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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4:03:47

조프루아 다르쿠르

성명 조프루아 다르쿠르
Geoffroy d'Harcourt
생몰년도 미상 ~ 1356년 11월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아르쿠르
사망지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베이 만
아버지 장 3세 다르쿠르
어머니 알릭스 드 브라반트
형제자매 장 4세, 루이, 마리, 이자보, 알릭스, 블랑슈
직위 생소뵈르 자작
1. 개요2. 생애3. 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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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대적했다.

2. 생애

샤텔로 자작이자 엘보프와 아르쿠르의 남작인 장 3세 다르쿠르와 비에르종과 라페르테앵볼의 영주 고드프루아 다에르쇼트의 딸인 알릭스 드 브라반트의 장남이다. 형제자매로 장 4세 다르쿠르, 루이[1], 마리[2], 이자보[3], 알릭스[4], 블랑슈[5]가 있었다. 1326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소뵈르 자작이 되었다.

1339년 형 장 3세와 함께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하려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를 돕겠다고 맹세한 50명의 노르만 귀족 중 한 명이었다. 1343년, 그는 몰레이 남작 로저 5세 바콘의 딸이자 노르망디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로 손꼽히는 몰레이 영지의 상속녀인 잔 바콘과 약혼했다. 그러나 잔은 나중에 약혼을 파기하고 아르쿠르 가문의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탕카르빌 가문의 일원인 기욤 베르트랑[6]과 결혼했다. 조프루아는 필리프 6세에게 탕카르빌 가문이 잔을 협박해서 약혼이 깨졌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탕카르빌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344년 4월, 그는 테송 가문의 장 드 라 로슈, 바콘 가문의 기욤 바콘, 퍼시 가문의 리처드 퍼시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옹립하여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브라반트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피신해 사촌인 브라반트 공작 장 3세 드 브라반트의 환영을 받았다.

1345년 2월 잉글랜드로 넘어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해 6월 13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잉글랜드 내 영지를 부여하고 자신의 노르만 영지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플란데런 백국으로 상륙하려던 에드워드 3세에게 "노르망디에 상륙하면 친 잉글랜드 귀족들이 대거 호응할 테고, 노르망디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 하나이며 투사가 없으니 그곳을 공략하면 폐하의 군사들은 앞으로 20년은 봉급을 받지 않아도 족할 부귀를 누릴 겁니다."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함께 노르망디의 항구도시인 생바스라후그에 상륙하는 선봉대를 이끌게 했다.

조프루아는 생바스라후그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뒤 전 약혼자 잔 바콘의 소유에 있던 요새화된 성을 점령하고 파괴했다. 이후 1차 캉 공방전에서 격전 끝에 캉을 공략한 잉글랜드군이 주민 5,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하는 것에 경악해 에드워드 3세에게 학살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해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잉글랜드군과 함께 파리 인근으로 진군해 생클루를 파괴하고 방화를 자행했다.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 참전해 잉글랜드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때 그의 형이자 아르쿠르 백작이었던 장 4세 다르쿠르가 전사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형이 크레시 전투에 참여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가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던 중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번뇌에 사로잡힌 끝에 잉글랜드 진영을 떠나 맨발로 루브르 궁정에 나타나 수의를 입고 필리프 6세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필리프 6세는 그를 사면하기로 했고, 그는 1347년에 루앙과 캉의 보안관으로서 세금과 군대를 징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잉글랜드에 있던 조프루아의 재산을 압수했다.

1355년 1월, 조프루아는 샤를 왕자의 초대에 따라 조카인 장 5세 다르쿠르와 함께 루앙으로 향했다. 당시 노르만 귀족의 지도자였던 조프루아는 노르만인에 대한 헌장을 샤를 왕자에게 제시하고 이렇게 외쳤다.
"주군이시여, 여기 노르만인에 대한 헌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샤를 왕자가 서명을 거절하자, 그는 생소뵈르 자작으로서 샤를 왕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떠났다. 그럼에도 샤를 왕자는 그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했고, 나중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1356년 4월 5일, 조프루아는 다시 루앙으로 가서 샤를 왕자가 개최한 연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연회에 참석한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돌연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 조프루아의 조카 장 5세 등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카를로스 2세는 체포 후 감옥에 갇혔고, 장 5세는 처형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가 새로운 세금 부과에 공동으로 반대하고, 샤를 왕자가 두 사람과 우정을 나눈 것에 격분해 이 일을 단행했다고 한다.

조프루아는 가까스로 루앙을 탈출해 영지로 돌아갔다. 이후 조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에드워드 3세와 재차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장 2세가 파견한 토벌대의 공세에 당해내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쫓겨났다. 1356년 11월, 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코탕탱과 베셍의 경계에 있는 베이 만의 생클레르몽 여울목에 상륙했다. 그러나 얼마 후 프랑스 기사 8명과 수많은 궁수의 매복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일행이 사방으로 도망가는 걸 보고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제 몸은 수의에 둘러싸여 묻힐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제게 안겨주신 명예로운 죽음에 감사드립니다."

그 후 조프루아는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고, 유해는 생소뵈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후대의 평가

장 프루아사르는 조프루아를 용감한 기사로 호평하면서, "그는 법을 지키고 유지하며 노르만 관습과 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대의 프랑스 역사가들은 조프루아를 프랑스의 반역자로 간주하고 혹평을 가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 ~ 1848)은 저서 <프랑스 역사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Analyze raisonnée de l'histoire de France)>에서 조프루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조프루아가 해변에 발을 디뎠을 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 들판으로, 그를 아버지의 지붕으로 이끌었던 길을 따라가면서 그보다 먼저 도망가는 농민들을 보고도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중략) 검에 찔러 눈물을 흘리며 찢어진 망토에 싸인 프랑스는 조프루아 다르쿠르에게 이렇게 외칠 것이다. '거짓되고 배신을 일삼는 기사여, 나는 크레시에서 조국에 충실한 형제의 피묻은 몸 위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헛되이 회개할 것이다. 당신의 회개는 당신의 결백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배신자여, 당신은 당신의 범죄와 당신의 왕의 용서로 인해 두 배로 시들고 믿음의 거짓말로 죽을 것이다.'"

이렇듯 프랑스 학계에서 혹평받던 조프루아는 20세기 후반부터 전기작가 장 마비레(Jean Mabire, 1927 ~ 2006)를 비롯한 '노르만주의' 역사가들로부터 "노르만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자유를 수호한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노르만주의자들은 1956년 11월 10일에 조프루아의 사후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조프루아는 전형적인 봉건 영주이며, 단지 프랑스 국왕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충성의 방향을 바꿨을 뿐 프랑스인을 배신한 게 아니라고 본다.


[1] 생파울 자작, 몽고메리 영주[2] 클레르 영주 조프루아 드 클레르의 부인[3] 보몽오메인의 자작 장 2세 드 브리엔의 부인[4] 샤토루 영주 앙드레 2세 드 쇼비니의 부인[5] 프랑스 제독 위그 키에레의 부인[6]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