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반대운동 반탁운동 | 反託運動 | Anti-trusteeship Movement | |
경교장에 모인 시위대 | |
반탁운동을 이끌며 연설하는 김구 | |
기간 | |
1945년 12월([age(1945-12-01)]주년) ~ 1947년 10월 | |
장소 | |
한반도 (특히 38선 이남) | |
원인 | |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신탁통치 오보사건 등 | |
목적 | 신탁통치 반대 및 독립 요구 |
참여 인원 | 불명 |
시위 당사자 | 임정 인사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반탁독립투쟁위원회[1] |
주요 세력 및 인물 | 반탁 진영 : 김구, 이승만 등[2] |
찬탁 진영 : 미국, 소련, 박헌영, 김일성, 조선공산당 등[3] | |
결과 |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반도 문제 유엔으로 이관 반공감정 격화 및 민족갈등 심화 미소 양군 철수 결정 독립 요구 관철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 개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의해 촉발된 신탁통치 반대운동.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진영 주도로 이루어진 운동으로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해 추진되었다.초반에는 좌우 상관 없이 추진되던 성격을 띄었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공운동의 성격을 띄었다.[4] 신탁통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2. 배경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 3개국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이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사실 이러한 신탁통치는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처리 방침이었다. 필리핀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진 예에서 보이듯이 미국은 식민지였던 국가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을 선호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굉장히 오래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최소 30년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이러한 내용을 일제의 선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인들은 다가올 신탁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당시 신탁통치는 유엔의 신탁통치 이미지와는 달랐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영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제출했고 이것에 미국이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련의 안은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임시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관계가 이러했음에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보도된 내용은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미국 태평양 사령부가 발간하던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보도 내용을 전달해준 합동통신사의 뉴스기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가 부정확한 오보에 가까운 것이었음에도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1월 소련의 타스통신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내용을 정확하게 상세하게 보도했지만 이미 벌어진 사태를 어쩔 수는 없었다.
3. 상세
3.1. 반탁운동 전개
동아일보의 보도는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고 좌우진영을 초월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촉발시켰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지배에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보도내용은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탁통치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김구와 임시정부는 매우 강경한 태도로 반탁운동을 주도했는데, 조심스럽게 신탁통치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민주당의 송진우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했다. 실제로 서울시내 다수의 경찰서장들이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이는 곧 당시의 통치권력이던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시정부가 실질적 통치를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와 임시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권력 접수가 무위에 그친 후 김구와 임시정부는 이승만 세력과 연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고 이것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창출하는 여당이 된다.
한편 좌익세력은 반탁운동을 지지하다가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반탁운동이 반공운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3.2. 반공감정 격화
사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초반에는 모두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반공운동의 성격은 미미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의 수장 박헌영이 반탁을 저버리고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지게 된다.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태도는 더욱 공고해졌다. 공산진영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내용에 대한 총체적 지지 입장을 표명하였다. 공산진영은 이후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전까지 일관되게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에 근거한 미소공동위원회 성공과 임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반면 김구와 이승만은 미군정과 소련군정과 대립하며 반탁운동을 이어나갔고, 공산진영이 찬탁을 하면서 반탁운동은 반공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1945년 말과 1946년 1월 초에 걸쳐 진행된 이후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다시 한 번 전개되었다. 그러나 2차 반탁운동은 그 강도와 규모에 있어서 1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반탁운동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4. 이후
반탁운동은 한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다. 반탁운동 덕분에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신탁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우익세력을 민주임시정부 구상에서 완전히 제외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곧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이어졌다.뿐만 아니라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좌우 간 격렬한 갈등으로 번지게 된다. 지속된 반탁과 찬탁 간의 진영싸움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반공감정과 민족갈등이 치달았고 이는 곧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유엔은 <유엔 총회 결의 제112호>를 통해 남북총선거와 통일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총선거 참여를 거부하면서 결국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치러졌고, 이는 곧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