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 Robert VIII Bertrand de Bricquebec | |
생몰년도 | 1273년 ~ 1348년 8월 3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브릭퀘벡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보몽앙오즈 | |
아버지 | 로베르 7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 | |
어머니 | 필리파 드 크레르몽네슬 | |
형제 | 기욤 베르트랑 | |
배우자 | 마리 드 쉴리 | |
자녀 | 대 잔 베르트랑, 로베르 9세 베르트랑, 기욤 베르트랑, 소 잔 베르트랑 | |
직위 | 브릭퀘벡 자작, 프랑스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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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원수. 아라곤 십자군, 플란데런 반란, 백년전쟁 초기에 활약한 인물이다.2. 생애
1273년경 프랑스 왕국 브릭퀘벡에서 브리퀘벡 자작 로베르 7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과 필리파 드 클레르몽네슬 사이의 장자로 출생했다. 형제로 누아용, 바이외, 보베의 주교를 역임한 기욤 베르트랑이 있었다.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이후, 시칠리아를 아라곤 왕국에 빼앗긴 카를루 1세는 프랑스 국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필리프 3세에게 아라곤 왕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1285년, 필리프 3세는 아라곤 침공을 결심하고 무관장 클레르몽 드 네슬에게 아라곤 침공을 명령했다. 그는 클레르몽 드 네슬의 외조카로서 종자의 자격으로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군은 초기엔 피게라스, 카시틸론, 지로나를 공략했지만, 아라곤 왕국의 거센 반격과 이질 창궐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노르망디와 피카르디 내 많은 영지를 물려받고 경영에 몰두하던 그는 1321년 베르됭 주교단의 로렌에 대한 권리에 대하여 베르됭 주교와 룩셈부르크 주교 간의 협상에 참여했다. 1322년 8월,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로부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들어 장인 앙리 드 쉴리 및 여러 기사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는 로버트 1세를 토벌하기 위해 벌인 원정에 동행했다. 1322년 10월 14일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에 완패해 사방으로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전장에 남아있다가 생포되었다. 1322년 5월 30일 에드워드 2세와 로버트 1세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프랑스 포로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석바오디었다.
1324년 6월 3일 살아남은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도버 항에서 승선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로베르 8세는 1325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선임되었다. 1327년 프랑스 왕실에 대항한 봉기가 일어난 아게네와 보르도를 진정시키는 임무를 잘 수행해 5,000 리브르 투르누아의 보너스를 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1328년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를 동행했고, 그 해 8월 23일 카셀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1336년 국왕 평의회 의원이 된 그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와 프랑스의 동맹 협약에 서명했다.
백년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338년, 로베르 8세는 필리프 6세로부터 건지 섬을 공략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성사시킨 뒤 건지 섬의 영주가 되어 1345년 7월에 잉글랜드군이 이 섬을 탈환할 때까지 통치했다. 1339년 에드워드 3세가 앤트워프에 상륙한 뒤 플란데런 백국 깊숙이 진군하자, 로베르 8세는 이를 막기 위해 출진한 필리프 6세의 군대에 동행했다. 그 해 10월 22일 양군이 라 카벨에서 대치해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장군과 함께 "우회할 공간은 없으니 정면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고, 정면 공격 시 적 경보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잉글랜드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양쪽에서 받아서 궤멸될 공산이 크니 전투를 미뤄야 한다"라고 진언했고, 필리프 6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물러났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프 6세의 지시를 받들어 샤를 드 블루아를 위해 장 드 몽포르를 몰아붙여 샹토소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해 11월 브르타뉴 지역의 주지사가 되었으며, 1342년 5월까지 낭트, 반, 오레, 카레플루게르를 공략했다. 1344년 71세의 고령을 이유로 프랑스 원수 직에서 사임하고 왕실 평의회 의원으로 남았다.
1346년 7월 11일, 노르망디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하려는 에드워드 3세 휘하 잉글랜드군을 장남 로베르 9세 및 300명의 병사와 함께 막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아들과 함께 부상을 입고 생존자 30명만 데리고 퇴각했다. 로베르 8세는 바이외 주교로서 캉 성을 다스리고 있던 형제 기욤에게 피신했지만, 잉글랜드군이 그를 뒤쫓아와서 1차 캉 공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잉글랜드군은 성채를 제외한 캉 시를 장악하고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포함한 여러 귀족과 상인들을 생포했으며, 주민 5,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닷새간 약탈을 벌인 뒤 성채마저 함락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잉글랜드 주력군이 파리로 진군하자, 성채에 있던 로베르 8세는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해 캉 시에 주둔하고 있던 소규모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1348년 8월 3일 보몽앙오즈에서 사망했고, 생 소뵈르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리 드 쉴리: 쉴리 영주이자 프랑스 재무관인 앙리 드 쉴리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