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언론인에 대한 내용은 박에스더(기자) 문서
, 동명의 기업인에 대한 내용은 박에스더(기업인) 문서
, 동명의 유튜버에 대한 내용은 박에스더(유튜버)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서재필의 뒤를 이어 2번째 한국 출신 의사이다. 미국 볼티모어 의과대학 최연소 입학자이기도 하다.본래는 광산 김씨로 이름은 점동이었다. 김홍택과 연안 이씨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나 박유산과 결혼한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한반도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른 부부이다.
독립유공자 신의경은 그녀의 조카로, 언니 신마리아의 딸이다.
2. 상세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으로,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박에스더의 아버지 김홍택은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일을 돕고 있었다.
1885년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이 문을 열고 지금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이화학당을 세웠다. 설립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으로, 그는 남편과 사별한 뒤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에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점동도 10살 때 이화학당에 입학하였고, 12살 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았다.('박'은 결혼 후 따른 남편의 성)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영어로 조선 소녀들을 가르쳤고, 에스더는 금방 영어에 익숙해졌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이듬해인 1887년,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의료선교를 위해 조선 여성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조선에 함께 온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도 의사였지만, 남녀 구별이 엄격한 당시 조선의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거나 남성 환자들이 이용하는 병원에 마음대로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스크랜튼 부인은 여성전용병원을 세우고, 미국에서 여의사들을 초청해 왔다. 이 병원이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1]이며,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다.
영어를 잘했던 에스더는 보구녀관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이때 에스더는 흔히 '언청이'라고도 하는 구순구개열 환자가 미국인 의사의 외과 수술을 받아 감쪽같이 치료되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1893년, 에스더는 선교사들의 소개로 박유산과 결혼하였으며, 이때 (서양 풍속을 따라) 성을 박으로 바꾸었다. 보구녀관에서 인연을 가졌던 의료선교사인 여의사 로제타 홀 박사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896년에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2]에 입학하였다. 낯선 외국에서 부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2번이나 아이를 가졌지만 조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박에스더는 열심히 공부했고, 박유산은 공부하는 아내를 뒷바라지했다. 1900년 박에스더는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나, 남편 박유산은 아내의 졸업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졸업 직후 박에스더는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박에스더는 약 10년 동안 주로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서울에만 있지 않고 평안도나 황해도 등등 여러 지방을 다니며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특히 그녀의 외과 수술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의료뿐 아니라 선교에도 힘썼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박에스더는 과로로 몸도 성치 않은데다 결핵까지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었고, 결국 1910년 4월 13일에 35세라는 한창 나이로 요절했다.
2006년 11월 16일 과학기술부에서는 박에스더를 이임학, 김재근, 조백현 등과 함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다. 또한 200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박에스더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씰과 관계가 있다. 로제타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가족과 같은 가까운 관계였다.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1928년에 한국 최초로 결핵요양소를 세웠고,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이화여자고등학교는 2013년 신축한 기숙사를, 박에스더의 결혼 전 이름을 따서 '김점동관'으로 명명했다.
박에스더의 묘지는 남아있지 않으며, 미국에서 사망한 남편 박유산의 묘지는 볼티모어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남아 있다.
[1] 고종이 지어 준 이름으로,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 '보구여관'이 아니다. '보구+여관'의 합성어가 아니라 '보구녀+관'의 구조로 만들어진 말로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한글로 '보구녀관'으로 표기했다.[2] 당시 대학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데, 아마 로제타 홀 박사도 재학했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교(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와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 개교하여 1910년 폐교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가 있다.