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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5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裵基賢 | Constantine Bae Ki Hyen | ||
출생 | 1953년 2월 1일([age(1953-02-01)]세) | |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북동[1] | ||
국적 | 대한민국 | |
주교 임명일 | 2016년 4월 19일 교구장 임명 | |
재임기간 | 마산교구장 | 2016년 6월 8일 ~ 2022년 8월 27일 |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Caritas omnia sustinet)[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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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제5대 마산교구장 주교이다. 세례명은 '콘스탄틴'이다.[3]2. 약력
2.1. 사고뭉치 학창시절
배기현 주교는 1953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대학교 영문학 교수[4], 어머니가 산부인과 의사라는, 그 시기에 보기 힘든 유복한 집안이었다.다른 주교들이 대부분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것과 달리, 배 주교의 아버지는 종교가 없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5살 때 마산으로 이사했는데, 집 근처에 천주교 월남동 성당이 있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장소는 상관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성당에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와 개신교 간 반목이 심했던 일반적인 풍토를 고려하자면 어머니의 신앙관이 상당히 교회 일치 운동과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배 주교는 학창시절을 상당히 방황하면서 보냈다. 국민학교 시절엔 지역의 수재로 꼽힐 만큼 공부를 잘 했기에, 당시 국민학교 6학년 선생님이 욕심을 내 부산의 사립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으나 긴장으로 시험에 실패, 낙방한 것. 이에 대한 반동으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마산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4번이나 정학을 당할 만큼 문제아로써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다. 자유로운 종교관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이 신앙을 가지고 마음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당에 다녀볼 것을 권유하였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 용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마산 월남동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당시에 유행했던 영화인 콘스탄틴 대제의 주인공을 보고 콘스탄틴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2.2. 방황했던 신학생 시절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던 배 주교는 문득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신학교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천주교랑 관련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가 개신교 신자였지만, 배 주교의 신학교 입학을 전혀 막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 학창시절에 유명했던 행실로 인해 성당 신자들에게 "네가 신부가 되면 개도 신부가 되고, 소도 신부가 된다."(배 주교 교구장 착좌 미사 강론 중) 라거나 "저런 망나니 같은 애가 무슨 신학교냐? 절대 오래 못 있는다."고 할 정도로 걱정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마산교구 신학교였던 대건신학대학의 면접에서도 0점에 가까운 교리시험 점수와 학적부에 적혀 있는 4번의 정학을 보고서 면접관이던 교수 신부가 "네가 어떻게,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라고 묻자 "저는 친구를 좋아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쓸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아가면 '왜 쓸쓸한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비록 행실과 교리시험 점수에서 낙제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답변으로 인해 신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분방했던 그에게 엄격한 신학교 생활은 고역이었다고 한다. 특히 새벽 미사 시간이 고역이었는데 미사에 거의 매일 빠졌다고 전해진다. 담당 사감신부는 당시 마산교구장이었던 장병화 요셉 주교에게 "신앙심이라는 것은 단 한 톨도 없다."라고 적은 평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학생이었던 배 주교를 아꼈던 장 주교는, 그 평가서를 책상 속에 집어넣고 모른 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배 주교는 신학교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2학년 1학기 때 신학교를 나오게 된다. 원래는 1학년 2학기 때 퇴학 위기까지 갔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귀가조치가 내려져서 퇴학은 면했다고 한다.[5] 자퇴한 것이 아니고 휴학했는데, 이때 어머니가 가장 슬퍼하셨고 아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천주교로 개종까지 하게 된다.[6]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 배 주교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래도 다시 신학교에 돌아가고 싶었는지 "신학교에 돌아가려면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특전사 공수부대병으로 지원하였다. 낙하훈련을 받던 중에 허리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그는 평생 허리통증을 얻게 되었다.[7] 제대 후 신학교에 돌아갔다. 제대 후에는 부상으로 인한 건강상 사유로 휴학을 자주 하였지만 그렇게 행복했다고.
2.3. 마산고 사고뭉치, 신부가 되다
평균적으로 신학교 입학 후 10년의 양성과정을 거치면 신부가 되었지만, 배 주교는 신학교 시절 방황과 건강상 사유로 인해 12년 만인 1985년 사제품을 받았다. 어머니는 "죄 많은 집안에서 신부가 나왔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그리고 출신 성당인 천주교 마산교구 월남동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데, 제대 위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당시 배 신부를 보고 많은 신자들이 믿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소식은 마산 시내에 퍼져서 '배기현 신부 사제 수품'은 마산고등학교 3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8]
남해성당 주임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7년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교와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미국에서 두 번의 교포사목을 수행했고, 사천성당 주임신부와 덕산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내다가, 2015년 1월부터 천주교 마산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으로 봉직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배 주교는 마산교구의 살림을 알뜰히 챙기면서도 사회정의를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세월호 2주기 미사에서 "세월호 참사는 천민자본주의에 찔린 물고기"라고 강론을 하고 남북통일 세미나를 주재하는 등의 여러가지 사회 참여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찍이 배기현 주교는 입담이 좋은 것으로 다른 교구에서도 유명했고, 한때는 평신도는 물론이고 사제들까지 그가 특강을 맡으면 앞자리에 앉고 싶어서 난리였다고 한다. 또한 "65세에 은퇴하여[9] 거리의 악사로 살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했을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여러가지의 성가와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2.4. 주교 수품 이후
2016년 4월 1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표명한 마산교구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의 사임청원을 받아들이고, 배기현 신부를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해 6월 8일 주교품을 받고 천주교 마산교구장으로 착좌하여 공식업무를 시작하였다.그 동안의 사제생활 동안 특유의 유머를 보여주던 배 주교는 착좌미사 중 축하식 중 여러 축사에 이은 배 주교의 답사에서 첫 마디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1:02:20부터. "사제품을 받던 날, '죄 많은 집안에 신부를 주셨다'고 제 어미가 통절히 울었습니다", "(주교가 되자) 어릴적 부모님을 그토록 애를 많이 먹였는데, 이제 마지막 벌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훌륭해서 (주교로) 뽑힌 게 아니라 불쌍해서 불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겸손해서 혹은 겸손을 가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사실이 그러합니다", "배 주교는 지금도 신부, 주교가 된 것에 대해 '기가 차다'고 말한다." 등의 발언...
특히 미사 후에는 쾌활한 성격을 보여주듯 신자들을 직접 만나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다.
평소에 배 주교와 친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들이 가서 "주교님 오늘 멋있으셨어요" 하니까 주교는 "야씨 멋있는 기 뭐꼬? 더워 죽는 줄 알았다"[10] 라고 하였다. 한 어린이에게는 "너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안 그러면 장가도 못 가고 나처럼 되는 거야"라고 말을 하여 신자들을 웃음 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다. # 영상
배기현 주교는 2017년 3월 열린 2017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22년 8월 27일, 건강상의 이유[11]로 교황청에 낸 사임청원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받아들임에 따라 교구장 이임이 발표되었다.
교구장에서는 은퇴하였지만 2023년 1월 3일, 마산교구의 사제·부제 서품식 미사를 집전하였다.[12]
[1] 현 진주시 천전동.[2]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 7절.[3] 세례명인 콘스탄틴은 영어와 독일어 표기에서 따온 표기이고(영어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콘스턴틴'이다.) 라틴어 인명인 '콘스탄티누스'가 어원이다. 천주교 마산교구 홈페이지나 언론에서도 콘스탄틴이라 기입하고 있으며, 생애 부분에 영화 <콘스탄틴 대제>에서 영감을 얻어 세례명을 지었다고 한다.[4] 아버지는 배덕환(1916~2013): 부산 출신. 만주 대동학원 졸업(최규하 전 대통령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 경남대 교수 역임. 일본 아시아 대학 객원 교수 역임. 창원전문대학 학장 역임. 국내 최초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영문학 분과 중에서도 셰익스피어 문학을 전공해서, 대학에서 연극학을 가르치기도 했다.[5] 원래 항목은 3선 개헌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러면 1969년으로 시기에 맞지 않는다.[6] 배 주교의 어머니 전풍자 모니카 여사는 1973년 마산에서 개원의 생활을 접고, 소외되고 가난한 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1981년 '용신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8년 선종. 참고로 전 여사의 세례명인 모니카 성녀는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로, 오랫동안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방황하던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한 어머니로 유명하다.[7] 지금까지 11번의 허리수술을 받았다고 한다.[8] 이는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의 증언이다. 김희중 대주교는 배 주교의 신학생 시절 스승이었다고 한다. 신학교의 김희중 신부가 학기말 시험을 앞둔 신학생들에게 긴장 풀라는 의미에서 사탕을 나눠줬는데, 배기현 신부는 그 사탕에 대한 답례로 사제가 된 후 김 주교에게 '학교로 생선 쪼매 보내겠습니다.'고 말씀드리고 대형 물차에 한 가득 생선을 보냈다고 한다. 아래 링크된 동영상 44분경부터 그 일화를 직접 들을 수 있다.[9] 천주교 성직자들의 정년은 만70세이다. 참고로 각 교구 교구장 정년은 만75세이다.[10] 사제의 복장은 엄청나게 덥다. 수단 밑에는 정장을 받쳐입는 게 원칙이며 미사 중에는 장백의부터 시작해 제의까지 수단 위에다 옷을 그야말로 겹겹이 껴입는다. 증언을 들어보면 더운 것도 더운 거지만 옷 무게까지 더해져서 배로 힘들다고... 실제로 미사 끝나고 제의를 벗는 사제를 잘 관찰해보면 땀이 엄청나다.[11] 군복무 시절 허리 부상을 입었는데 이것 때문에 신학교를 수차례 휴학해야 했고, 서품 이후에도 수차례 수술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2022년 초에는 상태가 더 심해져 수술에 들어가는 바람에 2022년 전반기의 교구장 임무를 총대리 신부에게 일임하기도 했다.[12] 은퇴 사제 신분이기는 하지만, 가톨릭 사제의 은퇴 개념은 사제직 자체에서 벗어나는 은퇴가 아니다. 서품을 받을 때부터 종신인 사제직은 그대로 가지고 있되, 본당 사목과 같은 발령지 업무와 교구 업무만 내려놓는 것이 사제의 은퇴 개념이다. 따라서, 배기현 주교와 다른 모든 은퇴한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 등 성사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주교가 된 사제가 은퇴했다면 은퇴 후에도 주교의 품계를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