2만 자루를 징발하겠다는 왕의 요청을 승인했고, 7월 22일 에드워드는 결국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드워드를 맞이한 저지대 군주들은 거의 반년 동안 징발된 양모가 3000자루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8월부터 전쟁세 평가 금액을 기준으로 해서 헌드레드마다 양모 할당량을 부과한다는 특단의 조처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돈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동맹들에게 약속한 보상의 일부라도 지불하기 위해 대관식 왕관을 저당 잡히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슬슬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치솟은 저지대 군주들은 황제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황제 자신은 필리프와 협상 날짜까지 잡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한 에드워드는 12000파운드를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 황제에게 약속한 돈의 1/5인 60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다행히 기분이 풀린 황제는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프랑스 침공은 이듬해 7월로 예정되었다.

1.5. 라 카벨 대치 (1339)

파일:hywnf1339.jpg
추기경이 대답했다. "프랑스는 폐하의 왕국의 모든 힘을 동원해도 끊을 수 없는 비단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 마태오 축일 전야 에드워드 왕은 기치를 들며 중장병 12000명을 이끌고 출정해 프랑스 왕의 도시와 성들을 가는 곳마다 불태우기 시작했다. 매우 어두운 밤, 왕의 사법관인 제프리 스크롭 경이 추기경을 높은 탑의 꼭대기로 안내했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15리그 내의 모든 장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 프랑스를 둘러싼 비단실이 끊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추기경은 두려움과 슬픔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쓰러졌다.
제프리 베이커의 연대기
프랑스인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논쟁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국왕이 자신의 왕국을 공격한 침략군에게 도전장을 보냈으면서도 전투 대형을 이룬 적들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적들과 맺은 약속을 믿고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일 뿐이며 만약 운이 따르지 않아서 국왕이 전투에서 진다면 왕국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기더라도 잉글랜드 왕과 그의 동맹들을 상대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적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과, 현자이자 위대한 점성가인 시칠리아 왕의 예언에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불안에 빠졌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프랑스 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원했지만, 너무 많은 반대 의견에 설득되어 다음 날 전군을 주둔지로 철수시켰다. 그는 매우 낙심했지만 고문들을 그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고 용감하게 진군해서 적들을 왕국 밖으로 쫓아냈으며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면 이번과 같은 원정을 아주 많이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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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이 되자 에드워드의 재정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추가로 징발된 양모 1만 자루는 이미 작년에 진 빚의 일부를 갚는 데 전부 사용되었다. 올해는 추밀원 의원인 링컨 주교와 솔즈베리 백작과 더비 백작을 보증인으로 내놓는 대신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엄청난 이자율로 다시 돈을 빌렸지만 7월로 예정된 프랑스 북부 침공에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출정 예정일을 이미 넘긴 8월, 파산 직전에 몰린 에드워드는 마지막 남은 체면도 벗어던지고 저지대 군주들 앞에서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나가서 프랑스군과 싸우다 명예롭게 죽을 생각이라며 협박했다. 저지대 군주들이 마지못해 이를 말리자 에드워드는 그들에게 왕실 가신단 기사 여섯 명을 인질로, 그리고 남작 여섯 명과 백작 네 명과 주교 세 명을 보증인으로 한 채권을 강매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고도 돈이 부족했다.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를 구원한 것은 킹스턴의 부유한 양모상이자 왕의 총신인 윌리엄 드 라 폴이었다. 이미 지난 1년 동안 왕실보다 높은 신용으로 10만 파운드 이상을 대출해서 에드워드에게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디선가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구해서 빌려준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는다.

9월 20일 연합군은 드디어 발랑시엔에서 출정해 캉브레지로 진군했다. 원정을 오래 지속할 여력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여 격멸하기 위해 일부러 프랑스군이 주둔한 성채와 마을들을 점령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연합군의 두 배 이상인 25000명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지만[3] 에드워드의 희망과 달리 캉브레지의 주둔군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았다. 그는 에드워드의 파멸적인 재정 상태를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독일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캉브레지에서 한발 물러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드러내면 연합군을 간단히 분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필리프가 꼼작도 하지 않자 조급해진 에드워드는 10월부터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진입했다. 결국 10월 14일 양측 군대는 페론 시 앞에서 대치하지만, 에드워드는 애초에 필리프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야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곳에서 연합군이 패배한다면 저지대 군주들의 영지로 후퇴하기 위해 캉브레지를 통과하는 동안 사방에서 튀어나온 프랑스 주둔군과 친프랑스파 민병대들에게 신나게 사냥당하다가 주력군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날 밤 연합군은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신속하게 후퇴한다.

프랑스군을 따돌린 연합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마행군(chevauchee)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병과 승마보병들이 소부대로 흩어져 행군하면서 쓸모 있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며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전술이었다.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당대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의 중심지에 가까운 곳에 1만여 명의 적군이 침입해서 기마약탈을 자행하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필리프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령과의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원래 에드워드는 장인인 에노 백작의 동생의 사위의 영지인 기스 시의 다리를 통해 우아즈강을 건널 생각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도시 수비대는 연합군을 통과시키기를 거부했다. 이에 연합군은 근처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면서 우아즈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다가 10월 21일 저녁 에노 백령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이곳은 방어와 후퇴에 모두 유리한 완벽한 위치였다.

숲과 도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참호 뒤로 웨일스 경보병들이 배치되었고, 양 끝에는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경보병들 뒤로는 말에서 내린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배치되었고, 독일 맨앳암즈들은 두 번째 열과 후위에 배치되었다. 7년 전 더플린 무어할리돈 힐에서 몇 배는 많은 스코틀랜드군을 전멸시켰으며 7년 뒤 크레시에서 프랑스의 수많은 기사와 제후들을 학살할 때와 똑같은 진형이었다.

반나절이 지나서 도착한 프랑스군도 전투 대형을 이룬 채 연합군과 대치했다. 이후 지휘본부에서 왕실 고문들과 귀족 지휘관들은 하루종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안전하게 우회할 공간은 없는데 정면으로 공격하면 참호와 경보병들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양쪽에서 화살세례를 받아 전멸할 게 분명하고,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더라도 뒤에서 대기중인 맨앳암즈들에게 얻어터질 것이다.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해도 연합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기 전에 미리 만들어둔 탈출구로 후퇴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이 몇 달만 기다리면 에드워드는 파산하고 독일인들은 협상 자리에 나올 것이다. 하지만 국왕이 자신의 왕국을 약탈하고 불태운 적들 앞에서 두 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면 바보나 겁쟁이로 보일 것이다.

결국 필리프는 왕실 고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퇴 명령을 내린다. 전략적으로는 옳은 결정이었지만 북부 프랑스의 귀족과 성직자와 평민들은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들의 왕이 겁쟁이라고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왕의 옆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간신들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이렇게 프랑스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비단실 중 하나가 끊어졌다. 그리고 프랑스 동부의 소도시 라 카벨은 크레시처럼 유명해질 기회를 잃었다.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국경을 넘어 저지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인 10월 13일에서 28일 사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가 왕의 대리인으로서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 앞에서 에드워드의 북부 프랑스 침공 작전의 끔찍한 현실을 보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왕실이 진 빚은 30만 파운드가 넘으며 이걸 다 갚으려면 그동안 거의 1년에 한 번씩 걷은 전쟁세를 7번은 걷어야 할 지경이었다.

세금을 추가로 걷어서라도 빨리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점에는 양원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하원은 자신들이 동의해도 지역민들은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경고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지불된 징발 명령을 전부 취소하고, 앞으로 정부 도급업자들이 징발한 물건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반드시 체포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요구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를 받아들였고, 라 카벨에서 양군이 대치한 사건과 그 결과가 전해지기 직전에 회기가 종료된다.

1.6. 투르네 포위전 (1340)

파일:MapofFlanders.jpg
고귀한 에드워드 왕은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와 모든 플랑드르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플랑드르인들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자신도 프랑스 왕이 부당하게 빼앗아간 릴과 두에 등 주요 도시들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그들에게 제안했다.
플랑드르인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진지하게 논의한 뒤, 잉글랜드 왕이 스스로 프랑스의 왕이라고 선포한다면 자신들은 프랑스 왕의 신하이므로 그를 군주이자 주권자로 받들고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왕국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교황 앞에서 프랑스 왕에게 한 서약이 면제되고 반역죄로 재산이 몰수되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다.
잉글랜드 왕은 이 답변을 들었을 때 좋은 조언과 지도가 절실히 필요했다. 왜냐면 실제로 소유하지 않은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고 문장을 소유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신의 목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플랑드르인들의 지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장단점을 숙고하고 저울질한 끝에, 마침내 그는 프랑스의 문장을 가져와 잉글랜드의 문장과 1/4씩 나눠 붙이고 스스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플랑드르인들이 제시한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였으며 프랑스 왕으로서 왕실에 대한 모든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의 이름으로, 플랑드르 주민 공동체와 지역의 세 대표 도시인 헨트, 브뤼헤, 이퍼르의 명망가들에게, 그들이 법과 정의를 검토하고 백작에게 스스로 해야 할 의무를 다하도록 조언함으로써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 상속인이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요청한다.
법은 의로운 국민들의 지지 없이는 지켜질 수 없으므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은 또한 군주이자 주권자로서 플랑드르 주민 공동체에게 만약 백작이 그들의 조언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주님과 선한 법에 충성함으로써 자신들의 왕이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면 국왕은 과거 프랑스 왕들이 플랑드르의 많은 영토를 부당하게 몰수함으로써 공동체에 입힌 피해를 복구하고 주민들의 특권을 보장하며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히 기억될 혜택을 선물할 것이다.
1340년 잉글랜드와 저지대 동맹의 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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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트 시민 정부의 지도자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는 플랑드르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플랑드르 백작을 포로로 잡고 프랑스 왕마저 굴복시킴으로써 지역의 생계수단인 양모 공급을 재개하는 위업을 이룬 뒤로 적어도 직물 산업의 중심지이자 대도시인 헨트, 브뤼헤, 이퍼르에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도시 유력자들 중에는 그를 두려워하거나 질투하는 이들이 많았고, 중립 조약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헨트에서 파견된 행정관들에게 내정간섭을 당하고 있는 중소도시 시민들로서는 그가 사실 프랑스 왕과 다를 바 없는 압제자가 아닌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플랑드르 백작은 한동안 바지사장 역할에만 충실하며 시민 정부의 지시에 얌전히 따랐지만 1339년 1월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반란 계획이 들통나자 재빠르게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는 비록 이름뿐일지라도 플랑드르의 정당한 영주였으므로 이 사건으로 시민 정부의 정치적 명분과 권위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아르테벨데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플랑드르의 지배자로서 더 많은 성과를 내면서 권력을 강화해야 했다. 1339년 여름 내내 그는 필리프 4세 시절 왕실에 몰수당한 도시 중 하나인 근처에 병력을 배치한 채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파리에 망명 중이던 플랑드르 백작을 돌려보내 아르테벨데의 반대파를 규합하도록 했지만 백작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붙잡혀 헨트 시민 정부의 버프용 토템으로 복귀했다.

10월 잉글랜드와 독일 연합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에 침입하자 아르테벨데는 필리프에게 사절을 보내 플랑드르의 옛 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서 릴을 점령하겠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연합군의 북부 프랑스 침공 작전이 사실상 실패로 끝난 뒤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연합군에 합류하는 대가로 원하는 보상을 정리해서 12월 말 에드워드에게 제출했다.

요구사항의 핵심은 에드워드가 스스로 프랑스 왕이라고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리프 4세 시절 교황을 증인으로 맺은 조약에 따르면 플랑드르인들이 프랑스 왕에게 반역할 경우 교황에게 성무 금지 명령을 받고 아비뇽에 예치된 자금을 몰수당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불평등 조약을 취소하고 왈롱 플랑드르의 세 도시를 포함한 고대의 특권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프랑스의 왕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하고 1340년 1월 26일 헨트 시의 광장에서 스스로 프랑스 왕이라 선포한다. 그리고 도시 행정관들과 귀족들의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으로서 시민 정부와 맺은 조약의 내용을 발표했다.

한편 에드워드와 시민 정부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반쯤 잊혀지고 있었던 플랑드르 백작은 프랑스에 두고 온 병든 아내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2월이 되자 에드워드는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프랑스 왕으로서 그는 성왕 루이의 선한 법과 관습을 복구할 것이며, 필리프 4세 이후 왕실이 신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온 화폐 가치 절하를 중단할 것이고, 프랑스 왕들은 앞으로 언제나 왕국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조언을 들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필리프는 에드워드의 포고문의 사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나 반역죄로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플랑드르의 도시들에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는 동시에 왈롱 플랑드르의 세 도시 중 두 개는 돌려줄 수 있다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4월부터 교황이 플랑드르 백령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린다.

헨트에서 화려한 의식과 함께 프랑스 국왕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에드워드는 이제 파산 직전이었다. 돈을 더 빌릴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약 4만 파운드에 달하는 할부금 납부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세를 승인받기 위해 1월 소집한 잉글랜드 의회에서 하원은 이전까지 있었던 조세 횡령에 대한 조사와 함께 재발 방지를 위한 감사위원회를 임명할 권한을 요구했다.

왕의 대리인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반드시 국왕이 돌아와서 의회와 직접 협상을 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에드워드는 결국 왕비와 어린 왕자와 솔즈베리 백작과 서퍽 백작을 저지대에 인질로 남겨두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빚쟁이들에게 잉글랜드 방문을 허가받는다.

에드워드는 하원이 요구한 감사위원회의 헌법적 의미를 고찰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이전의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였고, 잉글랜드가 프랑스 왕국과 합병되어서는 안 되며 프랑스 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상원과 하원의 청원에도 엄숙히 동의했다. 이에 4월 3일 의회는 약 5만 파운드 이상의 전쟁세를 승인한다.

같은 시기인 4월 초, 에드워드가 없는 동안 저지대와 북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독일, 플랑드르군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투르네로 진격하는 삼로병진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행군 도중 릴에서 출격한 기동타격대의 기습에 지휘부가 궤멸되면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릴은 플랑드르 시민 정부가 연합군에 합류하기 이전부터 이미 프랑스군 지휘부의 관심이 집중된 긴장지대였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무시한 채 충분한 대비 없이 너무 가까이 지나간 것이다. 포로로 잡힌 솔즈베리 백작과 서퍽 백작은 파리의 샤틀레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지대 군주들은 티에라슈에 새로운 프랑스 군대가 집결 중이라는 잘못된 첩보를 믿고 편제가 완료되기 전에 기습하러 간답시고 시간만 낭비하다가 다른 곳에서 소집을 끝낸 프랑스군이 진격해 오자 근처 마을 수십 곳만 약탈한 뒤 후퇴했다.

유일하게 투르네 시에 도착한 플랑드르군은 잉글랜드와 독일 군대의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회군한다.

프랑스군은 5월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순식간에 에노 백령의 수도인 발랑시엔을 포위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근처 마을들을 약탈하러 흩어진 사이 23일 새벽 성문 밖으로 나온 주둔군과 민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주했다.

캉브레지 북부로 후퇴해서 재정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이제 보급로를 위협하는 국경 지역의 요새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고, 플랑드르 시민 정부와 저지대 군주들이 보낸 지원군을 각각 투르네 근처의 스카르프 강과 툰 레베크 근처의 스헬더 강에서 격퇴한 뒤 6월 23일 툰 레베크를 점령하고 부샹으로 향했다.

같은 시기 에드워드 3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가 6월 22일 입스위치에서 출항해 23일 즈윈 강어귀 서쪽에 도착했다.

1.7. 슬로이스 해전 (1340)

파일:BattleofSluys.jpg
전투는 잔혹하고 끔찍했다. 바다 위에서는 후퇴도 도망도 불가능하며 오직 운명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사력을 다해 싸우기 때문에 바다에서의 싸움은 땅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사납고 격렬하기 때문이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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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함대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배를 서로 연결하는 프랑스 전략은 역효과를 냈고,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 해군은 바람과 조류의 이점을 가지고 공격하여 프랑스 함선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망디에서 소집된 함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전투에서 생존한 노르망디 지방 유력자들은 이제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대가로 많은 토지를 분배받기는커녕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의 최전선에서 침략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게다가 크레시 전투를 시작으로 잉글랜드군이 북부 프랑스의 주력군을 오는 족족 야전으로 갈아버리면서 거의 20년 동안 프랑스 왕실은 노르망디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었고, 순망치한으로 일드프랑스의 방위도 크게 약화되었다.

6월 30일, 에드워드 3세는 곧바로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와 플랑드르 지도자들과 만나 새로운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지원할 수 있는 민병대의 숫자를 15만 명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주된 걱정은 자신의 병력이 셸트 강을 통해 진군하는 동안 플랑드르가 공격받을 가능성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두 군대가 구성되었다. 에드워드 자신은 투르네를 포위하는 한편, 로베르 드 아르투아는 생오메르를 공격하고 상황에 따라 칼레까지 진군하도록 했다.

7월 4일, 필리프 6세는 슬로이스 전투의 소식을 듣고 급히 추가적인 군대를 조직했다. 프랑스 전역에 신민소집령이 선포되었고 총 24000여 명의 맨앳암즈가 소집되었다.

1.8. 2차 투르네 포위전 (1340)

파일:Siege of Aubenton (1340).jpg
그렇게 해서 프랑스 왕과 그의 군대는 더운 날씨와 주둔지 근처의 도축장에서 풍기는 악취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의 도시인 투르네를 지켜냈으며, 적의 거대한 군세가 많은 시간과 비용만 소모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과 그의 동맹들은 스스로 프랑스 왕국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프랑스 왕의 눈앞에서 그의 영토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고, 그들이 지역의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를 포위한 채 주변 마을들을 유린한 뒤에야 비로소 프랑스 왕이 휴전을 간청했기 때문에 그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고 파리로 돌아갔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양측 모두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으므로, 이 사건 이후 마을의 선술집에서든 귀족들의 응접실에서든, 진짜 군인이든 또는 그저 스스로 군사적인 문제를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든, 의견이 부딪힐 때마다 많은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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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년 7월 16일경, 로베르 드 아르투아가 군대를 이끌고 아르투아로 향했다.

7월 26일, 필리프 6세의 본대의 도착을 두려워한 로베르는 그 전에 생오메르의 주둔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려 격멸하려 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도발에 결국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와 아르마냑 백작의 군대가 성문을 열고 출격했다. 그러나 아르마냑 백작이 이끄는 중기병 300기가 플랑드르군의 전열을 돌파하고 공황에 빠진 민병대를 추격해 8000여 명을 학살했다. 그런 다음 연합군의 주둔지를 점령하고 귀중한 자원과 장비를 탈취했다. 반면 부르고뉴 공작의 부대는 잉글랜드 부대에게 패배하고 성벽 안으로 후퇴하는 굴욕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날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는 연합군이 입은 피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생오메르 전투)

7월 31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연합군이 투르네를 포위했다. 투르네는 인구 약 2만 명의 상업 중심지로, 74개의 방어탑을 가진 5km 길이의 강력한 도시 성벽으로 보호되었다. 8월 26일과 9월 2일에 투르네 시의 성벽을 직접 공격하려는 연합군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대규모 군대를 가졌지만 연합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대규모 지원군의 도착은 에드워드의 동맹군들 사이에서 내분을 일으켜 결국 휴전 협상으로 이어졌다.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9개월의 휴전을 체결한다.

10월 28일 에드워드는 헨트 시민들에게 보내는 사과문을 써둔 채 몰래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빚쟁이들이 프랑스 왕처럼 갤리선 함대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배를 쨀 수도 없으니 이제 담보를 잡힌 빚만 갚고 나머지는 무시해도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피렌체의 대표적인 은행인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이 10년 이내 모두 파산한다.

문제는 그렇게 도망쳐서 도착한 국내에서도 막대한 액수의 빚만 남기고 사실상 실패로 끝난 원정에 대한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의 불만이 엄청났으며, 의회는 에드워드를 그의 아버지처럼 당장 폐위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거만하고 욕심 많은 도박꾼일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고, 전쟁의 성과를 최대한 잘 포장해서 선전하는 동시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깔끔하게 양보해서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 낸 속도만큼 놀랍도록 빠르게 수습한다.

하지만 그처럼 전통 있는 왕권의 상속인이 아니라 벼락출세자에 불과했던 헨트 상인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의 독재 체제는 대규모 군사작전의 연이은 실패로 사실상 끝이 났으며,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세 주요 도시의 유력자들의 과두정 체제로 서서히 전환된다. 1343년부터 헨트 시는 아르테벨데의 정적들에게 거의 장악되지만 헨트를 견제하기 위한 나머지 두 도시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그는 간신히 권력과 목숨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테벨데는 결국 1345년 5월 헨트 시의 방직공 길드와 축융공 길드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시작된 내전에 휩쓸리면서 7월 17일 방직공 길드의 폭도들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과두제 정부와 플랑드르 민중의 여론 모두 여전히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

2. 브르타뉴 내전 (1341~1344)

2.1. 낭트 포위전 (1341)

파일:Guerre_de_Succession_de_Bretagne_1341.jpg
"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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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장 3세의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포르간의 후계 대결이 발생했다.

장 3세는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조카인 잔을 후계자로 키웠다. 그리고 그녀를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브르타뉴 동부의 친프랑스파 귀족들의 지지를 구했다. 그 결과 공작이 죽은 시점에서 잔과 샤를은 이미 브르타뉴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신하를 자처하며 프랑스 궁정 문화를 애호하는 귀족들이 정작 프랑스 왕실의 합법성을 보증하는 살리카법을 거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으므로 몽포르에게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었다. 프랑스 왕도 자신의 조카의 아내라는 이유로 여성의 계승권을 지지하고 남자 형제 상속인을 반대하며 내전에 개입할 명분을 바로 찾을 수는 없으리라 예상되었다. 관건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몽포르 자신이 브르타뉴 공령의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계산하에 몽포르는 공작이 죽자마자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기습적으로 점령했고 프랑스 왕실이 비로소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8월 중순에는 이미 브르타뉴 전역의 요충지를 대부분 장악했다.

몽포르의 예상대로 필리프 6세는 처음에는 중립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몽포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륙에서 잉글랜드의 새로운 동맹이 생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를 지원해 내전을 조기에 종결하려 했다. 그러자 모든 계산과 노력이 무색하게도 프랑스군이 포위공격을 시작한 지 일주일만인 11월 초 낭트를 점령하고 몽포르를 포로로 잡았다.

2.2. 엔봉 포위전 (1342)

파일:siege_hennebont.jpg
공격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되었지만 수비군은 용감히 저항했고, 포위군은 시체를 쌓으며 뒤로 밀려났다. 프랑스 영주들은 군사들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여러분은 여성이 이룩한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업적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이 용감한 백작부인은 완전무장한 채 전마에 올라타고는, 공격받지 않은 성문에 배치돼 있었던 300명의 중장병들에게 말에 오르라고 지시한 다음, 이 기병대를 이끌고 나가 종자와 하인들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포위군 주둔지에 과감하게 돌격했다. 그들은 눈앞의 모든 적을 죽이며 사방에 불을 질렀고, 곧 진영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장 르 벨의 연대기
남작, 기사, 향사들이 서로 창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하면서 백병전이 시작되자 전투는 격렬해졌고 남자들은 서로의 용기를 시험했다. 몽포르 백작부인은 사자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바닷바람에 녹이 슨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용감히 싸웠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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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 드 몽포르는 사실 몽포르 파벌 중 최약체였고 실세는 그의 아내인 잔 드 플란데런[4]였다. 그녀는 남편이 패배하고 붙잡힌 뒤에도 서부 브르타뉴의 요새화된 소도시 엔봉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1342년 5월 성벽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던 프랑스군은 수비군의 반격에 학살당했다. 블루아 파벌과 프랑스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2.3. 반 포위전 (1342)

파일:Joanna-of-Flanders-History-of-France-Guizot-1869.jpg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 왕이 최근 브르타뉴에 도착해서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샤를 드 블루아 경이 그에게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모든 마을과 도시가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게 필요한 모든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귀족과 평민들 모두에게 소집령을 내려 왕세자를 따라 브르타뉴로 원정을 갈 준비를 하게 했다. 귀족과 평민 모두의 호응이 너무 대단해서 도로와 경작지가 군사들로 가득 찼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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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년 8월부터 잉글랜드가 몽포르 파벌을 지원하면서 뒤늦게 내전에 개입했다.

11월에는 에드워드가 직접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해 브르타뉴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반을 포위했지만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이 브르타뉴 동부에서 잉글랜드 분견대가 벌인 약탈 행렬은 블루아 파벌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었다.

잉글랜드 주력군의 상륙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고, 북부 프랑스의 습한 겨울 날씨와 질척해진 도로가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의 이동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브르타뉴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숫자는 잉글랜드군보다 많았으나 필리프는 이번에도 역시 에드워드와의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1343년 1월 휴전을 체결한다.

이때는 점령지를 전부 탈환한 스코틀랜드군이 국경 지역을 끊임없이 습격하고 있는 등 잉글랜드 측의 상황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프랑스군이 더 불리한 상황이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몽포르 파벌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루브르궁에 연금돼 있었던 장 드 몽포르도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2.4. 캥페르 포위전 (1344)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이후 많은 브르타뉴 귀족들과 일부 노르망디 귀족들이 올리비에 경과 유사한 죄목으로 파리에서 처형당했다. 대표적으로 말레트르와 영주와 그의 아들, 그리고 나고르 영주, 티보 드 몰리옹 경, 그밖의 여러 브르타뉴 영주들과 열 명의 기사와 향사들이 모두 죽었다. 힘과 용맹을 겸비한 기사들인 앙리 드 말레트르와 경, 기욤 바콩 경, 라 로슈테송 영주, 리샤르 페르시 경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하지만 브르타뉴인들의 내전은 계속되었다.

몽포르 파벌에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몽포르 백작부인 잔 드 플랑드르는 엔봉 포위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로 정신이상 증세가 악화되어 일상생활도 불가능했고, 지도자를 잃은 몽포르 파벌은 지리멸렬했다. 몽포르파의 지도부에 속한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이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기 위한 무리한 작전 도중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힌 뒤 휴전 조약을 위반했거나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1344년 5월 블루아 파벌이 브르타뉴 남서부의 주요 도시인 캥페르를 점령하고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으며 포로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후 12월까지 몽포르 파벌의 지도부에서 그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항복했다.

1345년 3월 장 드 몽포르가 프랑스에서 탈출해 잉글랜드로 망명했지만 그때는 이미 브르타뉴 내부의 정치적 기반을 전부 잃은 뒤였다. 1345년 6월 휴전이 끝나자 몽포르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돌아왔으나, 캥페르를 포위했다가 수비군의 반격에 패주하고 엔봉 시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병에 걸려 사망한다.

3.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5~1348)

3.1. 오베로슈 전투 (1345)

파일:Henry, Earl of Derby, at the Battle of Auberoche.jpg
여기서부터는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최고의 모험을 즐긴 더비 백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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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5년 6월 휴전이 끝난 뒤, 더비 백작 헨리가 이끄는 맨앳암즈 500명, 웨일스 경보병 500명, 장궁병 1000명 규모의 지원군이 가스코뉴로 항해한다.

같은 시기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주력군도 알려지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출항한다. 그러나 헨트 시에서 발생한 내전에 대한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는 급하게 슬로이스를 방문해 브뤼헤와 이퍼르의 대표들과 야콥 반 아르테벨데를 맞이했다. 아르테벨데의 몰락이 확정되었지만 새로운 과두제 정부도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유지할 생각이라는 소식에 에드워드는 안심한다. 그러나 7월 22일 다시 슬로이스에서 출항한 함대는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잉글랜드로 포류한다. 결국 원정은 취소되었다.

한편 보르도에 도착한 더비 백작은 8월부터 페리고르의 요충지인 베흐쥬락을 기습해서 주둔군을 전멸시키고 페리고르의 세네샬과 프랑스의 고위 귀족 10명을 포로로 잡은 뒤 지방의 중심 도시인 페리괴를 포위했다. 마침 레스터 성에서 요양중이던 그의 아버지 랭커스터 백작이 사망하면서 헨리는 랭커스터 백작위를 상속받는다.

10월부터 남부 프랑스의 주력군이 소집을 끝내고 진격해오자 랭커스터 백작은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하지만 10월 21일 오베로슈를 포위한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 분견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키고 백작 1명, 자작 7명, 남작 3명,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과 향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왕세자인 노르망디 공작이 지휘하는 본대가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었고 용병들과 현지에서 징집된 민병대를 제외해도 맨앳암즈만 6000명이 넘는 거대한 군세였지만, 짧은 기간에 반복된 일방적인 패전에 남부 프랑스군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노르망디 공작은 그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앙굴렘으로 후퇴한 뒤 11월 야전군을 해산한다.

이로써 남부 프랑스에서는 크레시 전투보다 약간 빠르게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가 시작되었고, 가스코뉴 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왔다.

3.2. 캉 포위전 (1346)

파일:Prise_caen_1346.jpg
이 시기에 국왕은 가스코뉴 원정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그 이유는 노르망디의 유력자인 조프루아 다르쿠르 경의 조언과 청원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원정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며 이렇게 설득했다. "노르망디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곳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정복할 수 있으리란 사실에 저의 목을 걸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적이 없고 프랑스의 모든 기사들은 왕세자를 따라 에귀용을 점령하러 떠났습니다. 폐하, 이 지방은 성벽이 없는 큰 도시들로 가득하고 그곳에서 폐하의 군사들은 앞으로 20년은 봉급을 받지 않아도 족할 부귀를 누릴 것입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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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7월 12일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서 브르타뉴 방면의 동맹인 몽포르 파벌은 전멸 직전이었지만 간신히 숨은 붙어있었고, 가스코뉴 방면은 (전쟁 초기부터 의회에서 지적한 대로) 잉글랜드 본토가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이 있었지만 작년부터 랭커스터 백작이 펼친 활약으로 활로가 열렸다.

따라서 에드워드의 선택지는 이제 네 개였다. 주력군을 이끌고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에 상륙해서 빈사상태인 몽포르 파벌을 확실히 부활시키는 것. 플랑드르에 상륙해서 수많은 도시 민병대와 함께 북부 프랑스를 휩쓸면서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는 것.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남부 프랑스군의 잔당을 빠르게 분쇄하고 남쪽에서의 공격에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은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는 것.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해안 지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노르망디, 플랑드르, 가스코뉴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는 것.

에드워드는 결국 마지막 안을 선택했지만, 출항 직전 플랑드르 전선에서 교란작전을 벌였고 출항 직후 8일 동안 누구도 잉글랜드를 떠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는 등 보안에 철저히 신경썼다.

그러나 필리프는 잉글랜드군의 노르망디 상륙 계획을 예상하고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편집증적으로 깔아놓았다. 설령 첩자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도 당장 파리와 일드프랑스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노르망디 상륙이었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운이 더럽게 없게도 잉글랜드군이 라 우그 인근 해변에 상륙하기 고작 3일 전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체불에 대한 불만으로 탈영했고, 상륙 당일은 용병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민병대 소집 명령이 막 내려진 다음이었다. 얇고 넓게 펼쳐진 방어선이 하루만에 뚫리자 노르망디를 가로지르는 잉글랜드군의 진격을 막을 방법이 더는 없었다.

에드워드는 상륙 후 며칠 동안 군대의 약탈을 금지하고 노르망디의 주요 귀족들과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며 반응을 지켜봤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슬로이스 해전과 그밖의 여러 승리들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유력자들이 가진 잉글랜드군에 대한 두려움과 프랑스 왕실에 대한 실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해안을 따라 넓게 흩어진 프랑스군이 집결하기 전까지 1만도 안 되는 군대로 점령지를 안정화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에드워드는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내기 위해 기마약탈을 자행하며 플랑드르 방향으로 후퇴했다.

1346년 7월 26일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에서 루앙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캉을 점령하고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으며 200여명의 기사와 향사들과 수많은 도시 유력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3.3. 블랑슈타크 전투 (1346)

파일:Eduardo_III_cruzando_el_Somme,_por_Benjamin_West.jpg
프랑스군은 적들이 강둑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맹렬히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잉글랜드군 선발대의 상당수가 강물 위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강을 건넜고 프랑스군은 수많은 시신을 전장에 남긴 채 패배하고 도망쳤다. 곧 후속 부대들이 수레와 짐마차와 짐말을 끌고 아무런 방해 없이 여울목을 건넜다.
고귀한 에드워드 왕이 너무 늦기 전에 길잡이를 찾지 못해 바로 그날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을 이 사건을 의심의 여지 없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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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결국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인 푸아시까지 진군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왕국의 수도이자 기독교 문명의 심장부가 공격받는 초유의 사태에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리프가 급하게 긁어모은 야전군은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이 전부였다. 그는 잉글랜드군과 대등한 전력으로 야전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는 대신 푸아시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고작 하루만에 임시교량을 설치해 센강을 건너 파리 남쪽 교외에 이르렀다. 이에 필리프는 생클루 다리를 부수며 센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용기는 없으나 그렇다고 파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계속 이렇게 추태를 부릴 수도 없었던 필리프는 다시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쳤다. 그리고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서로 입장이 바뀌자 똑같이 허세를 부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적어도 정신승리에서는 에드워드에게 지지 않는 필리프는 발빠르게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랑드르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이제 관건은 필리프의 야전군에 충분한 병력이 모이기 전에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널 수 있느냐였다. 잉글랜드군의 맨앳암즈들은 모두 말에 탔고, 궁수들도 상당수는 승마궁수였으며 나머지는 가볍게 무장했지만 그것은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프는 맨앳암즈와 제노바 용병들의 강행군을 따라올 수 없는 민병대 보병들을 모두 해산했다. 잉글랜드군의 병력이 더 적어서 행군속도에 유리했지만 대신 약탈로 보급을 충당해야 해서 낭비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충분한 전력을 모은 프랑스 주력군에 따라잡히기 고작 몇 시간 전인 8월 24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방어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솜 강을 건넜다.

3.4. 크레시 전투 (1346)

파일:hyw battle of crecy 1346.jpg
라 브루아와 크레시 사이에서 토요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험하고 잔혹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용감한 무훈이 전해지지 못한 채 이곳에 묻혔다. 저녁 무렵이 되어갈 때는 많은 기사와 향사들이 지휘관을 잃고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도망치지 않고 들판을 떠돌며 곳곳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금세 격퇴당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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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8월 24일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너자 필리프는 추격을 포기했다. 마침 플랑드르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두 군대가 합류해서 다시 남쪽으로 역습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즉시 방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 지역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의 결사항전에 플랑드르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잉글랜드군은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8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시작해 오전 중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필리프는 먼저 제노바 쇠뇌수들을 투입해서 장궁병들을 견제하게 했지만, 급하게 행군하느라 대형 방패인 파비스 없이 쇠뇌를 장전하기도 어려운 미끄러운 바닥이라는 악조건에서 교전을 시작한 쇠뇌수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패주한다. 이 모습을 본 필리프와 몇몇 프랑스 지휘관들은 임금이 밀리면 전투를 거부하고 파업하기로 악명이 높은 제노바 용병들이 이번에도 또 배신했다고 오해하고는 쇠뇌수들을 공격해 학살했다.

이제 보병이나 궁병의 지원도 없이 기병만으로 적의 야전 진지를 공격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5번이나 적 앞에서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는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을 필리프와 프랑스 기사들은 그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 전사자 중에는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투로 프랑스의 주력군을 몰살시킨 덕에 시간을 번 에드워드는 다음 침공의 교두보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의 국경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인 칼레를 포위했다.

3.5.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6)

파일:FroissartFol97vBatNevilleCross.jpg
스코틀랜드인들은 매우 용감하고 강인하며 전쟁의 혹독함을 잘 견딘다.
이들은 잉글랜드를 약탈하고자 할 때, 밤낮으로 하루 20~24리그를 행군해서 그러한 전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종군 민간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말을 타는 것이 확실하다. 기사들과 향사들은 크고 훌륭한 승용마를 타고, 나머지는 작은 조랑말을 탄다.
산악 지형 때문에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빵이나 와인도 운반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단히 검소하기 때문에 빵과 와인이 없어도 설익은 고기와 개울물만 먹으면서 오랫동안 잘 견딜 수 있다. 이들은 냄비나 솥을 사용하지 않고, 가축의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고기를 담아서 조리한다. 그리고 이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각자 안장 받침 아래에 크고 납작한 돌을 하나씩 넣고 안장 뒤에 귀리를 가득 담은 자루를 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물품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군사작전 중 설익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위장이 상하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면 귀리를 물에 반죽하고 불에 달군 돌 위에 얹어서 둥그런 비스킷을 만들어 먹으며 속을 다스린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두 말을 타고 있으며 수레나 다른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멀리 행군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잉글랜드에 침입해서 그 나라를 불태우고 파괴하며 전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은 소를 약탈한다.
이들에게는 3천 명의 중장병, 즉 철갑옷을 입고 크고 훌륭한 승용마나 준마를 탄 기사와 향사들과, 그 지방의 전통적인 무장을 갖추고 작은 조랑말을 탄 2만 명의 교활하고 용감한 병사들이 있다. 이 조랑말들은 묶어두거나 빗질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타고 다닐 일이 없을 때는 알아서 풀을 뜯도록 황무지나 들판에 풀어놓는다.
장 르 벨의 연대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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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군이 포츠머스에 집결한 1346년 6월부터 이미 필리프 6세가 서신을 보내서 절박한 어조로 도움을 간청했으나,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그동안 씹고 있었다. 그는 14년 전 더플린 무어와 할리돈 힐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왕의 요청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9월부터 수만 명의 병력을 소집해 칼레를 포위하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이 지휘하는 주력군에게 반격을 당할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10월 7일 데이비드 왕은 결국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한다.

이미 8월부터 첩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북부 잉글랜드의 지휘관들은 미리 준비해둔 군대를 신속히 소집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잉글랜드군의 소집이 완료되었고, 10월 17일 새벽 더럼 남부를 약탈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전초부대 하나가 짙은 안개 속에서 행군 중이던 북부 잉글랜드 야전군과 갑자기 마주쳐 교전을 벌인 끝에 큰 피해를 입고 도망쳤다.

생존자들의 보고를 듣고 북부 잉글랜드 주력군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된 데이비드 왕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석조 십자가 때문에 네빌스크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지대로 이동해 진을 쳤다. 곧 잉글랜드군이 도착했지만 양측 군대는 아침부터 오후 한낮까지 몇 시간 동안 서로 노려보며 대치만 하고 있었다.

결국 잉글랜드군 지휘관 랠프 네빌과 헨리 퍼시가 먼저 장궁병들을 보내서 스코틀랜드 전열에 사격을 퍼붓게 했다. 이에 데이비드 왕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고품질의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들을 도보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목초지 곳곳에 널린 울타리와 도랑 때문에 대열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장애물을 피해 흩어진 채 화살비를 뚫고 간신히 잉글랜드군 전열에 도달한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에게 간단히 격퇴당했다.

경무장 승마보병 위주로 구성된 두 번째 대대는 선봉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며 전의를 잃고 도망쳤다. 데이비드 왕의 대대는 고지대에 남아서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밤이 되자 후방에 묶어놓은 말을 타고 도망쳤다. 하지만 후퇴는 곧 무질서한 패주로 바뀌었고, 밤새 이어진 추격전에서 많은 패잔병들이 죽거나 붙잡혔으며 데이비드 왕도 결국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결과는 잉글랜드 군대의 대승이었다. 수많은 귀족 지휘관들을 비롯해 지난 십수년 간 치열한 게릴라전으로 에드워드 발리올을 축출하고 잉글랜드 주둔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고참병들이 이 한 번의 전투로 몰살당하면서 잉글랜드는 브리튼섬 본토에서의 위협이 사라졌다.

3.6. 라 로슈데리앙 전투 (1347)

파일:Capture_Charles_de_Blois.jpg
프랑스의 배너렛 기사 15명과 평기사 200명과 보병 4000명이 죽었다. 샤를 드 블루아 자신도 포로로 잡혔고 토머스 대그워스 경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포위군 주둔지의 천막과 지휘본부의 대형 천막들도 전리품으로 수거되었다. 샤를 경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고귀한 에드워드 왕의 감옥에 갇혔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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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년 5월 샤를 드 블루아는 맨앳암즈 1200명과 쇠뇌수 2000명, 그리고 농촌과 도시에서 징집한 수많은 민병대들과 함께 브르타뉴 북부 해안의 잉글랜드 점령지인 라 로슈데리앙을 포위했다.

3주 뒤 노샘프턴 백작의 부관인 토머스 대그워스가 이끄는 맨앳암즈 300명과 장궁병 400명 규모의 지원군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착했지만 전력차가 너무 심했다. 그러나 포위군이 도시 성벽을 봉쇄하기 위해 4개 부대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정찰을 통해 알게 된 대그워스는 그중 샤를의 본대를 노린 야습을 감행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미 야습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포위공격 자체가 잉글랜드 주둔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동이 트기 직전에는 잉글랜드군이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대그워스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곧 동이 트면서 피아식별이 가능해지자 라 로슈데리앙의 수비대장인 리처드 토트셤이 100여 명의 주둔군과 400여 명의 도시 민병대를 이끌고 출격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덮쳤다. 대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역으로 포로로 잡혔으며, 다른 세 방향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던 프랑스군 부대들도 지휘관을 잃은 채 각개격파당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블루아 파벌은 맨앳암즈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으며 지도자인 샤를 드 블루아는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런던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지도자가 없는 것은 몽포르 파벌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의 군사력은 애초에 미약했다. 게다가 잉글랜드나 프랑스나 지금은 칼레와 플랑드르 국경에서 총력전을 벌이느라 브르타뉴 방면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 브르타뉴 내전은 당분간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3.7. 칼레 포위전 (1347)

파일:Calais1347.jpg
기사 네 명이 여섯 시민을 왕에게 인도했다. 군대 전체가 모여 있었으므로 당연히 수많은 군중이 다양한 의견을 펼치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당장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동정심에 눈물을 흘렸다.
고귀한 에드워드 왕이 백작과 남작들과 함께 도착했고, 회임 중이던 왕비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서 따라왔다. 여섯 시민은 즉시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가장 합당한 군주이시여. 칼레의 거상이자 도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저명한 가문들의 일원인 여섯 시민이 폐하를 뵈옵니다. 저희는 도시와 성채의 열쇠를 바치며 그 모든 권리를 폐하께 양도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겪은 나머지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런 모습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모든 결과를 폐하의 자비에 맡깁니다. 부디 폐하의 고귀하신 성정으로 저희를 가엾게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순간 진실로 모든 영주와 기사들이 감동을 받거나 동정심에 울었지만, 국왕은 마음이 분노로 굳어져 한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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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면서 잉글랜드 본토에서의 모병과 징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선원 15000명을 포함해 상선 700척이 징발되었고 병사 3만 명이 칼레 포위군 주둔지에 배치되었다. 동맹인 플랑드르 시민 정부의 민병대 모집도 활기를 얻어서 최소 2만 명 이상이 소집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왕의 위신은 한동안 바닥을 찍었다. 1346년 9월 9일 콩피에뉴에서 필리프는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야전군을 소집했지만 10월 말까지 모인 병력은 맨앳암즈 3000명에 보병 5000여명에 불과했다. 10월 27일 필리프는 결국 칼레 구원을 포기하고 야전군을 해산한다. 유일한 위안거리로 겨울 동안 노르망디와 피카르디에서 보급품을 징발해 칼레 시의 항구로 수송하는 작전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도시가 함락되기까지 11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347년 6월 필리프는 간신히 칼레 구원을 시도해 볼 만한 규모의 야전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영토를 통해 남쪽에서 포위군 주둔지를 공격한다면 수만 명의 플랑드르 민병대가 비어있는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포위군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먼저 플랑드르 영토를 기습해서 베뒨과 카셀을 점령하고 칼레 포위군 진영의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두 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포위군 진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다. 결국 7월 27일 칼레에 도착한 필리프는 포위군 진영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를 점령한 뒤 정찰병들을 보내 적진을 정탐했다.

정찰 결과 적군의 규모와 전장의 지형 모두 크레시 전투 때보다도 불리했다. 필리프는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전투를 포기하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제안한다.

그러나 국왕의 군대의 도착에 환호했던 칼레 주둔군과 시민들은 그들이 포위군과 며칠 동안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8월 1일 칼레 주둔군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필리프는 협상을 중단하고 회군한다.

1347년 8월 3일 칼레는 결국 점령되었다. 이때 '칼레의 시민들'이란 유명한 야사가 있다. 이 부분은 칼레 문서를 참고할 것.

3.8. 흑사병 (1348)

파일:doomsdayjudgemm.jpg
도시 대표들이 말했다. "폐하. 우선 전쟁을 하시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에게 들은 조언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 폐하께선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뷔렁포스, 툰 레베크, 부빈, 에귀용과 그밖의 모든 전장에서 폐하를 따른 군대가 얼마나 크고 훌륭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항상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집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군하셨으나 매번 굴욕적인 휴전을 구걸한 뒤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심지어 적은 수의 적군이 왕국의 심장부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필리프 왕은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과 자치도시 대표들을 소집해서 전쟁을 끝낼 방법을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했다. "거대한 함대와 군대를 소집해 바다와 땅에서 잉글랜드를 공격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저희 모두 몸과 재산을 기꺼이 폐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왕국의 모든 지방에 대리인을 파견해 각자 일정한 숫자의 병력을 요청했다.
프랑스 대연대기

하지만 휴전이 끝난 1348년 7월에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대규모 야전군이 북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칼레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다. 지난 10년의 사투에 약 20년치 전쟁세에 달하는 전비를 소모하며 막대한 빚을 남긴 잉글랜드 정부는 이후 몇 년 동안 채무를 상환하면서 잉글랜드 본토와 대륙 점령지의 안정화에 힘쓰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프랑스가 반격할 차례였다. 크레시와 칼레에서 연달아 발생한 참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오히려 잉글랜드에 대한 증오에 불타올랐다. 1347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평민 대표들은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 1346년 파리 등 최소 네 번 이상 전투를 포기한 필리프의 군사 고문단의 비겁함과 크레시에서 강행군으로 지친 군대에게 성급하게 공격을 명령한 어리석음을 비난하며 잉글랜드 본토 침공 작전을 위한 약 250만 리브르(45~50만 파운드)의 전쟁세를 승인한다. 그렇게 크레시 전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도망치지 않고 무훈을 증명할 증인 하나 없이 스러진 기사들의 희생이 보답받는 듯했다.

하지만 분노한 프랑스 10만 대군이 브리튼섬에 상륙해서 런던을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1348년 1월 프랑스 남부에 도달한 흑사병이 8월부터 북부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필리프는 거짓말처럼 또 휴전을 체결한다.

3.9. 헨트 포위전 (1348)

파일:Siege de Gand par Louis II de Male.jpg
사절단은 헨트로 돌아오자마자 많은 군중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답변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들은 "속았다! 속았다!" 라고 외쳤고, 다른 사람들은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지도자들은 바보고 저희들은 머저리입니다!" 라며 통곡했다.
질 르 뮈시의 연대기

1348년 8월, 헨트 시민 정부의 토템에서 탈출해 파리로 망명했다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선대 플랑드르 백작의 장남 루이 드 말이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을 이끌고 플랑드르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달리 유능한 정치가였던 신임 백작은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의 지도자 역할은 계속 유지한 채, 주민들의 영주로서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플랑드르 공동체의 대의를 지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선언으로 지난 10년 동안 세 대표 도시들 간의, 그리고 대도시와 소도시, 상인 파벌과 장인 파벌, 방직공 길드와 축융공 길드, 친프랑스파와 반프랑스파 간의 반목으로 은연중에 쌓인 갈등이 폭발하면서 백작령 전체가 내분에 휩싸인다.

결국 9월 17일 세 대표 도시 중 하나인 브뤼헤 시 정부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헨트와 이퍼르는 계속 저항했으나 12월 신임 백작이 에드워드 3세와 중립 조약을 체결하자 이퍼르마저 항복한다. 1349년 1월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가 헨트 시의 성문을 돌파하고 마지막 저항군을 전멸시키며 도시를 점령했다. 그렇게 해서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해체되었다.

4.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56)

4.1. 칼레 습격 (1350)

파일:The_French_attempt_to_recapture_Calais_from_England_(1350).jpg
고귀한 에드워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장 르 벨의 연대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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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 1월 2일 새벽, 프랑스군 원수 조프루아 드 샤르니가 특공대를 이끌고 칼레를 습격했다.

샤르니는 2만 에퀴(약 3500파운드)를 써서 칼레 성채의 수비를 담당한 롬바르디아인 기사 아이메릭 디 파비아를 매수했다. 100여 명의 특공대가 아이메릭이 열어준 문을 통해 칼레 성채에 침투해서 망루를 점령한 뒤, 은밀하게 칼레 시내를 가로질러 도시의 남서쪽 성문을 점령한 다음 근처 습지대에서 대기 중인 군대에게 문을 열어준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아이메릭의 배신으로 프랑스군은 함정에 빠졌다.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하는 칼레 주둔군의 반격에 맨앳암즈 200명 이상이 전사하며 샤르니 자신을 포함해 3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파리에서는 필리프 6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왕의 총신들과 왕세자의 파벌 사이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왕실은 권력이양과 왕위 계승을 준비하기 위해 2월부터 교황의 중재로 협상을 진행한 끝에 1350년 6월 13일 잉글랜드와 다시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휴전은 그저 이름뿐이었다. 이전의 휴전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더 노골적으로 조약 내용이 무시되었다. 가스코뉴와 브르타뉴 방면에서는 소규모 전투와 습격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필리프가 고용한 카스티야 갤리선 함대는 자신들은 프랑스 왕의 신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계속 약탈했다.

8월 29일 징발된 상선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함대가 기적적인 확률로 요격에 성공했고, 이 윈첼시 해전에서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치열한 싸움 끝에 카스티야 함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갤리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대부분 놓쳤고 이후에도 해안 습격과 약탈은 계속 이어졌다.

4.2. 몽라벨 습격 (1351)

파일:Funerailles_Philippe_VI.jpg
주님의 해 135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이 죽었다. 곧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이 랭스에서 즉위해 프랑스의 장 왕으로 명명되었다.
새 왕은 즉시 화폐 가치를 조작하기 위해 1/3이 구리인 새로운 에퀴 금화를 주조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에게 성직자 보조세와 다른 특권들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는 몽펠리에와 나르본을 거쳐 카르카손에 도착해 한동안 머물렀고, 가스코뉴와 리무쟁과 푸아투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그가 지나온 모든 지역이 불타거나 폐허가 되어 있었고, 한때 그의 왕국에 속했던 도시와 성들은 잉글랜드인들이 점거한 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괴로워하며 기사들과 남작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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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했다.

랭스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지 한달 뒤인 11월 17일, 장 왕은 대귀족인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외 백작은 4년 전 캉 포위전에서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몸값 5만 리브르를 구하기 위해 가석방된 상태였다. 끝내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이 소유한 긴 성을 양도하기로 합의했으나, 파리고등법원의 법학자들과 국왕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국왕에 대한 반역이었다.

이후 장 왕과 군사 고문들은 남부 전선에서의 전략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우선 전쟁을 단번에 끝낼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보르도 공략을 포기했다. 대신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서 잉글랜드가 내부 정비에 집중하는 동안 미리 공세 역량을 꺾어놓기 위해 가스코뉴 국경의 전초기지에 해당하는 요새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군은 북부 프랑스를 위협해서 가스코뉴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려 했다.

첫 해는 프랑스에 운이 따랐다. 1351년 4월 프랑스군은 보르도와 베르주라크 간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몽라벨 성을 기습해서 점령한 반면,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서 벌인 기마약탈은 모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거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9월 11일 장 왕은 셍장덩주엘리의 요새를 할양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한다.

4.3. 모롱 전투 (1352)

파일:Orde_van_de_Ster.jpg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빛이 흐릿해지다가 섬뜩한 그림자에 가려졌다.
리샤르 레스코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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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 1월 6일 장 왕은 생투앵에서 별 기사단 창설식을 개최했다. 이는 브르타뉴 내전과 노르망디에서 연이어 발생한 재난으로 분열된 동부와 서부 귀족 파벌을 통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해는 시작부터 끝까지 프랑스가 처절하게 굴욕을 당한 해였다.

1월에는 한 잉글랜드 향사가 휴전 조약을 위반하고 북프랑스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긴 성을 기습해서 점령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인들은 긴 성을 포위하고 수개월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7월 중순 어느 날 밤중에 늪지대를 가로질러 기습을 걸어온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포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긴 공방전)

8월 14일 브르타뉴의 모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잉글랜드군이 승리하면서 별 기사단원 중 상당수가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0년 전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가스코뉴의 요충지인 블레유를 탈환했고, 10월 초에는 타른 강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라 프랑세즈를 점령했다.

한편 전쟁이 재개된 이후 장 2세는 거의 모든 왕실 부채의 상환을 중단해야 했고,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급격히 인기를 잃어갔다. 새 국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과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는 야심가들은 카페 왕가의 후손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장 왕의 치세에도 프랑스 정부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잉글랜드군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압살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크레시 전투 이전에 4번이나 전투를 포기한 사실은 신중한 전략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겁쟁이의 행태로 인식되었다. 크레시 전투도 비겁하고 무능한 총신들이 강행군으로 지친 군사들을 조급하게 밀어붙여서 벌어진 어이없는 졸전이었다는 해석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정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숨김없이 드러낸 1347년 삼부회의 발언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프랑스인들은 국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길 원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장 왕마저도 용감하다고 칭송하며 왕을 배신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대신 욕했다.

하지만 국왕과 원수들의 생각에 잉글랜드군과 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장 왕 자신과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한 것처럼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조세를 거둬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쟁 전문가인 직업군인들을 많이 고용해 끊임없는 전초전으로 전선을 밀어내고, 적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벌이는 기마약탈을 청야전술로 막아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렇게나 많은 세금을 이미 걷었으면서도 전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더 내라고 하고, 막상 적군이 침공해 오면 도망만 치는 국왕과 원수들의 뻔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 왕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을 설득하거나 타협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말재주나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다. 그렇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납세에 소극적이 되자 이제는 대규모 야전군을 소집해 정면대결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 다시 참패하고 장 왕이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푸아티에 전투였다.

4.4. 생앙토냉 포위전 (1353)

파일:Siège_du_château_de_Brest.jpg
기사들은 슬픔에 잠긴 채 빵을 먹는다.
그들은 쉴 때조차 지쳐있고 땀을 흘린다.
그들은 한 번의 좋은 날을 보낸 다음 수많은 나쁜 날을 보낸다.
곰팡이 핀 빵이나 비스킷, 조리되거나 조리되지 않은 고기들.
오늘은 먹고 내일은 굶고. 포도주는 없거나 거의 없고.
연못이나 수통의 물. 나뭇가지나 천막으로 만든 형편없는 숙소.
갑옷을 입은 채 누운 불편한 잠자리.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
"경계태세!" "거기 누구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졸고 있을 때 경보가 울림; 동틀녘에 트럼펫 소리.
"말에 타!" "집합! 모두 집합!"
순찰하고, 보초를 서고, 밤낮으로 감시하고. 징발하고, 약탈하고, 정찰하고.
경비를 서고, 또 경비를 서고. 임무 다음에는 또 임무.
"저기 온다! 수가 너무 많아!" "아니. 그렇게 많지 않아."
"이쪽!" "너는 저쪽으로 돌아!" "이쪽 측면으로!" "넌 저쪽으로 몰아붙여!"
"새로운 소식! 그들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리고 포로를 잡아왔어." "아니야. 포로는 없어."
"자, 어서 가자!" "물러서지 마!" "가자!"
안락함이라고는 없는 고단한 생활. 이것이 그들의 소명일지니.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1353년 1월 툴루즈의 세네샬이 라 프랑세즈를 탈환했다.

같은 시기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선종과 인노첸시오 6세의 즉위를 계기로 장 2세가 종전 협상을 위한 휴전을 제안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일단 받아들인다.

국경 요새들을 차지하기 위한 더럽고 치사한 진흙탕싸움과 끝없이 늘어나는 재정 문제에 질린 장 왕은 반역죄를 사면하고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취소하며 생사르도스 전쟁 이전의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나름대로 관대한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그만두는 대가로 가스코뉴 지방의 주권을 요구한다. 그는 애초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고, 협상에 응한 목적은 그저 다음 침공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기선제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와 거만한 태도에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장 왕은 5월 8일 신민소집령을 선포한다. 그렇게 휴전이 사실상 종료된 채 무의미한 종전 협상이 계속되었다.

가스코뉴 국경에서의 전초전이 재개되었고, 아르마냑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7월부터 생앙토냉을 포위해 9월 말 도시를 점령했다.

4.5. 레글 습격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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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 왕은 에스파냐의 샤를 경이라는 훌륭한 기사를 무척 좋아했다. 샤를 경은 장 왕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왕의 충실한 동반자이자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였다. 장 왕은 샤를 경의 모든 바람과 욕망을 들어주었다.
장 왕은 마침내 그를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나바라 왕이 오래 전부터 권리를 요구했던 지방의 땅을 그에게 하사했다. 이 일로 젊은 나바라 왕은 샤를 경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바라 왕과 그의 동생 펠리페가 새벽에 한 거대한 성채에서 샤를 경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나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날 이후 나바라의 두 형제와 프랑스의 장 왕 사이에 평화 조약이 여러 번 맺어졌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적대감과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4년 1월 노르망디 남부의 소도시 레글의 한 여관에서 카를로스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장 2세의 측근이자 프랑스의 총사령관인 샤를 드 에스파냐를 암살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며칠 뒤 랭커스터 공작[7]에게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모호한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동시에 프랑스의 주요 자치도시들, 파리 대학, 그리고 교황에게도 서신을 보내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방해하는 간신 샤를 드 에스파냐를 살해했음을 밝혔다.

카를로스는 잉글랜드 왕과 교황을 한 번에 낚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를 내전으로 분열시킬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에 빠져 즉시 협상을 진행했다. 교황은 두 강대국을 중재해서 전쟁을 종식했다는 업적을 원했기에 나바라 왕을 용서하라며 장 2세를 설득했다. 내전 도중 잉글랜드의 침공을 당할 위험성과 교황의 권고에 굴복한 장 왕은 결국 나바라의 카를로스에게 화해를 제안한다.

3월 4일 카를로스는 파리고등법원 대회의실에 불로뉴 추기경과 함께 출석해서 결국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보낸 동맹 제안을 거부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폭력사태 없이 화해가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서신을 돌려줬다.

한편 카를로스의 트롤링이 의도치않게 종전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을 실어주면서 양국의 종전 협상이 크게 진전되었다. 4월 6일 긴 조약에서 장 왕은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생사르도스 전쟁 이전의 가스코뉴 영토에 더해 푸아투, 리무쟁, 루아르 지방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한다. 10월 1일 아비뇽에서 조약이 확정되는 동시에 교황이 그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길고 길었던 '17년 전쟁'에서 드디어 승리한 에드워드는 기쁨과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8월경 나바라파의 주요 인사였던 아르쿠르 백작이 장 왕에게 용서를 구하며 카를로스의 계략과 그동안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시종관이자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한 로베르 드 로리스를 포함해 장 왕의 측근 중 일부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첩자이며 추밀원 회의 내용을 그에게 비밀리에 누설하는 등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진실을 알게 된 장 왕은 격노했고 로베르는 며칠 뒤 아비뇽으로 도망쳤다.

위기를 감지한 카를로스도 11월 초 아비뇽 교황청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장 왕은 곧바로 나바라의 카를로스의 모든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그가 국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프랑스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왕의 군대가 도착하자 노르망디의 도시와 성들은 바로 항복했다. 하지만 나바라인 수비대가 주둔한 여섯 성채만은 자신들은 나바라 왕의 명령에만 복종한다며 항복을 거부한다.

다음 해인 1355년 1월 장 왕은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긴 조약을 파기했다.

한편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측 사절로 아비뇽을 방문해 있던 랭커스터 공작을 만나서 이번 휴전이 끝나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기로 합의한다.

4.6. 나르본 습격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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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군대는 가론 강을 건넌 다음 대대들을 편성했고, 툴루즈 시 너머의 모든 지방을 불태웠다. 그날 밤은 몽기스카르에서 숙영했고 다음 날 카스텔노다리로 진격해 성을 점령하고는 전부 약탈했다. 그다음 날은 카르카손까지 진격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부를 발견했고, 모든 것을 약탈하며 도시의 아름다운 부녀자들과 그녀들의 딸들을 강간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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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년 7월 5일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가 군사 20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하지만 무력충돌이 일어나기도 전인 9월 초, 카를로스는 또다시 장 왕과 타협하고 사면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동맹은 파기되었고, 카를로스에게 또다시 낚인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 원정 계획을 취소한다. 대신 그가 남기고 간 나바라 군대를 용병으로 고용해서 브르타뉴 방면을 교란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직접 칼레에 상륙해 피카르디를 공격하며 장 왕을 도발한다.

장 왕이 청야전술로 대응하자 에드워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칼레로 퇴각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보낸 보조금 4만 에퀴가 도착하자 스코틀랜드군이 휴전 조약을 무시하고 북부 잉글랜드를 침공해 베릭을 점령한다.

하지만 그렇게 북쪽에서 조공으로 시선을 끄는 동안 주공인 남쪽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10월 5일 보르도에서 출정해 11월 말까지 가스코뉴와 랑그독을 횡단하는 기마약탈로 남부 프랑스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이 원정으로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8]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랑그독에서 세금 징수가 당분간 중단된다.

4.7. 베릭 포위전 (1356)

파일:hywchevauchee 1355.jpg
발리올의 에드워드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왕을 찾아왔다. "군주 중의 군주이시여! 내가 알기로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폐하이십니다. 그러므로 부디 폐하께서 가장 사악한 종족이자 항상 나를 배신하고 다스리지 못하게 거부한 나의 원수 스코틀랜드인들을 처벌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증거로 발리올은 한 손에 왕관을 벗어 들고 다른 손으로 흙과 돌을 바닥에서 집어 들어 같이 내밀었다. "이 전부를 계약의 증표로 받아주시길. 부디 남자답고 강하게 행동하셔서 본디 내 것이었어야 할 왕국을 폐하의 손으로 정복하십시오."
이 상황에서 지적해야 할 점은 그에게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포둔의 존의 스코틀랜드 연대기

1356년 1월 에드워드 3세가 다시 브리튼섬으로 돌아와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1월 13일 베릭을 탈환한다.

1월 20일 늙고 지친 발리올이 에드워드를 찾아와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에드워드는 그의 빚을 갚아주고 연금을 하사해 마지막 존엄성을 지켜준다.

에드워드는 20년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와 로우랜드를 철저히 불태우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야전술과 악천후 때문에 에든버러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회군한다.

같은 시기 가스코뉴에서는 흑태자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이 네 방향으로 동시에 공세를 가해 많은 거점을 점령하고 전선을 크게 밀어낸다.

4.8. 루앙 습격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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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눌 도드랭 경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움직이는 놈은 모두 죽는다!"
장 왕은 나바라 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붙잡고 큰 식탁을 가로질러 끌고 가면서 울부짖었다. "이 더러운 반역자놈!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아, 폐하!" 노르망디 공작이 말했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거에요? 그는 내 손님이라고요."
장 왕은 아들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며 나바라 왕을 걷어찼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5년 12월 나바라의 카를로스와 왕세자 샤를이 연루된 국왕 암살 음모가 발각된다. 장 왕은 국내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에 대처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왕세자와 타협하고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한다.

1356년 3월 말 새로운 암살 음모가 발각된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장 왕은 4월 5일 루앙 성채를 습격해 그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측근들을 체포했다.

샤를 드 에스파냐 살해 등에 연루된 자들 중 일부는 바로 그날 저녁 루앙 시 교외의 시장에서 공개처형당했고, 나머지는 고문을 받은 끝에 모든 음모와 악행을 자백했다. 카를로스 자신은 파리의 샤틀레 감옥에서 신문을 받은 뒤 구출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감옥들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프랑스에 대해 꾸민 거대한 음모와 두 왕 사이의 갈등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노르망디의 유력자들은 국왕의 성급하고 잔혹한 행동을 보며 불안에 빠졌다.

4.9. 푸아티에 전투 (1356)

파일:hywpoitiers1356.jpg
아 이런, 많은 사람들 중에 국왕은 전투 중이네
무척 용감한 군주가 단검과 장검을 내리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맞아 죽어 한 치도 잡히질 않네.
국왕이 말하길 "기사들 해보시게, 잔챙이들에 불과한 것들!"
……
국왕이 붙잡히게 되었을 때 잉글랜드인들은 끈질기게 외쳤네
"이 자는 장 드 발루아이지 프랑스 왕은 아니다!"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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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가 루앙 성에서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자 카를로스의 동생 펠리페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잉글랜드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1355년부터 장 왕이 시도한 개혁들은 전부 실패했거나, 성공했어도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해서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프랑스군은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인 6월에 에브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공은 장 왕과 군사 고문들이 예상한 목표인 랑그독이 아닌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 왕은 랑그독에 배치된 야전군을 국왕군에 합류시키는 동시에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해 흑태자의 진군을 방해했다. 그리고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루아르 강의 다리들을 파괴했다. 흑태자는 투르 시를 점령하고 그곳의 다리를 통해 루아르 강을 건너려 했으나 결국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그동안 장 왕은 크레시 이전의 국왕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가용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야전군 편성을 가까스로 끝냈다. 프랑스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주저 없이 군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으나 보병을 해산하면서까지 기동성을 높인 장 2세에게 결국 퇴로를 차단당한다. 흑태자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 집결하기 전에 기습을 시도했지만 절반의 성공만 거두고 궁지에 몰렸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은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진영을 정찰했으며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서 하마한 채 도보로 진격했다. 그 덕분에 더 오랜 시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결국 패배했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를 제외한 모든 대대가 패주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전장에 남아서 싸우다 붙잡힌 장 왕을 비롯해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프랑스 제일의 기사로 칭송받는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왕의 기수로 임명되어 성 드니의 붉은 전투깃발 오리플람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장 왕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왕권에 드리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용감하고 고결한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지금껏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재난은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측근들과 사치에 젖어 군기가 빠진 기사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5.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브레티니 조약 (1357~1360)

5.1. 렌 포위전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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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한때 학문, 기사도,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샘터이자 꽃이었으며, 고결함, 우아함, 도의심 등 모든 미덕의 모범이 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포로로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친 기사들은 자치도시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왕국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세자나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도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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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협상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단 장 왕의 총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전부 숙청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달성되고 나자 귀족들과 평민 대표들은 이제 국정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에 나바라의 카를로스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하며 장 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나바라파까지 가세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57년 3월에는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한 장 왕이 프랑스로 포고문을 써 보내, 왕세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령이나 삼부회에서 의결된 정책을 따르지 말라고 모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 장 왕은 욕심 많고 독선적이며 자기와 똑같은 성격의 총신들만 편애했기 때문에 제후들과 도시 유력자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보인 용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1356년 10월 3일부터 랭커스터 공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군대가 브르타뉴의 대도시 렌을 포위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포위를 풀기 위한 왕세자 정부의 노력은 전부 실패로 끝났으나 브르타뉴인 향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포위군 진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활약한 끝에 도시를 구했다.

다음해인 1357년 7월 결국 에드워드 3세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랭커스터 공작은 왕세자 정부에게 10만 리브르를 보상금으로 받고 렌 시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면서 잠깐동안 성벽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나기로 합의한다. 오베로슈의 영웅이자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가 처음으로 당한 큰 패배였고, 이 일로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게클랭이 명성을 얻었다.

5.2. 아를뢰 습격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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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회는 또한 나바라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프랑스를 위해 봉사한다면 왕국이 더 강해지고 더 잘 방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왕국이 의지할 만한 지도자는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르망디 공작에게 그를 풀어주자고 요청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왜 체포되었는지도 모르고 단지 억울하게 갇혔다고만 생각했다.
……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당한 일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프랑스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의무대로 프랑스 왕국을 수호하며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설득력 있게 연설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그동안 노르망디에서는 나바라파가 코탕탱 반도를 거의 장악했다.

결국 1357년 11월 9일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아를뢰 성의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는 나바라파의 추종자들에게 구출된 즉시 아미앵 시로 향했다.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도시에 영웅처럼 입성한 그는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하는 마음과 장 왕이 씌운 누명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 끝에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몇 시간에 걸쳐 쏟아낸 열정적인 연설로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왕세자의 국왕 대리인 지위는 이름뿐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나바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하지만 반쯤 잊고 있었던 희대의 트롤러 카를로스의 재등장에 당황한 에드워드는 런던에 포로로 잡혀 있는 장 왕과 몸값을 합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이 곧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카를로스는 파리 시의 모든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한 뒤 노르망디로 도망친다.

5.3. 파리 시민 봉기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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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귀족들과 성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삼부회의 입장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삼부회가 자신들이 바랐던 것보다 더 멀리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인조합장에게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노르망디 공작이 기사, 귀족, 성직자들과 함께 파리의 궁전에 있었는데, 상인조합장이 자신의 편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파리 시의 악당들을 잔뜩 모아서 궁전으로 찾아왔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잉글랜드 왕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왕세자 샤를은 파리 개혁파 부르주아들이나 아직도 남아있는 나바라파 잔당들에 맞서기 위해 왕실에 충성하는 귀족 세력을 결집했고, 1358년 1월에는 일드프랑스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는 잉글랜드 출신 용병 겸 도적들을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소집했다.

하지만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왕세자의 발악을 비웃듯 그 명분을 진짜로 만들었다. 그는 장 왕의 폭정에 희생된 노르망디 귀족들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잉글랜드 용병들을 고용해서 일드프랑스를 약탈하게 했다. 용병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아닌 왕세자와 나바라 왕의 분쟁에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휴전 조약을 무시했다. 왕세자의 군대만으로는 이들의 약탈을 막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라 파리 시를 장악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 부르주아들도 도적들을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민병대를 모집했다. 이들은 왕세자의 군대를 도시 성벽에서 쫓아내고 파리 시의 상징색인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세력을 과시했다.

군대를 잃은 왕세자는 얼마 전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썼었던 술수를 모방했다. 그는 1월 11일 아침 수행원 여섯 명만 이끌고 레 알르 시장에 나왔다. 그리고 높은 연단 위에 올라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이 세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고 있다거나 지금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군대가 파리 시민들의 적이라는 소문은 모두 '정부를 장악한 자들'이 퍼트린 거짓말이고 이들이 오히려 조세를 횡령하며 도적들을 돕고 있다고 왕세자는 주장했다.

왕세자 일행이 시장을 떠나자 즉시 에티엔 마르셀이 단상 위에 올랐다. 그리고 앞서 왕세자가 했던 주장을 반박하며 왕세자가 개인적으로 유용한 세금의 정확한 액수와 그 돈을 받은 유력자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언급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왕세자가 포고꾼에게 칙령을 읽게 하는 대신 시민들 앞에 직접 나와서 연설했다는 사실 자체에 감명을 받았다.

1월 24일 왕세자의 재무관 장 바이예가 거리에서 습격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왕실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채권자였다. 살인범 페렝 마르크는 생마리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체포해서 재판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로베르가 사형을 집행하면서 파리 시의 유력자들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바이예와 마르크의 장례식이 같은 날 진행되었고, 왕세자 파벌은 모두 바이예의 장례식에, 개혁파는 모두 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명해지면서 도시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월 초가 되자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다시 파리 정계에 개입했다. 그가 파견한 사절단은 노르망디에 남아있는 요새들을 전부 양도하라는 요구를 왕세자에게 전한 뒤 파리 거리에 나와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자 왕세자에게는 절망적이게도 그동안 나바라 왕의 포고문과 연설에 담긴 지성에 감명을 받은 파리 대학 교수들이 지지를 표했다.

카를로스는 개혁파가 장 왕과 그의 총신들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대감을 이용했다. 국왕은 외국에 끌려갔고 측근들은 숙청되었지만 상황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나바라파와 개혁파에게 장악된 파리 삼부회는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인 장 왕의 칙령은 무시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명분을 강화하고자 모든 권력을 잃은 왕세자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허울뿐인 '섭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2월 21일 삼부회가 해산되자마자 왕세자는 생드니 평야에 주둔한 자신의 군대에게 파리 시내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시 성벽과 성문은 전부 개혁파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쪽 문 바로 옆에 루브르궁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해 있는 왕세자 파벌이 내부에서 호응하면 성문이 돌파당할 수 있었다.

결국 2월 22일 아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티엔 마르셀이 선수를 쳐서 민병대 3000명을 이끌고 왕궁을 습격했다.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눈앞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자 왕세자는 겁에 질린 채 마르셀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에 마르셀은 '이들은 전하의 보호자입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이 쓰고 있었던 파리 시의 상징 모자를 왕세자의 모자와 바꿔 썼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반역자들을 죽였다고 밝힌 뒤 왕세자에게 사면을 받았다.

3월부터 왕세자는 공식적으로 섭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공문서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허수아비 섭정이라는 버프 아이템은 파리에 가둬놓은 채로는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왕세자를 지지하는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은 파리 삼부회 참석을 거부하며 상리스와 프로방스에서 지방 삼부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왕세자의 '호위'를 자처했지만 출발 직전 갑자기 병으로 앓아누웠고, 왕세자의 삼촌인 오를레앙 공작이 급하게 대신 호위를 맡게 되었다. 3월 25일 왕세자는 그대로 수행단과 함께 상리스로 출발하면서 허망하게 탈출에 성공한다.

5.4. 멜로 전투 (1358)

파일:Jacquerie_meaux.jpg
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이러한 협정을 맺었네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1358년 5월 왕세자는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농촌 공동체의 관습적인 특권도 무시하는 강화된 징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보베지의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잡힌 것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며 귀족들을 학살했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왕세자 샤를과 북부 프랑스 귀족들을 적대하고 있는 파리 부르주아들과 연합을 시도했으나,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센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충지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계획에만 동조하고 그 이상의 협력은 철저히 거부했다.

프랑스의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삼은 농민군은 이제 '같은 평민'인 도시 세력과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개혁파 부르주아들에게는 이미 나바라파 귀족들이라는 연줄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 결국 6월 10일 나바라의 왕 카를로스 2세는 멜로 고원에서 농민군에게 거짓으로 협상을 제안한 뒤 그 말에 속은 농민군을 기습해서 무참히 짓밟는다. 같은 날 모 시를 점령하러 떠난 분견대도 수비군에게 패배하고 흩어지면서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나바라 왕 카를로스가 자크리 반란군 진압에 가장 먼저 나섰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북부 프랑스 귀족 난민들과 자경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멜로에서 농민군을 전멸시킨 이후 카를로스는 봉기를 일으킨 마을마다 주동자 4명씩을 골라내 처형하고 약탈과 방화를 벌인 대가로 보상금을 걷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귀족들을 통제하고 이끌면서 상황을 주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귀족들도 자크리 못지 않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바라 왕의 명령은 거의 무시되었고 어떤 이들은 일드프랑스의 농촌 마을과 농민들을 마치 잉글랜드군이 하는 것처럼 불태우고 학살했다.

농민들에 대한 보복을 어느정도 끝내자 귀족들의 분노는 이제 도시민들에게 향했다. 마침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자크리의 난의 배후로 의심받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삼부회에서 귀족들과 대립했고, 농민군과 같은 비귀족 평민이며 똑같이 왕세자를 적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에티엔 마르셀에게나 그의 동맹인 카를로스에게나 전혀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5.5. 파리 포위전 (1358)

파일:Chroniques_de_Froissard_Paysans_massacrant_un_noble.jpg
"푸아 백작은 영지로 돌아갔지만, 대장과 나는 계속 나바라 왕에게 고용돼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피카르디에서 치열하게 싸워서 보베와 아미앵의 주교령의 수많은 도시와 성을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58년 6월 14일 카를로스는 다시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자신이 카페 왕가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에티엔 마르셀은 왕국을 다스릴 지도자가 없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며 나바라 왕을 파리 시의 수비대장으로 추대한다. 카를로스는 결국 귀족들을 버리고 도시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귀족들은 나바라 왕 대신 왕세자 샤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왕세자는 자크리 반란 진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이득을 누렸다. 6월 말 그는 1만이 넘는 맨앳암즈를 이끌고 파리 시 교외에 도착했고, 7월 14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포위군 진영을 잇는 센 강의 임시교량을 파괴하기 위해 수비대가 출격하면서 시작된 한 번의 짧고 격렬한 전투가 있은 뒤, 개혁파와 왕세자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분노한 귀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항복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도시가 함락되는 순간 누구도 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아마도 협상 도중 깨달은 왕세자 샤를은 도시의 포위를 풀고 야전군을 대부분 해산한 뒤 소규모 호위대만 이끌고 모 시로 철수한다.

그렇게 파리 포위전은 일단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의 승리로 끝이 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 시의 일부 유력자들과 대부분의 중하층 시민들이 나바라파와의 동맹에 대해 품고 있었던 불만이 폭발했다. 나바라파건 왕세자파건 상관 없이 모든 귀족들에게 적대감을 품은 이들도 있었고, 자크리 반란군을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나바라 왕이 손바닥 뒤집듯 편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잉글랜드 출신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7월 21일 오후 파리에서 반잉글랜드 폭동이 일어나 잉글랜드 용병 400여 명이 폭도들에게 붙잡혀 감금당한다. 에티엔 마르셀은 이들을 살려둬야 잉글랜드에 잡혀간 프랑스 포로들과 교환할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간신히 용병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카를로스는 노르망디에 있는 부하들에게 서신을 보내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군 주둔지를 샅샅이 뒤져가며 용병들을 모집하게 하고는, 다시 한번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 나가서 연설을 했다. 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나바라 왕과 상인조합장이 당장 잉글랜드인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을 지휘해서 센 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새 주둔군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곧 이성을 잃은 시민 수천 명이 그들을 반강제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카를로스와 에티엔 마르셀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폭도들을 따라 파리 시를 나와서 왕세자의 군대의 주둔지로 향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용병들이 그렇게 행군하고 있던 시민군을 기습해 600여 명을 죽이고 카를로스를 구출했다.

에티엔 마르셀은 남은 생존자들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결국 7월 31일 아침 생드니구의 성문을 순찰하던 중 분노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

이 소식을 들은 왕세자는 8월 2일 파리에 입성한다. 개혁파 지도층 일부는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시민들과 자크리 반란군은 곧 사면을 받았다.

8월 3일,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에 대한 신서를 취소했다. 다음 날 카를로스는 나바라와 잉글랜드 병사 300명을 이끌고 믈룅에 입성했다. 지역 주민들이 저항하자 카를로스의 군사들은 도시 서쪽 구역에 자리를 잡는다.

같은 시기, 우아즈 강의 요충지 크레이가 카를로스의 지지 세력인 잉글랜드 용병단에게 점령되었다. 나바라의 샤를은 이제 망트, 믈룅, 푸아시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일드프랑스의 수운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그의 추종자들은 보베지와 피카르디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9월까지 일드프랑스에서만 60개 이상의 거점이 용병들에 의해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비싼 몸값을 지불하고 보호비를 갈취당해야 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장 2세와의 조약을 시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장 왕의 몸값이었는데, 첫 번째 분할금 60만 에퀴가 1358년 11월 1일까지 지불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프랑스에서 이 금액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타협을 원치 않았으며, 프랑스 내 잉글랜드 용병들의 폭력과 약탈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그는 조약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부활절 이후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11월 동안 카를로스의 용병들은 피카르디와 보베지에서 랑과 수아송을 거쳐 랭스 방향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5.6. 런던 조약 (1359)

파일:Henry_II,_Plantagenet_Empire.png

1359년 초, 프랑스 상황이 악화되면서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장 2세와 측근들 사이에 절망이 퍼졌다. 그들은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가장 큰 위협으로 보고 카를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잉글랜드에 상당한 영토를 양도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3월 24일, 결국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2세기의 앙주 제국을 재창조하는 규모의 대륙 영토를 에드워드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런던 조약은 프랑스 국민들의 광범위한 반대에 직면했다. 5월 19일,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는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왕세자 샤를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조약 거부에 대응하여 프랑스 침공을 준비했으며, 랭스를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릴 계획을 세운다.

한편 북부 프랑스에서 나바라의 카를로스의 세력은 저절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의 주요 지지자인 장 드 피키니가 급사한 뒤 에브뢰 주민들이 그의 군대를 도시에서 추방했다. 다른 거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연이어 탈환되었고, 5월에는 피카르디에서 카를로스의 통제하에 남은 곳은 포와와 라 에렐뿐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왕세자 샤를은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에서 군대를 소집해 믈룅을 포위 공격한다.

7월, 놀랍게도 카를로스가 프랑스 왕국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며 왕세자 샤를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항복한 뒤에도 잉글랜드 용병들은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10월 28일, 에드워드 3세가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했다. 여전히 돈도 군대도 없었던 왕세자 샤를은 주요 도시들을 지키며 야전을 철저히 피하는 동시에 지킬 수 없는 농촌 지역을 황폐화하는 청야전술을 벌였다.

5.7. 랭스 포위전 (1360)

파일:Edouard_III_assiègeant_Reims.jpg

1360년 1월 초, 에드워드 3세는 결국 랭스 포위를 포기했다.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는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큰 부담을 주었다.

2월 말, 장 드 뇌빌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르 크로투아에서 출항했다. 이들의 목적은 4000여 명의 습격대를 잉글랜드에 상륙시켜 장 2세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식스의 라이 만에 상륙한 습격대는 곧 수비군의 반격에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한다. 이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징수된 세금은 대부분 파리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에드워드 3세의 군대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랭스 포위를 포기한 이후 에드워드 3세의 전략은 파리 주변을 약탈하며 지역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어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4월 13일 잉글랜드군 주둔지를 휩쓴 폭풍으로 다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샤르트르 인근에서 평화 협상을 제안한다.

5월 1일, 브레티니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10월 24일 체결된 조약에서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의 점령지들과 칼레, 퐁티외, 푸아투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이 브레티니 조약으로 일단은 전쟁이 끝났다.


[1] 아래의 1339년 10월 의회 하원의 청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방민들은 공권력을 등에 업은 관료들과 도급업자들에게 최저 가격으로라도 제값을 받아낼 수 있을지 처음부터 의심했고, 신뢰를 주어야 할 정부는 정작 바로 뒤의 사례처럼 수틀리면 법령이든 계약이든 마음대로 뒤집었다.[2] 마지막 문구는 헨리 3세 시기부터 이미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앵글로색슨식 이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 점이나, 아이를 낳은 귀족 여성들에게 선물된 프랑스어 문법 교재들과 함께 13세기 후반에는 노르만 혈통의 대귀족들조차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진다. 이때 상당한 효과를 봤는지 프랑스 왕이 모든 잉글랜드인을 프랑스인들의 노예로 만들고 영어도 못 쓰게 할 것이라는 프로파간다는 손자인 에드워드 3세의 포고문에서도 전쟁 초기부터 반복된다.[3] 물론 현대 역사학자들이 추정한 병력수고, 연대기에 따르면 연합군은 잉글랜드군 1만 2천을 포함한 4만 대군, 프랑스군은 중기병 4만 5천과 보병 6만으로 구성된 10만 대군이었다.[4] 브르타뉴의 잔 여백작과 이름이 같다[5] 20~24리그(리유)는 약 100~120km다.[6] 어쩐지 1막 내내 승승장구하다가 3막쯤에 발리는 RPG 최종보스가 2막 프롤로그에서 할 법한 전형적인 대사 같지만, 장르벨은 에노 백령 출신으로 에드워드 3세의 지지자였다. 그리고 적어도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직접 본 것이나 믿을만한 증인에게 들은 것만 기록했다.[7] 1345년 오베로슈 전투의 영웅인 랭커스터 백작 겸 더비 백작 헨리와 동일인이다.[8] 프랑스의 에퀴 금화는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즉 1/5스털링파운드 가치였으나 장 왕 치세에는 34페니, 즉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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